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 혐오하는 자본과 언제라도 붙었을 싸움, 끝까지 간다.”

[오늘,우리의투쟁] 금속노조 콜텍지회 이인근 지회장 인터뷰

[편집자주] 너무 많은 노동자들이 너무 오래 싸우고 있다. 갈수록 장기투쟁사업장이 많아지고 벅찬 승리의 소식을 들은 기억은 오래다. 이심전심 통하는 마음으로 연대의 기운을 나누며 힘을 내지만, 지난한 싸움은 주체의 몫으로만 남아 외롭게 이어진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다독이고 새롭게 결의하며 오늘도 내일도 싸우지만, 때로는 잊히고 때로는 외면받는 노동자들의 이야기.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가 [오늘, 우리의 투쟁]을 통해 <참세상>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함께 싸워 함께 승리하는 날까지, 인간답게 살고 싶은 우리 모두의 연대를 소망하며 전한다.

  대법원앞 24시간 1인시위 중인 이인근 지회장 [출처: 콜트콜텍기타노동자공동행동]

콜텍 대전공장은 박영호가 ‘꿈의 공장’이라고 불렀다고 알려져 있다. 일할 때의 경험은 어떠했는가.

98년 8월부터 일했다. 처음에 들어갔을 때는 300명에서 350명 정도 있었는데 외환위기 오고 그때 번 돈으로 중국에 공장을 지었다. 물량이 옮겨가면서 자연감소하고 강제사직하고 해서 십 년간 인원이 많이 줄었다. 정리해고하던 시점에는 사무직까지 다 해서 총인원이 97명이었다.

처음에는 덕영악기라고, 원래 있던 공장을 인수합병해서 쓰다가 외환위기 왔을 때 번 돈으로 부지를 사서 2000년엔가 공장을 새로 지었다. 기타 만드는 일이 매일 뻬빠질하고 하니까 나무 먼지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나는 포장반에서 일했으니까 공정 제일 마지막이고 현장하고 좀 떨어져 있어서 괜찮았는데 연마반이나 사상반, 기계반 이런 데는 완전 먼지 구덩이다. 그런데도 전에 일할 때는 원래 있던 창문을 다 막아놨었고 새로 지은 공장은 밀폐형 건물이었다.

노동조건도 안 좋은데 임금도 낮았고 남녀차별도 심했다. 임금인상이 정액제나 정률제가 아니라 개인별로 들쑥날쑥했다. 누구는 500원, 누구는 1,500원. 관리자 말 잘 들으면 많이 오르는 거고 밉게 보이면 적게 오르는 거고. 10년 근무한 여성의 임금이 갓 입사한 남성이랑 비슷하거나 더 낮을 정도였다. 최저임금에만 안 걸리게 줬다. 여성들은 임금이 1년에 두 번 올랐다. 3월에 한 번, 최저임금 결정되면 9월에 거기에 미달하니까 조금 웃돌게 또 한 번 올랐다.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성추행도 빈번했다. 궁뎅이 만지는데 반항하면 조금 오르는 거고 그냥 아무렇지 않게 있으면 많이 오르는 거고. 그런 식으로 현장을 관리했다.

노동조합이 만들어진 후 회사의 반응과 현장상황은 어떠했는가.

2006년 4월 3일에 노동조합 설립신고를 하고 4월 4일에 조합원들하고 식당에서 설립보고대회하고 가입신청서 받고 그러면서 현장에서는 주임까지 다 해서 67명이 가입을 했다. 처음에는 분위기도 좋았고 노조가 생긴 걸 다들 좋아했다. 회사에 교섭요청하고 공장장이 사장 위임장 받아 나와서 교섭을 했는데 그냥 다 OK였다. 그랬다가 본사에서 개입하면서 이미 합의됐던 사항들이 모두 무효가 되고 본사가 노무사 고용해서 다시 교섭했다. 그때 교섭하면서 콜트악기 수준에서 단체협약 마무리하고 임금인상도 9%였나 그렇게 했다.

교섭하면서 제일 중요했던 게 남녀임금차별 문제였다. 그걸 합의하면서 6개월 안에 노사공동직무위원회를 구성해서, 2007년부터 단계적으로 차이를 줄여나가기로 별도합의를 했었다. 그런데 전혀 이행이 안 되면서 노사간에 약간의 충돌이 있었다. 우리는 고품질운동하면서 물량 떨어뜨리는 태업을 좀 많이 하고, 회사는 폐업하겠다고 조합원들한테 위협을 했다. 단체협약을 유리하게 끌고 가려는 방편이었던 거다.

2007년 4월, 돌연 폐업을 공지했다. 사전에 감지되는 부분이 있었는가.

설마 진짜로 폐업할 거라고 생각을 안 했다. 할 수가 없는 게, 예전부터 했던 소리가 중국공장에서 반제품을 최대한 많이 가져와서 한국에서 조립해서 메이드인코리아로 팔아먹어야 해외랑 국내공장이 둘 다 사는 길이라는 거였다. 그런데 공장 문을 닫는다는 건 장사 안 한다는 거나 매한가지인 거고, 공장을 신축한지도 얼마 안 됐고.

4월 9일에 출근을 하니까 사람들 몇 명 있고 자바라 닫혀 있고 옆에 공고문 하나가 붙어 있었다. 4월 9일부터 7월 9일까지 3개월간 폐업을 위한 휴업을 하고, 7월 10일부터 폐업을 한다, 불법행위를 저지르는 노조나 사람은 민형사상 책임을 묻는다, 희망퇴직하는 사람에 한해서는 단협에 있는 퇴직위로금을 지급하고 그렇지 않으면 퇴직위로금도 안 주고 휴업수당도 못 받게 한다, 뭐 그런 내용이 쓰여있었다. 황당했다.

그건 뭐랄까. 박영호가 욱하는 마음에 저지른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연말에 남녀임금차별 문제로 싸움이 있었고, 2007년 초에 고품질운동하면서 납기가 안 맞춰지고. 박영호가 독일 뮤직메쎄에서 바이어들한테 한 소리 듣고 이러면서 그냥 확 내지른 게 아닌가 싶다. 그게 아니라면 그렇게 불시에 할 이유가 없다. 그동안 노조를 상대 안 해 왔던 사람도 아니고, 단체협약에 휴‧폐업 관한 규정이 있는데. 진심으로 국내공장 폐업을 할 계획이고 의사가 있었다면 노조랑 협의하고 절차를 밟았을 건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욱해서 아랫사람들한테 문 닫으라고 하니까 주말에 사무실에서 중요한 것들 빼고 문 닫은 게 아닌가 싶다.

폐업 이후 투쟁이 8년째로 접어들었다. 콜트‧콜텍이 공동으로 투쟁하기 이전에는 어떻게 투쟁해왔는가.

콜텍 대전공장 정리해고 대상자는 총 67명이었고 희망퇴직 안 한 사람이 44명이었다. 폐업 이후부터 공장 안에 천막 치고 함께 거점 농성을 시작했다. 회사는 그냥 공장 문만 걸어 잠그고 교섭하자고 해도 교섭할 이유 없다고 버티다가 노동부에서 하라고 하니까 5월 19일부턴가 교섭이 시작됐다. 교섭이라봐야 한국에서 이제 기타 안 만든다는 얘기밖에 없었다. 콜트도 그때 투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보 교환도 하고 공동으로 집회도 하고, 본사 1인 시위 같은 경우 우리가 매번 올라갈 수 없으니까 콜트가 월‧화‧수, 우리가 목‧금 이런 식으로 진행했다.

회사는 별 반응 없이 공장에서 내쫓으려고만 했다. 건물 명도소송 내고 집달관들 오고, 근데 우리는 노조사무실이 그 안에 있으니까 노조사무실 사용하는 거라고 하면서 버티고. 결국, 건물 명도하라는 판결이 나와서, 집달관들 온다고 하면 지역 동지들 끌어모으고 주유소 가서 휘발유 사다 놓고 문 앞에다가 나무파레트 잔뜩 쌓아놓고 그러면서 싸웠다.

공장 거점농성을 하면서 2008년 10월에 고공농성을 했다. 교섭을 이끌어내려는 것도 있었지만, 조합원들이 다들 힘들어하고 하니까 내부 결속을 높이기 위한 목적도 컸다. 아무래도 대전보다는 서울이 낫고, 단사 투쟁으로 당시 정국을 뚫기 어렵겠다 싶어서 투쟁사업장 동지들에게 공동투쟁을 제안했다가 하이텍하고 올라가게 됐다. 한 달 동안 있었는데 무한정 거기 있을 수는 없고, 교섭을 빨리 끌어내기 위해서 단계적으로 수위를 높이느라 11일차부터 20일 동안은 단식했다. 원래는 고공단식농성하면서 본사점거투쟁까지 들어가서 교섭 테이블이 만들어지면 그때 내려올 계획이었는데, 잘 안 돼서 성과 없이 내려왔다. 얼마 후에 본사점거농성도 했는데 금방 진압됐다.

  2009년 3월, 첫번째 해외원정투쟁, 독일 프랑크푸르트 [출처: 콜트콜텍기타노동자공동행동]

국제적인 악기박람회가 열릴 때 해외 원정투쟁도 여러 차례 다녀왔다.

독일의 뮤직메쎄랑 미국의 애너하임 더 남쇼, 일본의 요코하마 국제악기박람회 등에 여섯 차례 갔다 왔고, 나는 독일이랑 미국에 갔었다. 미국 원정투쟁에서는 콜텍의 가장 큰 주거래처이고 전기기타로 유명한 펜더사의 홍보이사랑 법률이사 등을 만나서 우리가 남쇼에 온 목적, 선전물에 펜더를 넣은 이유, 펜더에 요구하는 사항 등을 전했다. 악질적인 기업한테 오더를 주는 것은 그런 나쁜 짓에 동조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앞으로 오더를 주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거였고, 펜더에서는 자체적으로 조사해서 밝혀지면 별도의 조처를 하겠다고 했었다. 1년쯤 후에 조사 결과를 보내온 게 한국 법원의 판단에 따르겠다는 거였다. 아주 정치적인 거다. 우리가 영어도 그렇고 여건이 안 되고 소통하려면 미국 노조를 거쳐야 하다 보니까, 조사 결과에 대해서 반박이나 대응을 제대로 못 하고 흐지부지 넘기고 말았다.

원정투쟁을 가면 어쨌든 이슈가 됐다. 유명 뮤지션들이 투쟁을 지지하면서 뉴스가 되기도 하고, 바이어들도 작년에 봤는데 올해 또 보네? 아직도 안 끝났나? 이런 반응들을 보였다. 제일 처음 독일 뮤직메쎄에 갔었는데, 다음에 미국 원정투쟁 갔을 때 거기서 봤던 바이어가 우리가 온 걸 보고 저 사람들 독일에서도 봤다, 그 이듬해에 갔을 때에는 작년에도 봤는데 또 왔네, 그렇게 관심들을 보였다. 한 해 동안 잊혀졌던 투쟁을 다시 상기하는 효과가 있었고, 미국이랑 일본에는 국제네트워크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마지막 원정투쟁은 2011년 1월 미국이었는데, 당시에 우리가 못 가니까 여력이 되시는 분이 남쇼 행사장에서 1인 시위라도 해줬으면 좋겠다고 제안을 했더니, 그쪽에서 그래도 당사자들이 와서 하는 게 제일 효과적일 것 같다고 여비를 모금해주셔서 다녀올 수 있었다. 아무래도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이후에는 다시 가지 못했다.

해고자 수도 많고 투쟁도 길게 이어지고 있는데, 생계와 투쟁기금 등은 어떻게 해결하는가.

처음에 정리해고되고 6개월은 실업급여 받고, 끝나고 금속노조에서 1년 동안 생계비 지원해주고, 그거 끝나고는 대전 지역에서 산들바람이라고 고추장 사업하는 사회적 기업을 하나 만들어서 콜텍 조합원들 고용하는 형식으로 지원을 해줬다. 그러면서 2년 반, 3년은 그냥저냥 그렇게 큰돈은 아니지만 한 90만원씩 받을 수 있었다. 일할 때 워낙 저임금이었던 게 도움이 되는 측면도 있었다. 투쟁 3년 정도 지나면서부터는 조합원들이 생계투쟁 나가고, 생계 안 나가는 조합원들 3명은 대전 거점에 또 우리는 콜트공장으로 옮겨서 싸우면서 재정사업도 진행하고 했다. 잘 안 되기는 하지만 산들바람 사업도 지속해서 하고 있다.

문화예술인들의 활발한 연대 못지않게, 노동자들이 직접 밴드활동과 연극공연 등에 나서며 투쟁하고 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가.

우리가 투쟁한 기간으로 치면 오래됐지만 사실상 별로 알려지지는 않았었다. 아주 활동성 있게 투쟁을 해온 것도 아니고, 인원이 좀 될 때도 주구장창 본사만 쫓아다녔다. 연대라고 해봐야 금속노조 집회 잡히면 가고, 개별적으로 단사 연대는 별로 많이 안 다녔다. 투쟁도 처음 해보는 거고, 연대에 대한 부분을 조합원들이 크게 인식을 못했다. 그냥 우리는 회사가 콜텍이니까 그놈들한테만 하면 된다, 이런 인식들이 초창기에는 있었던 거다. 그러다보니까 투쟁도 별로 안 알려졌고 와중에 조합원들은 생계 때문에 계속 떨어져 나가고 그러면서 자꾸 밑으로 깔리고.

그러던 중에 ‘꿈의 공장’ 시사회 때 킹스턴 루디스카 매니저가 농담 삼아 한 마디 툭 던진 걸 다시 한 번 생각해 본 거다. 그때가 투쟁 5년 정도 시점이었는데, “형님들 5년 동안 뭐했냐. 투쟁 시작하면서 악기라도 좀 하나씩 배워서 음악하면서 선전하고 그러면 훨씬 더 재미있고 홍보하는 것도 수월했을 텐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그것도 또 그렇더라. 그냥 집회한다고 팔뚝질하면서 선전물 돌리는 것보다, 어차피 기타 만들던 노동자들이고 기타 못 친다는 건 다 알고 있으니까, 내가 만든 것을 내가 갖고 놀면서 투쟁에 대한 홍보에 좀 활용을 해보자. 그래서 콜밴을 만들게 된 거다. 그러면서 연습하고 공연 다니고 하다 보니까, 조금씩 공연의 맛을 알게 된 거다.

그렇게 하다가 우연히 진동젤리팀 중 한 명이 문화제에 공연하러 왔다가 연극 이야기를 하길래, 어차피 이쪽으로 진로를 잡은 건데 한 번 해보자고 해서 하게 됐다. 우리 상황을 알리는 일이니까 그냥 마다치 않고 흔쾌히 수락했다가, 연습하면서 불화가 막 생긴다. 밴드하면서도 그렇고 많이 싸웠다. 한다, 안 한다 하면서. 투쟁이 아니었다면, 아직도 기타치고 이런 건 생각도 안 했을 거다. 투쟁이니까, 물론 노래하고 기타치고 하는 게 좋을 때도 있지만, 그냥 즐기려고 하는 게 아니라 일이다. 노래든 연주든 연극이든, 당연히 전부 투쟁의 일환인 거다.

  진동젤리팀과 함께한 연극 '구일만햄릿’

노조 결성 1년 만에 시작된 투쟁이 8년째 접어들었다. 포기하지 않고 싸움을 이어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이 투쟁이 언젠가는 한 번 부딪쳐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을 한다. 박영호라는 사람은 노조를 엄청나게 혐오하기 때문에, 어차피 노조가 있으면 반드시 한 번쯤은 거쳐야 할 문제였다. 그것을 단지 좀 일찍 경험했을 뿐이다. 어떻게 보면 박영호가 좀 더 일찍 선택한 것일 수도 있다. 노조 만들어진지 얼마 안 됐을 때니까 깨기 쉬울 거라고 생각한 게 아닐까 싶다. 물론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고 힘들다. 근데 우리도 우리지만 박영호도 피차 매일반일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싸움이라고 생각하는 건 콜트‧콜텍 정리해고가 이제까지 이루어진 정리해고랑 비교해볼 때 새로운 형태라는 거다. 기존에는 공장이 돌아가면서 거기에서 일부를 정리해고하는 식이었는데, 콜트‧콜텍은 그런 틀을 완전히 깬 거다. 생산기지를 해외로 완전히 옮겨놓고 공장 문을 걸어 잠그고 폐업을 해서 모든 노동자를 일시에 정리해고했다. 그러면서 노조를 무력화시키려는 의도가 깔린 거다. 이런 것들이 이대로, 법원에서 정당한 정리해고라고 판결한다면 앞으로 중소기업을 위주로 해서 더욱 많이 확산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문제로서도 중요하지만, 전체 노동자들에게도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지난해부터 콜트기타 불매운동에 주력하고 있다. 목표하는 투쟁의 승리, 마무리의 내용은 어떤 것인가.

사실 공장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면서 불매를 한다는 건 이율배반적일 수 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불매는 피해서 투쟁계획을 잡고 싸워왔다. 그러다가 2012년 초에 콜트악기에 대해서 정리해고가 부당하다는 판결이 난 후에 재해고하는 걸 보면서, 이건 더 이상 볼 게 없을 것 같다는 판단하에 불매를 시작하게 된 거다. 하지만 투쟁의 목표는 공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공장을 정상화하고 해고자들은 현장으로 가는 것, 이게 최선의 목표다. 만약에 이게 안 된다면, 박영호로 하여금 한국땅에서는 기타를 못 만들게 하는 것이 두 번째 목표다.

정리해고에 대한 대법원의 선고를 앞두고 있다. 이후의 투쟁에 대한 구상은 어떠한가.

조합원 대부분이 대법원 판결만 바라보고 형국이기 때문에 만약에 패소하게 되면 많은 조합원이 투쟁을 접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재정비가 필요하고, 정비가 되면 사회적 투쟁으로 전환해서 지난번 조계사에서 열린 ‘마음의 소리’에서 제안했던 사회적 협의체 구성 문제 그리고 계속 투쟁해나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기 위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구상을 먼저 비중 있게 진행하고. 지금까지 해왔던 투쟁을 계속 이어가는 수밖에 없다.

물론 쉽지 않겠지만, 끝까지 투쟁하고 싶다. 그 시점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내 힘이 닿는 데까지는 하고 싶다. 이대로 포기하고 물러난다면, 박영호는 다시 공장을 돌려서 그동안 봤던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서 더욱 집요하게 착취를 할 거다. 그래서 끝까지 투쟁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투쟁하고 싶다.

  2012년 8월 인천 콜트공장 무대에 선 콜트콜텍노동자밴드 [출처: 콜트콜텍기타노동자공동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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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진행하고 이틀 후, 대법원은 콜텍 노동자들의 상고를 기각하며 자본의 손을 들어줬다. 힘겹게 이어온 8년의 싸움, 법정에서는 패배했다. 수년간 엇갈리는 판결 속에 박영호의 대응은 한결같았다. 불리한 판결에는 이행의 근거를 없애면서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궁지로 몰고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데에만 골몰해왔다. 누구보다 그를 잘 아는 노동자들은 그래서 더욱 투쟁을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한다.

노동자들이 지쳐 나가떨어지기만을 기다리며 공장을 없애고 상표권을 갱신한 자본의 탐욕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포기할 수 없고, 돌아간 현장에서 만들어낼 기타는 이전과 다른 것이어야 하기에 포기하지 않는다. 차별과 착취 속에 일해야 했지만, 자신이 만든 기타를 자랑스러워했던 노동자들은, 이제 삶이 되어버린 투쟁을 통해 노동이 자랑스러운 공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싸운다.

모든 장기투쟁사업장이 그렇듯 막막함과 외로움 역시 적지 않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확산하는 연대의 힘으로 투쟁의 시간을 탄탄하고 풍성하게 채워나갈 것이다. 사라진 공장에서, 거리에서, 홍대 클럽에서, 어느 집회 현장에서 콜트‧콜텍 노동자들과 만났던 무수한 마음들이 이 싸움을 함께 지켜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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