화성시 방문간호사 부당해고 복직투쟁 중인 전미옥씨 인터뷰

[오늘, 우리의 투쟁] 화성시 방문간호사 부당해고 복직투쟁(2)

[편집자주] 너무 많은 노동자들이 너무 오래 싸우고 있다. 갈수록 장기투쟁사업장이 많아지고 벅찬 승리의 소식을 들은 기억은 오래다. 이심전심 통하는 마음으로 연대의 기운을 나누며 힘을 내지만, 지난한 싸움은 주체의 몫으로만 남아 외롭게 이어진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다독이고 새롭게 결의하며 오늘도 내일도 싸우지만, 때로는 잊혀지고 때로는 외면받는 노동자들의 이야기.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가 <오늘, 우리의 투쟁>을 통해 ‘참세상’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함께 싸워 함께 승리하는 날까지, 인간답게 살고 싶은 우리 모두의 연대를 소망하며 전한다.

  방문간호사 부당해고 철회와 화성시 직접고용 투쟁중인 전미옥 씨 [출처: 철폐연대]

어떻게 방문간호사로 일하게 되었는지, 주로 하는 일은 무엇이었는가.

예전에 병원이랑 요양원 등에서 근무를 했었다. 남편의 직업 때문에 이사를 많이 다녔었는데 이제는 애들도 많이 컸고, 화성시에 정착하게 되면서 일을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시청 홈페이지에서 구인공고를 보게 됐다. 항상 정규직으로만 일을 했었기 때문에 계약직이라고 했지만 연속고용이 가능하다고도 되어 있어서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2007년 2월부터 서류전형 면접 등을 거치고, 4월부터 본격적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방문간호사라고 되어 있었지만 업무에 대해 자세한 내용은 없었고, 상시적으로 출장을 다니는 일일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었다. 일을 시작한 이후에 보건복지부 지침을 보고 주요 업무가 취약계층 가구 방문이라는 것을 알게 됐고, 돈은 받지만 뭔가 봉사하는 일이라는 느낌도 있어서 괜찮다고 느꼈다. 우리 집이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정말 어려운 가정을 직접 찾아가서 보고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에서 만족감도 있었고, 어렵지만 보람이 있는 일이었다.

2007년의 주된 업무 내용은 수급권자와 차상위 계층에 대한 정보를 받아 가정을 방문해서 초기 실태조사에 들어가고 관리하는 식이었다. 보건복지부에서 인건비가 나오는 사업으로, 지자체 인구 대비 인원이 정해져있었기 때문에 2007년에는 보건소에서 8명이 일을 시작했다. 2인 1조로 방문을 했는데 화성시가 지역이 넓다 보니, 10월이 되어서야 당시 받은 명단 중에 거절하는 분 제외하고 1차 방문을 다 할 수 있었다. 11월 이후부터 연속 방문이 가능했고, 사업 진행을 위한 초기 실태조사에 첫 해가 거의 갔다.

주요 업무는 대상자들의 가정을 찾아 건강관리를 하는 것이고, 그 외에 관련된 사무처리나 전산입력을 해야 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사업이 안정화되면서는 보건소에서 시행하는 사업의 대상자 발굴 등 부가적인 업무들도 많이 추가되었다.

근로계약이나 업무형태, 처우 등은 어떠했는가.

2007년 말까지는 기간제로 일을 하고, 2008년 1월 말쯤에 업무대행으로 갈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들리더니 2월부터 그렇게 변경되었다. 12월에 보건복지부에서 평가를 하는데, 지자체의 담당 공무원들끼리 다른 지자체에 물어서 평가 관련 조언을 듣고 서로 참조하는 것 같았고 안산시에서는 당시 이미 업무대행으로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업무대행은 개별적으로 개인사업자등록을 내고 계약을 하는 것이었는데, 서류 처리는 보건소에서 일괄적으로 했다. 2008년부터는 1인 1동제로 업무를 배치하면서 21명의 간호사와 2명의 운동사, 2명의 영양사 등 총 25명이 함께 일하는 체제가 되었다. 2011년부터는 사업이 민간위탁되었다. 보건소에서는 선생님들을 연속고용하기 위해서라고 표현을 했고, 3년은 고용이 보장된다고 했지만 계약은 1년 단위로 했다.

기본적으로 하루 8시간씩 일했고, 연가가 없다고 해서 항상 주5일 근무였다. 공무원 복무규정에 준해서 일을 했음에도 의무는 그대로 하고 혜택은 전혀 없었다. 임금 부분에 있어서도 급여명세서를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수당이나 공제되는 내역에 대해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호봉이 인정이 되어서 1년이 지나면 수당이 인상되는 급여체계였지만, 개인사업자로 했을 때는 4대보험 가입이 안 되었기 때문에 형편에 따라 지역의료보험에 가입해야 하는 경우에는 임금손실이 발생하기도 했다.

일하면서 비정규직임을 체감하는 경험들이 있었는가.

처음에 사업단 발대식을 할 때 시장이 건의사항을 물어봤는데, 우리가 출장비에 대해서 얘기를 했다. 방문보건차량을 지원받는 게 처음에는 8명에 대해서 2대였고, 나머지는 교대로 써야 했기 때문에 개인차량을 사용하게 되고 유류비가 많이 들어가는 부분에 대한 건의였다. 시장이 그 자리에서 공무원에 준해서 출장비를 주라고 했지만 바로 시정되지는 않았고, 나중에 우연히 선생님들이 계속 개인차량을 사용한다는 것을 알게 된 시장이 보건소장에게 언질을 한 일이 있었다.

이후에 담당하는 주무관이 우리들이 소통하는 카페에다가 ‘보건소장은 보건가족의 아버지인데 밖에 나가서 아버지의 치부를 떠든다’는 식의 글을 올렸다. 그 글을 읽고서 개인적으로는 엄청 자존심이 상했고, 우리 처지가 이런 거구나 각인이 됐던 것 같다.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하고 싶은 말을 잘 못 하는 분위기가 됐다. 몇 개월 후에 출장비와 식비가 인상되기는 했는데, 사전에 정확히 고지된다거나 설명이 된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이후에는 또 설명 없이 줄어들기도 했고, 그냥 주면 주는 대로 받아야 하는 게 관행이었다.

한 번은 실적과 관련해서 선생님들의 문제제기가 있어서 주무관에게 분위기가 과열되지 않도록 정확한 오더를 내려달라고 건의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주무관이 선생님들과 면담을 하고 난 뒤에, 센터장이 소란을 불러일으켰다는 이유로 나에게 시말서를 요구했고, 결국 시말서 대신 사유서를 썼다. 열심히 일해도 아무런 권한도 없고 정당한 문제제기가 소란의 원인이 되는, 게다가 함께 일하는 선생님들도 실적이 우선이 되다보니 동료애는커녕 서로 염탐하고 질시하고 그런 분위기에 대한 회의감 같은 게 있었다.

사실 일을 할 때에는, 나이가 들어서 비정규직으로 일을 시작하면서도 고용형태에 대한 생각보다는 그저 일을 한다는 것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내 마음가짐과 달리 사무실에서는 우리들을 임시적이고 보조적인 비정규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일상적으로 민감하게 반응하면 자괴감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동료끼리의 의사소통도 별로 없고, 괜히 눈치 보게 되고 위축감을 느끼게 되고 그랬던 것 같다. 부당한 지시사항이나 잘못된 부분에 대해 반대하는 마음이 있어도 실제로 얘기를 하는 사람은 거의 나 뿐이었다. 잘려도 호봉이 높은 우리가 먼저 잘릴 것이다 하는 식의 불안감들이 있었고, 어쨌든 계약직들이다 보니까 다들 고용에 대한 불안이 상시적이고 특히나 연말이 되면 더욱 그랬다.

민간위탁 이후 일하면서 이전과 달라진 점이나 느꼈던 차이점이 있는가.

위탁을 들어오면서 실적 강요가 더 심해졌다. 방문실적에 간호사 수를 나눠서 평점을 매기는 식으로 정부합동평가가 매년 이뤄지고 전국적으로 순위를 매기기 때문에 지자체에서도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고 위탁기관으로서도 좋은 성적을 내야 하니까 더욱 과열되는 측면이 있었다.

처음에는 우리가 한 달에 한 번쯤 사례관리 발표를 조별로 했는데, 실적이 좋은 선생님이 사례 발표를 하면 실제 사업의 취지를 살리기보다 성과를 높일 수 있는 쪽으로 몰아가는 경우도 있었고 갈수록 선생님들끼리의 줄서기가 됐다. 복지부 지침에 따르면 평가는 전담인력의 연속고용율, 조직 구성, 사업비 확보, 사례관리 과정, 방문인력의 적정 방문수, 보건소 내‧외 연계건수, 취약가구 등록관리율 향상률, 대상자 만족도 등 투입과 과정 및 결과까지 전체 방문관리사업을 대상으로 하는데 실제 운영에 있어서는 무리수를 두게 되는 것이 현실이었다.

한편 동료들 사이에서도 위화감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전담인력 이직시의 공백을 메우고 상시적인 교육 및 행정 업무 등을 담당하기 위해 2010년에 동료들 중에서 제일 어린 막내를 선임간호사를 세웠는데, 처음에는 50%만 방문을 하고 나중에는 아예 방문 대신 행정업무만 전담하는 식이 됐다. 그러다보니 주무관과 함께 사무실에서 일하는 선임간호사는 이런저런 지시를 하는 중간관리자가 되었고, 동료들은 방문을 하지 않는 선임간호사의 몫까지 담당해야 하는 부담을 지면서도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 되어갔다. 명절이 되면 주무관에게 선물을 하자는 제안이 있고는 했는데 나중에는 워크숍에 다녀오면서 선임간호사에게까지 선물을 하자는 말이 나올 만큼, 내부의 권력자처럼 관계가 바뀌어갔다.

  연대모임 동지와 함께 부당해고 철회 화성시청 선전전 [출처: 전미옥]

해고의 과정에 어떠했는가.

일을 시작한 뒤로 늘 1년 단위로 계약을 해왔었는데 자발적으로 그만 두지 않으면 계속 일을 하는 게 관행이었다. 업무일지와 출장부 등의 서류를 보통 12월 말쯤에 새로 만들었고, 전 달의 실적을 다음 달 5일 이내에 보건복지정보개발원 프로그램에 입력 완료해야 하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당시에도 변함없이 그렇게 업무를 했다. 아무 일 없이 2012년 연말이 지나갔고, 2013년 1월 2일에도 선임간호사가 요청한 업무가 있어서 일을 했다.

그런데 1월 4일 금요일 퇴근길에 센터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매년 말에 발표하는 개인 업무실적에서 내가 만족도조사 꼴등을 했다며 계약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기존에는 보건복지정보개발원 해피콜을 통해 만족도 조사를 했었는데, 화성시에서 자체적으로 따로 한다고 대상자 중 열 사람을 선정한다는 공고가 12월에 났었고 내가 낸 대상자들의 전화번호가 틀린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전까지 화성시의 다른 지역을 담당하다가 2012년에 새롭게 봉담 지역을 맡게 됐기 때문에, 대상자 전화번호 정보가 틀린 건 전임자의 실수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정확한 근거를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1월 7일 월요일에 출근을 해서 같이 일하는 동료들과 주변의 정규직들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다들 놀라워하면서 공감을 해줬고 일단 출근을 계속하라고 격려를 해줬다. 많이 당황스러웠지만 해고사유를 정확히 알고 싶었고, 당시 약물과 소모품 관리를 내가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장 손을 떼고 갈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선임간호사와 주무관에게 해고 관련해서 알아봐달라고 하고 센터장에게 연락을 했지만 연락이 없었고, 다음 날 출근했더니 센터장은 이미 다른 동료들에게 내가 일할 수 없도록 하라고 조치를 해놓은 상태였다. 할 수 없이 사용자인 산학협력단에 연락했더니 그제야 센터장이 왔고 문서로 해고장을 달라는 요구에 2012년 12월 31일자로 소급해서 사직서를 쓰고 나가면 실업급여를 받게 해주겠다는 말 뿐이었다. 노동부에 문의하니 부당해고 신청이 가능하다고 해서 1월 9일에 구제신청을 했더니 다음 날 선임간호사가 만나자는 연락이 와서 거부했다. 그랬더니 내용증명으로 합의서가 왔는데, ‘2012년 12월 31일자로 계약만료, 민사상‧형사상 이의제기를 하지 않으면 한 달 분의 임금을 지급한다‘는 내용이었다.

어려운 투쟁을 결심한 이유는 무엇인가. 투쟁 과정과 투쟁하면서 느꼈던 점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달라.

이후 노동위원회를 거치면서 사측이 거짓 주장과 허위 자료들을 대면하면서 억울함이 더해졌다. 지방노동위원회에서 사측은 만족도조사 하위 10%에 대해서는 재계약을 하지 않기로 운영위원회에서 결정했다고 했지만 대상이 된 동료들과 실적을 비교해보면 평가와 만족도조사의 공정성이나 신뢰도에 문제가 있다는 게 금방 드러났다. 방문건강관리 사업의 실적 계상이 복잡하고 복합적인데다 사측은 허위로 조작된 민원과 주장까지 펼쳤기 때문에 지방노동위원회에서 기각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노동위원회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사측에서 화해 신청을 여러 번 제기했었다. 근로자위원이 직접 연락을 하기도 했고, 4개월분의 임금을 주겠다는 제안도 있었다. 중앙노동위원회에서도 바로 결과를 안 내겠다며, 사측에서도 양보를 하고 양자 간 화해를 하라는 식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중앙노동위원회도 마찬가지였고, 부당해고 신청에 대해 기각 판정이 내려졌다.

처음부터 화해할 마음은 없었고, 너무 억울해서 복직을 꼭 하겠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2012년에 신규 지역으로 발령이 나서 전년도에 비해 실적이 낮을 수밖에 없는데도 2012년만을 근거로 평가를 했고, 만족도조사 역시 내가 담당하는 대상자들의 생활패턴이나 특성 등을 전혀 모르는 채로 기계적으로 진행해놓고 전화를 안 받았다거나 번호가 다르다는 거짓 자료를 냈다. 이후에 만족도조사 대상자들에게 일일이 연락을 드려서 조사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는 것도 확인했다.

너무나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해고가 되었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었고, 내가 만약 정규직이었다면 이렇게 퇴근길 전화 한 통으로 해고될 수 있었을까 생각이 들었다. 사실 노동위원회에서 사건이 진행될 때까지만 해도 공공기관이니까, 법이라는 게 있으니까, 라고 생각을 했었다. 내가 진심으로 열심히 일해 왔기 때문에, 법이나 세상의 기준이라는 것이 제대로 작용할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노동위원회 판정 이후 이런 관계를 없애야겠다는 생각에 소송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다른 방문간호사 집회에도 가고 노동조합에도 가입했다. 중간에 보건소의 주무관이 교체된 후에 방문팀의 다른 기간제로 일하자는 제안이 왔지만 거절했다.

이후 나를 해고한 중앙대를 상대로 민사소송 준비와 진행을 하면서 꾸준히 일인시위와 간혹 집회 등을 하고 다른 투쟁에 연대도 하고 있다. 별다른 진전은 없지만 민간위탁을 준 화성시가 책임져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면담도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중앙대 산학협력단 방문건강센터는 2013년으로 위탁 운영을 접었고 2014년부터는 수원의 동남대에서 위탁을 받았다.

  부당해고 이후 방문건강관리 대상자 가족이 자필로 작성한 진정서 [출처: 전미옥]

앞으로의 투쟁 계획은? 투쟁하면서 어려운 점이나 바라는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매주 월, 목요일마다 화성시청 앞에서 일인시위를 한다. 주로 지원모임에서 함께하고 있고, 내가 조합원으로 있는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연맹 경기지역본부에서도 함께하고 있다. 중앙대학교를 상대로 한 민사소송이 진행중이고 2월 18일 첫 번째 심리를 앞두고 있다.

사실 남편이 잘 이해를 못해주기도 하고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생각하는 게 있어서 좀 어렵기는 하다. 조직과의 싸움이고 혼자만의 싸움이고 그렇기 때문에, 남편을 설득하며 투쟁을 해야 하는 게 마음 아프다. 처음에는 중앙노동위원회 결과 나올 때까지라고 했었지만, 민사소송 들어가면서 또 설득을 하고 있다. 남편은 특히 일인시위하거나 할 때 봉변을 당할까봐 걱정을 하고, 보호자로서 지켜주지 못하는 부분에 대한 안타까움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얼마나 열성적으로 일했는지 알기 때문에, 퇴근길 전화 한 통으로 해고되고 부분에 대해서 함께 속상해하고 화나 하는 부분이 있다.

나는 학교 때부터 노동운동이나 데모나 그런 부분에 대해서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을 했었다. 내가 그렇게 어려웠던 적이 없고 하니까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만약에 내가 근무를 하는 동안 노동조합이 조직 사업을 하거나 했다면 관심을 가졌을 것 같기는 하다.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이랄까, 그런 부분들. 상사에게 받는 마음의 상처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공무원들이 같은 사무실을 쓰고 있는데 본인들도 우리들을 직원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위탁으로까지 가니까 완전히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해고를 당하고 나서 노동조합에 가입했지만, 우리의 권리를 찾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에 가입을 해서 교섭을 한다든가 더 나은 처우를 요구한다든가, 아주 큰 요구가 아니더라도 노동자로서의 자존감을 가지고 했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마산의 코리아타코마라고, 한진중공업으로 합병된 선박방위산업체의 의무실에서도 일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거기 노동자들이 파업을 할 때도 우리는 관리직 쪽에 더 가까웠으니까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노동조합 경험이 있었다면 이렇게 대처를 했을까 그런 생각이 들고, 노동자의 권리는 노동자가 찾을 수밖에 없다는 걸 느낀다.

인터뷰를 위해 전미옥씨는 노동위원회와 민사소송 등을 위해 준비했던 각종 자료들을 가져왔다. 그 중 눈에 띄는 것은, 부당해고 소식을 듣고 방문건강관리 대상자였던 어머님의 아들이 친필로 길게 작성한 진정서였다. 전미옥씨가 민원불만과 근무태만으로 해고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본인의 담당이 아님에도 민원이 제기되자 자신의 일처럼 어머님을 성심성의껏 돌봐준 일들을 서술하며 복직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는 내용이었다.

전미옥씨는 해고 소식을 접하고 영문을 몰라 연락해왔던 동료들이 사측의 요구에 작성한 거짓 진술서들을 확인하고, 사측 편에 선 선임간호사의 공격을 받으면서 엄청난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자신이 열과 성을 다했던 방문건강관리 사업과 함께 일했던 동료들이 받을 타격을 우려해 사측이 노동위원회에 제출한 허위 자료들에 대한 반박조차 하지 못했을 만큼, 일에 대한 진한 애정과 일체감을 가졌던 노동자였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마음을 담아 일해도 비정규직 노동자, 간접고용 노동자에게는 당당하게 설 자리가 없다. 전화 한 통으로 해고되고도 싸움의 상대조차 명확하지 않다. 전미옥씨를 부당해고한 중앙대학교는 2013년으로 3년간의 위탁운영을 접었고, 화성시는 또다시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지침을 무시하고 동남대학교로 위탁 운영을 맡겼다. 이렇게 노동자를 손쉽게 통제하고 착취하며 사용자의 책임을 악의적으로 회피하는 구조는, 노동자들이 투쟁하지 않는 한 무한 반복될 것이다. 이러한 부조리와 혼란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을 전미옥씨는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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