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키는 대로 일하는 1등 정비사에서 권리를 찾는 버스노동자로

[오늘, 우리의 투쟁] 한남운수 부당해고자 원직복직, 버스완전공영제 투쟁(2)

[편집자주] 너무 많은 노동자들이 너무 오래 싸우고 있다. 갈수록 장기투쟁사업장이 많아지고 벅찬 승리의 소식을 들은 기억은 오래다. 이심전심 통하는 마음으로 연대의 기운을 나누며 힘을 내지만, 지난한 싸움은 주체의 몫으로만 남아 외롭게 이어진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다독이고 새롭게 결의하며 오늘도 내일도 싸우지만, 때로는 잊혀지고 때로는 외면받는 노동자들의 이야기.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가 <오늘, 우리의 투쟁>을 통해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함께 싸워 함께 승리하는 날까지, 인간답게 살고 싶은 우리 모두의 연대를 소망하며 전한다.

  한남운수의 부당해고에 맞서 투쟁중인 이병삼 조합원 [출처: 철폐연대]

열여섯에 시작한 버스 정비 일을 천직으로 알았던 노동자

2008년 부도를 맞은 한남운수를 인수한 박복규 대표이사는 2009년 2월 취임식에서 정비노동자 인원 감축과 임금 15% 삭감, 연봉제 도입을 빌미로 한 1년 계약의 비정규직화를 일방 통보했다. 2002년부터 한남운수에서 일해 온 이병삼씨와 정비노동자들의 힘겨운 싸움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부당 전보와 정직, 해고에 이르기까지 5년째 투쟁하고 있는 이병삼씨는 이런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회사의 평가에서 1등으로 꼽힐 만큼 유능하고 성실한 정비사였다.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불평불만은 동료들과의 술자리로 날려버리고 열심히 일했던 지난날의 자신이 종노릇을 한 거였다며 웃는 25년 경력의 정비노동자. 지난한 투쟁 속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배우고 깨닫고 실천하고 있는 이병삼 씨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86년도부터 정비노동자로 일했다. 중학교 졸업하고 모친이 일찍 돌아가셔서 가사가 좀 힘든 관계로 학교에 진학할 수가 없는 환경이었다. 아버지는 어업을 하고 계셨는데, 어부 되는 것보다는 가서 기술을 배우라고 하셔서 광명시에서 정비를 배우기 시작했다. 카센터에서 먹고 자면서 기술 배우는 걸로 해서 6개월 정도 있었는데 돈을 안 줘서 버스회사로 옮겼다.”
“처음에 일한 버스회사는 광명의 화영운수라고, 경기도버스였다. 당시에는 정비사 중에 초등학교도 안 나온 사람도 많았다. 미성년자들도 나 말고 8명인가 있었다. 회사에서 기술 배우는 걸로 해서 처음에는 월급 3만 원 정도 주고 그랬다. 그렇게 정비를 좀 배우고 나면, 경력도 쌓이니까 아는 사람 통해 회사를 옮기면서 급여도 조금씩 올라갔다. 주로 경기도랑 서울의 버스회사에서 일했고 한남운수에는 2002년에 입사했다.”


노동자는 쥐어짜고 사업주만 배불리는 버스준공영제

이병삼씨가 입사한 시기 한남운수는 서울의 주요노선을 운행하는 대규모 버스업체였다. 버스준공영제가 시행되기 전, 노후화된 버스가 많은 때여서 정비인력이 많이 필요했고 실제로 많은 노동자들이 일했다. 2004년 버스준공영제와 함께 전체적으로 차량이 줄어들면서 많은 버스노동자들이 정리해고를 당했고, 일터에 남은 노동자들의 노동 강도는 서서히 높아져갔다.

“당시 한국노총 산하 노동조합이었는데 버스업계 대부분이 그랬고 누구 하나 투쟁하는 것도 없었다. 회사에서 목록 만들어서 너, 너, 너 가라고 하면 그냥 가는 식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 많은 인원이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됐다. 인원이 많았을 때는 예방정비를 많이 했는데 사람이 없으니까 준공영제 이후에는 예방정비가 전무해졌다.”

“당시엔 주40시간 노동제가 되기 전이어서 정비노동자들은 일주일에 한 번 쉬며 일했다. 보통 아침 8시 출근해서 퇴근은 저녁 5시였는데, 대신에 버스가 밤늦게까지 운행하기 때문에 야간 당직이 있었다. 두세 명씩 조를 짜서 5개조 정도가 돌아가면서 24시간 일하는 연장근무였고, 한 달이면 6번 정도는 회사에서 야간 당직을 했다. 낮이나 밤이나 버스의 고장 확률은 같지만 차는 시간 맞춰 나가야하기 때문에,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은 예비차량이 있으니까 다음날 주간에 하고, 밤에는 급한 것만 해결하는 시스템이었다.”


차고지에 막차가 들어오는 시각은 보통 새벽 1시 반, 4시 반 전에 첫차가 나가기 때문에 버스기사들은 4시 정도면 출근을 했다. 첫차로 나갈 차량에 문제가 생기면 곤란하기 때문에 야간 당직을 하는 정비노동자들이 눈을 붙일 시간은 거의 없었다. 중간에 2년 정도는 비좁은 차고지에 들어오지 못해 도로변에 세워둔 막차 버스들을 첫차가 나가기 전에 옮기는 것도 당직자의 일이었다. 하지만 사업주들은 야간 당직을 일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게다가 버스준공영제가 도입되면서 호봉제 실시와 함께 근속수당이 사라졌다. 호봉제는 운전직에만 적용되었고, 정비노동자들의 임금과 노동 조건은 지속적으로 저하되었다.

“준공영제 이전에는 어용이더라도 노사 간의 협의를 통해서 임금 인상이 적게나마 있었는데, 기사는 조합원 수가 많고 상대적으로 정비사들은 소수이기 때문에, 소외받은 거라고 보면 된다. 사측에서 불법으로 하는 걸 노조가 묵인한 것이다. 사측이 챙길 필요도 없고 노조도 챙길 필요가 없으니까 정비노동자들만 갈수록 열악해지고 탄압받게 된 거다.”

“표준운송원가 기준으로는 한남운수의 차량이 158대니까 정비사 22명이 있어야 맞다. 그런데 표준정산이라고 해서 정비사들은 일을 하든 안 하든 버스 대수에 따라 지원금이 나오니까 회사에서는 어떻게든 수를 줄이려고 한 거다. 지금 한남운수에는 정비 담당이 계장, 과장 빼고 11명 있다. 계장과 과장은 정비 관련한 사무업무나 차량검사 그리고 회사 앞잡이 노릇을 한다. 일하는 현장은 감시카메라로 도배가 되어 있다. 작은 휴게실 빼고는 다 있다. 올라가보니까 확대하면 50미터는 되는 거리인데도 눈동자 왔다 갔다 하는 것까지 다 보였다. 노동자들을 일상적으로 감시하는 거다. 작년에는 정신적으로 힘들어서 2명이 그만두기도 했다. 이제까지 그만 둔 사람이 3명인데, 한남운수 회장이 운영하는 택시회사에 있던 사람 3명이 비정규직으로 왔다. 버스는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기존에 있던 정비사들은 더 힘들 수밖에 없다.”


  2013.6.13. 제17회 서울남부 노동해방열사문화제에서 열사상을 받고 있는 이병삼 조합원

권리를 찾는 노동자에게 가해진 일상적 괴롭힘과 부당 징계 그리고 부당 해고

연봉제를 빌미로 임금을 동결하고 1년 계약직으로 돌려 정비노동자들을 비정규직화하려는 사측의 시도 역시 계속되었다. 뻔히 알면서 노동조합에도 호소해봤지만 사측과 다를 바 없었다. 정비노동자들은 맞서 싸울 방법을 찾기 위해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의 문을 두드렸다.

정비노동자들이 순순히 말을 듣지 않자 사측은 대형면허 보유자 6명을 운전직으로 부당 전보하고 지방노동위원회 사건이 진행되는 반년 가까이 임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무임금으로 버텨야하는 동료들을 위해 정비노동자들은 임금을 쪼개 십시일반으로 서로를 도왔지만 생계가 목에 걸린 6명은 결국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사태가 일단락되자 회사는 정비노동자들이 보낸 내용증명에 대표로 이름을 올렸던 이병삼씨를 주모자로 지목해 집중적으로 괴롭히기 시작했다.

“회사는 하루아침에 나를 빨갱이로 몰았다. 매일 출근하면 개인면담이라고 불러댔다. 갑자기 핸드폰 갈취하려고 해서 경찰 부른 적도 있고 밀실 같은 2층에서 폭언하고 협박하다가 살려달라고 했는데 사측이 역으로 3주 진단서 끊어서 내가 폭행했다고 고소한 사건도 있었고. 두 번 다시 듣고 싶지 않은 내용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들에 수치심도 많이 느끼고 살기 싫을 때도 많았다. 신상을 줄줄 꿰면서 협박을 하면 무섭기도 했다. 너무 두려워서 잠도 거의 못 잤고 한 2년간은 정신을 잃어버리면 나도 모르게 자니까 술을 달고 살았다. 그러면서 건강도 안 좋아지고 죽을 생각하고 강원도에 간 적도 있고... 그 당시에는 정말 살기도 싫었다, 내가 왜 이런 세상에 살아야 되나 싶고. 쌍용차니 막 주변에서도 자꾸만 죽어가고 막 그러니까. 그때 당시에는 맨 정신일 때가 별로 없었다. 아침에 어딜 가도 술 냄새 풀풀 풍기고 다니고 저녁때 또 먹고, 낮에도 먹고.”

두렵고 위축될 수밖에 없는 고통스러운 시간들이었지만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노동법에 대해 공부하면서 이병삼씨와 정비노동자들은 현장의 권리를 조금이라도 되찾기 위해 애썼다.

“휴게시간 없었던 걸 우리 점심 때 1시간 달라고 하고 그 동안 부당하게 했던 것에 대해서 요구를 하기 시작했다. 연차 그 동안 사용하지 못했던 것 사용하겠다고 해서 휴게시간 1시간 찾고 노동부를 통해서 그 동안 못 받은 연차금액 받고 그런 부분들이 있었다. 그동안에는 점심시간도 없이 일하고 밥 먹다가 말고 어디 차고에 가야하고 밥도 못 먹고 그런 것도 많았고, 우리가 몰랐던 부분들을 학습을 통해서 알게 되고 우리 권리가 있구나, 바보 같이 당하지만 말고 찾자 그런 것들이 정비사들 사이에서 형성이 되기 시작했다.”

“회사가 탄압을 하니까 자연스럽게 투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무슨 그 전에 조합을 만들겠다거나 노동법을 꿰고 있다거나 그런 것도 없었고, 맞대응을 해야 되다 보니까 나도 뭘 좀 알아야 되고 그러다보니까. 단사 문제만이 아니라 옆의 투쟁사업장들이 있다 보니까 가게 되고, 그렇게 된 것이다. 내가 버스 내에서도 정비사들의 기쁨조였다, 힘들 때 사람들 웃게 해주는 재주도 있고. 근데 하루아침에 빨갱이로 몰리고.”


하지만 사측은 2009년 10월 갖은 억측으로 이병삼씨에게 3개월의 정직 징계를 내리고, 또다시 대형면허보유자 5명을 운전직으로 부당 전보했다. 이들이 대형면허를 반납해버리자 2010년 5월에는 3명을 정직 징계하고 이병삼씨를 비롯한 2명을 해고했다.

“운전직 거부에 대해서 회사의 업무지시 불이행이라고 했는데, 사실 대형면허를 취득해도 최소 1년 6개월은 지나야 운행을 할 수 있는데... 나는 정직 먹고 다시 왔을 때를 계산해도 6-7개월 밖에 안 된 시점이었는데도 그게 받아들여졌다, 고법에서. 다른 해고자는 승소해서 밀린 임금 받고 지금 일하고 있다. 같은 건인데도 부당 징계, 부당 해고에 대해 판결은 다르게 나왔다. 변호사도 이해가 안 간다고 했다. 대법으로는 간지는 이제 1년쯤 됐는데 언제 결과가 나올지는 알 수 없다.”

얼어붙은 현장을 바꾸고 싶은 공공운수노조 서울경기버스지부 정비사지회

정직과 해고로 생활은 엉망이 되었다. 홀로 키우는 고등학생 아들을 제대로 돌볼 수도 없었고 경제적인 압박도 점점 심해졌다. 투쟁과 생계를 병행하기 위해 주유소 알바니 택배도 해봤지만 오히려 다쳐서 돈만 더 들어가고 몸만 축났다. 투쟁이라도 제대로 하자 생각한 뒤로는 주변의 지원과 형님 동생 사이로 오랜 기간 함께 일해 온 한남운수 정비사들의 십시일반으로 근근이 버티고 있다. 회사의 탄압이 지독하다보니 선뜻 앞으로 나서지는 못하는 동료들이지만, 마음으로는 응원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안타깝지만 끈질기게 투쟁하면 바뀌는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한다.

“현장의 불만들은 많다. 두려움 때문에 지금 민주노조를 못 하는 거지, 밖에 나오면 우리들이 주장하는 게 다 옳다고 다 본인들도 알고 있는 사람들이고 사측에서 아직도 연봉제 못 하고 있는 부분이, 무언 속에 누구 말마따나 ‘투쟁! 투쟁!’ 안 해도 저항을 하고 있기 때문에 못하고 있는 거다. 알다시피 우리가 끊임없이 여기서 집회도 하고 하기 때문에.”

“한남운수는 지금 선거기간이고. 후보 세 명이 등록했다. 대표이사가 부당하게 하는 부분에 대해서 말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는데, 내가 보는 관점에서는 그럴 만한 용기 있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노동자들이 바뀔 때가 됐는데... 좀 바뀌었으면 하는 마음에 집행부도 만나보고, 우리들이 같이 살 수 있는 길을 가야되지 않겠습니까 얘기를 하는데, 그게 아직은 말처럼 되지를 않는다.”


무엇보다 가장 큰 힘이 된 건 뜻을 함께 하는 동지들과 민주노동조합을 설립한 것이었다. 지난해 7월 19일 여러 회사의 정비노동자들이 의기투합해 공공운수노조 서울경기버스지부 정비사지회를 설립했다. 오랫동안 투쟁하며 고통과 상처로 심신이 지쳐가던 이병삼씨가 스스로를 추스르며 더욱 힘을 낼 수 있는 계기이기도 했다.

“2009년부터 3개 회사 정비사들끼리 회를 만들어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될 건지 고민하고 했는데, 어떻게 보면 노동조합으로 가기 위한 사전 모임이었다. 시작할 때 30명 남짓이었고 지금도 인원은 똑같다. 민주노조 하면 바로 뭐가 다 해결될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바로 되는 건 하나도 없다. 싸움이 필요한 부분이고 시간이 또 필요하고, 서서히 조금씩 바꿔 나가는 거지 한꺼번에 바뀌지 않는다. 쟤들이 어떤 놈들인데. 그리고 조합 자체가 한국노총이 다수노조이다 보니까, 민주노조는 핍박을 받고 쉽사리 함께할 용기를 내지 못하기도 하고, 왔다가도 탄압이 들어오면 다시 가버리는 일도 있었다. 다만 활동할 수 있는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늘어났고. 조합원수가 적기 때문에 조직사업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다.”

“나 같은 경우 해고 싸움을 하고 있지만, 전체 버스노동자들을 보면, 잘못된 부분을 원천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나 같은 사람들이 제2, 제3으로 생길 수밖에 없기 때문에, 조합을 하면서는 좀 더 생각을 하게 되는 거다. 내 개인의 복직이 물론 중요하지만, 조합을 설립하고 활동을 하면서는 버스의 공공성을 살리고 그동안 잘못돼 있던 노동환경도 좀 바꿔보자 하는 거다. 회사마다 부당노동행위라든가 그동안의 체불된 부분에 대해서 법정싸움을 하고 있고, 일부 승소한 회사도 있다. 일단은 많이 알리는 역할이 필요하니까 법정싸움이랑 더불어서 현장에서 알리는 게 중요하다.”


  2014.2.18. 한남운수 대학동 차고지에서 매주 화요일 오후3시에 열리는 원직복직 쟁취 집회

나이 마흔에 만난 새로운 세상, 현장으로 돌아가 펼치고 싶은 민주노조의 꿈

이 땅 모든 노동자들의 투쟁이 가시밭길이지만, 막강한 토호세력인 버스자본과의 싸움 역시 만만치 않다. 잘못된 현실을 알면서도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동료들에 대한 안타까움, 투쟁의 시간이 쌓여가며 누적되는 개인적인 어려움들도 물론 크다. 노동권과 버스의 공공성을 찾으려는 싸움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생사를 가르는 복직투쟁이기 때문에 한남운수의 유일한 해고자로서 때로는 심란하기도 하다.

“쌍차 동지들 만나면, 기주 형님이나 성진이 만나면 내가 그랬다. “이런 걸 부러워하면 안 되는데 그런 것도 있어, 그래도 형님은 여러 명이라도 있잖아, 외로울 때 얘기라도 할 수 있잖아. 의논도 할 수 있잖아. 나는 없어.” ... 아마 마누라가 있었으면 안 싸웠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생계 때문에. 보통 부인들은 딴 데 가서 빨리 일 하라고 했을 테니까, 아니면 집을 나갔을 거다, 무능한 남편이라고. 나도 그래서 과연 부인이 있었으면 어떻게 됐을까, 이 길을 갈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가끔은 해봤다.”

하지만 대학생이 된 아들이 투쟁하는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게 고맙고, 버스 노동자들의 싸움은 이제 시작이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는다. 고통스러운 투쟁 속에서도 나이 마흔이 넘어서야 알게 된 노동자의 권리와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자각을 통해 이병삼씨는 새로운 세상을 만났고 스스로의 변화를 실감하고 있다.

“완전히 달라졌다. 일단 나는 가부장적인 사람이었다, 집안 내력이. 한 마디로 여자가 어디서? 그런 거. 남자, 여자, 평등 뭐 이런 거에 대해 전혀 몰랐고, 사람은 누구나 동등하고 권리가 있다는 것, 하다못해 아이도 자식이지만 내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나만이 아니라 조합원들도 교육하고 학습하면서, 뭐 집에 가면 부인들한테 막 쌍욕하고 그랬던 분들이 술 먹고 들어가도 이제 얌전하게 들어가게 되고, 그러면서 사랑 받는다. 빈둥거리고 있으면 부인들이 노동법 교육 안 가? 할 정도가 됐다. 바뀐 점들이 여러 가지로 많다. 지금도 일주일에 한 번씩 정비지회 동지들이랑 계속 교육을 하고, 전태일을 따르는 사이버노동대학에서도 계속 공부하고 있다. 전혀 모르던 것들을 새롭게 알게 되니까 재미있다.”

다행히 지난해 지역의 공동대책위가 꾸려져 힘이 되어주고 있고 이병삼씨의 어려운 사정이 알려지면서 연말 ‘노동자한마당’ 행사를 통한 지원도 있었다. 준비했던 천장의 티켓이 동났고 한남운수의 동료들 역시 힘을 보탰다. 해고 투쟁이 길어지며 겪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이병삼씨는 함께 싸우는 정비지회 해고자를 챙기고, 아들의 대학등록금을 감당할 수 있었다.

“대법에서 승소하면 다시 한남운수로 돌아가서 일하고 싶다, 받아만 주면 다른 데서도 일할 수 있겠지만 아마 지금 현재 상황에서는 받는 데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법을 믿지는 않지만, 대법 판결이 잘 나야 복직을 할 수 있으니까. 법으로도 해결이 되지 않으면 막장 투쟁을 해야 되지 않겠나, 뭐 막말로 해서 빵에 가서 밥 얻어먹고 사는 게 낫지 않나 하는 마음도 갖고 살고 있다.”

이병삼씨는 현장으로 돌아가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정비노동자들의 민주노조를 지키며 더 많은 동지들과 함께 권리를 찾고 싶다. 해고 이후 4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생의 나락으로 떨어진 듯 절망할 때도 있었고 운동을 통해 새로운 자신과 만나는 해방감을 느끼기도 했다. 어렵사리 용기를 낸 동지들과 함께, 얼어붙은 버스 현장을 바꾸고 싶은 꿈으로 오늘도 투쟁을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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