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맨’에서 투쟁을 통해 ‘노동자’로 거듭나다

[오늘, 우리의 투쟁] 한솔로지스틱스 부당해고자 정택교의 싸움

[편집자주] 너무 많은 노동자들이 너무 오래 싸우고 있다. 갈수록 장기투쟁사업장이 많아지고 벅찬 승리의 소식을 들은 기억은 오래다. 이심전심 통하는 마음으로 연대의 기운을 나누며 힘을 내지만, 지난한 싸움은 주체의 몫으로만 남아 외롭게 이어진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다독이고 새롭게 결의하며 오늘도 내일도 싸우지만, 때로는 잊혀지고 때로는 외면받는 노동자들의 이야기.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가 <오늘, 우리의 투쟁>을 통해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함께 싸워 함께 승리하는 날까지, 인간답게 살고 싶은 우리 모두의 연대를 소망하며 전한다.

참 좋은 시절, 최우수제안자로 승승장구하던 ‘삼성맨’

1986년, 삼성그룹의 모태인 삼성물산에 입사하며 사회에 첫 발을 내딛은 한 청년이 있었다.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했고, 민주화투쟁과 노동자대투쟁으로 세상이 들썩이던 시절이었다. ‘평생직장’에 대한 믿음으로 삼성물산 패션부문에 입사해 물류 관리 업무를 담당하며 정택교 씨는 열심히 일했다. 그의 사무실은 당시 구로공단이었던 지금의 금천구 가산동에 위치해있었다. 무노조 경영의 원칙이 확고하던 삼성은, 주변의 작업장에서 ‘데모’를 하면 예방 차원에서 직원들의 처우를 개선해주고 임금을 대폭 인상시켰다.

정택교 씨는 일하는 만큼의 대가가 돌아온다고 믿었고 그런 회사에 청춘을 걸고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주로는 사무실에서 배송관리 업무를 했지만 때로 현장 업무까지 하면서 자신과 일터의 미래를 위해 골몰했다. 그렇게 일하며 인사고과에서는 늘 A등급을 받았고, 1993년에는 현장 작업의 능률을 높이는 박스 테잎 커터기를 직접 개발해 제안하면서 삼성그룹 전체를 아우르는 최우수제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각종 경제지에도 이름을 올리는 모범사원으로 내외의 인정을 받으며 일의 보람을 느끼는 날들이었다.

  993년 수상한 삼성물산 및 삼성그룹 최우수제안상 [출처: 정택교]

외환위기 이후 삼성그룹은 구조조정을 통해 삼성물산 패션부문을 제일모직으로 넘겼다. 삼성물산의 물류사업부 역시 제일모직으로 넘어갔다. 당시 정택교 씨는 이전에 일하던 사무실에서 변함없이 이전에 하던 일을 계속했지만, 제일모직은 이때부터 이미 노동자들을 불법파견하고 있었다.

제일모직은 퇴직한 직원을 통해 불법파견회사인 (주)우양지엘에스와 (주)다류를 설립했고, 이들 회사는 제일모직의 각 물류센터 등에 노동자를 파견해 출하업무를 맡기고 있었다. 이들에 대한 일반적인 업무지시와 감사 및 징계까지 직접 해왔다는 것이 2005년 밝혀졌고, 노동부로부터 불법파견 판정을 받았다. 불법파견에 대한 시정 대신 제일모직이 선택한 것은 2005년 2월, 위의 두 회사를 폐업하고 한솔CSN과의 도급 계약 체결을 강행하는 것이었다.

일감 몰아주기와 구조조정, 그러나 변치 않은 믿음

2005년 초 제일모직은 물류부문 전체를 한솔CSN(현 한솔로지스틱스, 2014년 5월 사명 변경)으로 외주화한다고 발표했다. 한솔CSN은 한솔그룹의 계열사로 1994년에 설립된 물류 전문 기업이다. 한솔그룹은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의 장녀인 이인희가 1965년 설립한 (주)새한제지공업을 시작으로, 1991년 삼성그룹에서 독립해 한솔홈데코·한솔케미칼·한솔CSN 등 제지·화학·생명공학·물류 부문으로 사업을 확장해 온 삼성의 방계회사다. 삼성그룹과 마찬가지로 무노조 경영 원칙을 고수하는 제일모직과 한솔은, 형식적인 입찰을 통해 물류부문을 외주화하며 구조조정과 일감 몰아주기를 동시에 처리한다. 이는 또한 그동안 저질러온 불법파견의 소지를 없애는 방편이기도 했다.

당시 제일모직 물류사업 부문에는 약 300명의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었다. 한솔CSN으로의 물류부문 외주화가 결정되자, 이들에게는 희망퇴직과 외주업체로의 전적이라는 두 가지의 선택지만이 주어졌다. 고용을 보장하겠다는 구두 약속이 있었을 뿐, 노동자들이 요구하는 문서 확약은 없었다. 고용불안을 우려한 약 80여 명의 노동자들이 저항을 시작했다.

정택교 씨는 한솔CSN으로의 전적을 선택했다. 그가 별다른 갈등 없이 전적을 선택한 배경에는 이십 년 가까이 인생을 바쳐온 회사에 대한 신뢰가 자리 잡고 있었다. 외주화를 강행하며 사측은 정택교 씨에게 먼저 ‘러브콜’을 보냈고, 그를 포함해 30명 정도가 일차로 한솔CSN으로 넘어왔다. 사무실 관리직 중에서 바로 전적에 응한 사람은 정택교 씨가 유일했다. 당시 배송차량 관리를 맡고 있었던 그의 전적은, 그가 관리하고 있었던 차량의 업체와 기사들까지 포함하는 것이었다. 이는 한솔CSN이 새로 시작하는 의류 물류사업의 초기 기반을 안정적으로 닦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기도 했다.

당시 투쟁하던 동료들은 중요업무를 담당하는 베테랑 직원이었던 정택교 씨가 싸움에 함께하기를 바랐다. 외주화 강행으로 뒤숭숭한 분위기에서 차량 기사들과 업체들은 정택교 씨의 선택을 따르겠다는 입장이었고, 그가 투쟁에 결합한다면 싸움의 전세 자체가 바뀔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충성을 바쳐온 회사의 방침을 따르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고, 열심히 일하면 그만큼의 대가와 인정이 돌아온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한 부서에서 오랫동안 함께 일했던 동료들의 저항을 외면하는 것이 미안했고 원망을 듣는 것이 괴롭기는 했다. 고생하는 동료들에게 미안해 남몰래 투쟁기금을 찔러주기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외주화에 맞선 동료들의 투쟁은 석 달 가량 지속됐고, 사측과의 협상을 통해 30명 정도가 이차로 한솔CSN에 합류했다. 결과적으로 제일모직 패션 물류부문에서 일하던 300여 명의 노동자 중 60여 명만이 한솔CSN로 적을 옮겼고, 나머지 대다수는 희망퇴직과 자회사로 뿔뿔이 흩어졌다. 십년이 지난 지금, 그때 함께 투쟁했더라면 제일모직 물류부문이 한솔CSN으로 외주화되는 일은 없었을 거라고 정택교 씨는 말했다. 하지만 이제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해고 이후 시작한 국회의사당 앞 1인시위 [출처: 정택교]

믿었던 회사, 그러나 '공신'에서 '서자'로

정택교 씨가 과거 이십 년 가까이 일하며 쌓아올렸던 회사에 대한 믿음은 한솔CSN에서 업무를 시작하자 곧 흔들리기 시작했다. 제지물류를 주로 해왔던 한솔CSN에는 의류물류에 대한 노하우가 없었고, 제일모직에서 넘어온 60여 명의 노동자들은 처음부터 모두 의류물류 쪽으로 집중 배치됐다. 일의 내용은 이전과 달라진 게 없는 듯 했지만 중요업무에서는 제외되었고, 의류물류에 대한 노하우가 어느 정도 전수된 뒤에는 제지물류 부서로 전출되기 시작했다. 사측의 전출 명목은 순환근무를 통한 타 업종의 업무 습득이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인원감축을 위한 포석이었다.

투쟁하는 동료들에게 욕먹는 것도 감수하며 자신이 관리하던 업체와 기사들까지 100명 정도를 이끌고 한솔CSN으로 전적한 정택교 씨의 결정은, 의류물류 사업을 새로 시작하는 한솔CSN의 입장에서 ‘공신’과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한솔CSN에서 정택교 씨의 처지는, 부당 인사고과와 승진 누락 등 부당한 차별에서 예외일 수 없는 ‘제일모직 출신’의 이방인일 따름이었다. 과거 재직 시절 늘 우수고과를 받아왔고, 삼성물산 내 전무후무한 슈퍼등급의 고과까지 받았던 정택교 씨였다. 대접이나 특혜를 바라는 건 아니었지만, 이전과 다름없이 열심히 일해도 벗어날 수 없는 부당한 인사고과에 억울함이 쌓여갔다. 불과 1-2년 사이, 유리천정에 가둬진 ‘서자’가 된 느낌이었다.

한솔CSN에서는 인사고과 평가 결과 상위 30% 이내에 들어야만 승진의 기회가 주어졌고, 업무 관련 주제발표와 업무 및 부서장의 평가 등으로 구성되는 절대평가 방식의 인사고과에서 제일모직 출신들은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주제발표와 업무 고과를 잘 받아도 부서장의 의지가 없으면 승진은 그림의 떡이었다. 부서장들은 모두 한솔 출신이었고, 제일모직 출신들은 집단적 차별의 혐의를 지우기 위해 한두 명을 시범케이스로 승진시키는 식이었다. 와중에 한솔CSN 신입직원의 고속승진을 지켜보는 제일모직 출신 노동자들의 박탈감은 컸다.

하지만 사측의 차별과 탄압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의류물류 부문의 사업이 안정세에 접어들면서 사측은 제일모직 출신 전적자들을 단계적으로 퇴출하기 시작했고, 2011년 초 정택교 씨를 포함한 3인에게도 희망퇴직을 강요했다. 모두 거부하자 그해에는 그냥 넘어갔지만 2012년 초 또다시 희망퇴직을 하고 용역회사로 가라는 강요가 반복됐다. 3인 중 한 명은 5월에 희망퇴직을 하고 정택교 씨와 또 한 명이 제안을 거부하자 사측은 6월 1일자로 대기발령을 냈다.

비록 구두약속이었지만 제일모직과 한솔CSN의 고용보장 약속을 믿고 넘어온 일터였다. 갖은 차별도 모자라 마침내 나가라는 일방통보가 재차 이어졌고, 이를 거부하자 장장 7개월간의 대기발령이 지속됐다. 물류업무의 전문성으로 잔뼈가 굵은 노동자들이 하루아침에 작은 사무실에 갇혀 제 발로 나가기만을 종용하는 사측의 탄압 대상으로 전락했다. 두 사람은 왜 우리가 대기를 해야 하냐고, 일을 달라고, 7개월 간 고역을 감내하며 버텼다. 그러나 2012년 12월 31일, 종무식을 한 시간 앞두고 식사를 청한 관리자는 두 사람에게 해고통지서를 전달했다.

"사람 잘못 골랐다.”

회사의 방침에 수긍하고 충성하며 일해 왔던 정택교 씨가 부당해고를 당한 뒤 투쟁하면서 곱씹는 말이다. 그리고 이는 1년 반이 넘도록 지친 기색도 없이 투쟁을 이어가는 정택교 씨를 보며 한솔로지스틱스와 제일모직 관계자들이 속으로 삼키고 있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2012년 마지막 날,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해고통지서를 받아든 정택교 씨의 분함과 억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부당한 해고는 자신의 일과 삶을 일체화했던 이십여 년의 세월을 모조리 부정하는 것이었고, 알량한 돈 몇 푼과 맞바꿀 수 없는 불명예였다. 함께 해고를 당한 동료는 얼마 후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희망퇴직을 해버렸지만, 그럴수록 혼자서라도 싸워야겠다는 마음이 강해졌다. 격한 분노는 전의로 이어졌고, 더 이상 이런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결심과 함께 행동으로 이어졌다. 노무사를 수소문해 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하고 한솔CSN 본사와 물류센터, 국회 등지에서 일인시위를 시작했다.

지방노동위원회는 구제신청을 기각했지만, 2013년 7월 16일 중앙노동위원회는 정택교 씨의 업무능력과 근무태도 등을 문제 삼은 사측의 해고사유와 절차 모두 정당성이 없다며 부당해고 판정을 내렸다. 이후 사측은 중앙노동위원장을 피고로 행정법원에 소를 제기했고, 중간에 변호사를 바꿔가며 시간끌기를 하고 있지만 오는 8월 말 4차 변론과 9월 선고를 앞두고 있다. 사건의 본질은, 인원 감축을 위해 희망퇴직을 종용하다가 안 통하니 대기발령에 이어 부당해고를 한 것이다. 때문에 당연히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대법원 판결까지 몇 년이 걸리더라도 끝까지 갈 각오가 되어 있다.

  삼성일반노조와 함께하는 규탄 집회 [출처: 철폐연대]

누군가 저지하지 않으면 안전지대는 없다

열 달 가까이 일인시위만으로 이어오던 정택교 씨의 투쟁은 올해 초부터 조금 달라졌다. 지난 1월 삼성일반노조 조합원이 되었고 이후 정리해고·비정규직·노조탄압 없는 공동투쟁단에도 함께 하면서, 투쟁을 알리고 이전에 몰랐던 투쟁에 연대하며 새로운 세계를 만나고 있다. 노동조합 경험이 전혀 없는 그에게 낯설 법도 한 투쟁이지만, 함께 싸우며 속에 쌓인 응어리들을 풀 수 있어 재미있고 잇속 계산 없이 함께 하는 모습에서 받는 감명이 적지 않다고 한다.

물론 첫 번째 동력은 자신의 억울함이었지만 제2, 제3의 정택교가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나설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혼자서라도 싸워야겠다고 생각해 나선 거리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많은 이들이 싸우고 있었다. 혼자서 뭘 얼마나 할 수 있을까도 싶지만, 그가 싸움을 시작하자 한솔CSN에서는 제일모직 출신 전적자들에 대한 퇴출 시도를 중단했다. 사측의 눈치를 보느라 선뜻 나서서 응원하지는 못하지만, 옛 동료들 역시 정택교 씨의 투쟁에 관심하며 지지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회사와 일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성실하기만 한 노동자로 살아왔던 정택교 씨의 마음 한 구석에는 여전히 “왜 나를?” 이라는 울분과 응어리가 똬리를 틀고 있다. 하지만 누군가 저지하지 않으면 안전지대는 없다는 것을 아프게 실감했고, 미처 알지 못했던 노동자의 권리와 모두 연결되어 함께 살아가는 삶을 기꺼이 살아가고 있다. 투쟁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며 더욱 단단한 노동자로 거듭나고 있는 정택교 씨의 싸움이 승리하는 날까지, 더 많은 동지들이 연대로 함께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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