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의 눈빛에서 참사의 아픔을 읽다

[희망릴레이](1) 대구 지하철 해고 노동자들

화분처럼 산으로 동그랗게 둘러싸인 땅이라고 해서 분지라고 불리는 땅 대구. 대구의 여름은 덮습니다. 가끔 스스로 뿜어낸 열을 식히려 소나기가 내리는 것이 한 여름을 견디는 방법일 뿐, 사방이 산으로 꽉 막힌 도시의 여름은 바람 한 점 흘러들지 않습니다.

오후 두시, 밀양을 거쳐 대구로 흘러온 사람들이 북구 상인동의 푸른 천막 옆으로 모이고 있습니다. 천막보다 더 짙푸른 색깔의 작업복을 입은 그들은, 꼭 그들이 입은 작업복의 색깔만큼 짙고 푸른 나이를 가진 청춘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서울과 경기도를 거쳐 전라도와 경상도를 지나 대구로 흘러 들어온 그들은 꼭 강물 같습니다. 강은 산을 넘지 못한다는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산과 산 사이에는 수많은 동굴과 지하로 흘러들며 강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강물은 거대한 산 사이를 스며들듯 흘러들어 산천을 적시며 흘러갑니다. 이 사람들도 강물처럼 흘러서 대구에 왔습니다. 원하지는 않았지만,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해고자라는 이름으로, 대부분의 청춘을 길 위에서 보낸 사람들. 멍든 자국처럼 시퍼런 작업복을 입은 노동자들이 모여든 여름 오후입니다.


이곳은 대구 지하철 해고자들이 머물고 있는 천막 농성장입니다. 대구에는 열세명의 지하철 해고 노동자가 있습니다. 아, 아니, 세월이 독이 되었던 탓인지, 지난해에는 한 사람의 해고 노동자가 먼저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금은 열두명으로 줄어든 해고 노동자들이 머물고 있는 짙푸른 섬. 이 천막으로 오기 위해 나는 동대구역에서 지하철을 탔습니다.

대구에서 지하철을 타본 일이 있으신가요. 둥근 타원형의 땅모양을 가진 대구는 지하철 구간 간의 길이가 그리 멀진 않습니다. 노선도 단순해서 1, 2호선뿐입니다. 지금 3호선 공사가 진행중인데 무인 운전 열차에다가 역무원을 배치하지 않고, 운행 구간 중 안전성이 확보되지 않은 곳이 많은 노선이라 지하철 노동조합에서는 아예 '3호선은 없다'고 합니다. 3호선 개통을 막는 것이 지금 대구 시민들과 지하철 노동조합의 중요한 과제입니다.


다시 지하철 1호선 이야기입니다. 아마 이 노선이 대구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구간일 것입니다. 동대구역에서 이곳 지하철 천막 농성장이 있는 상인역으로 오기 위해서는 대구 중앙역을 지나야 됩니다. 대구 중앙역. 이곳을 지날 때면 나는 아직도 식은 땀이 납니다. 이곳은 대구의 아픔입니다. 10년 전의 지하철 화재 참사가 아직은 어느 누구에게도 낯선 사고가 아닙니다. 역무원을 포함해 대구 시민 이백여 명의 목숨을 삼킨 화마가 아직도 이 역에서는 여전히 살아 있는 것 같습니다. 이백여명의 목숨을 삼킨 화마는 방화만이 원인이 아닙니다. 시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지 않은 정부의 정책이 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이란 걸 굳이 더 이야기해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깜깜한 터널같은 대피로에 갇혀서 더 많은 목숨을 잃었다는 아픈 사실을 사람들은 기억할 겁니다.

그러나 지하철 화재 참사의 주된 책임은 기관사들에게로 돌려졌습니다. 자신이 몰던 열차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것도 모자라 그 죽음의 원인을 자신에게로 돌려 죄값을 치르라는 최후 통고를 들은, 그 기관사들은 지금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견디고 있을까요. 나는 지하철 해고 노동자들의 눈빛에서 그날, 그 현장의 지하철 기관사들의 눈빛을 봅니다. 이 노동자들이 해고를 무릅쓰고, 심지어 함께 해고된 동료의 죽음을 안고도 이 천막을 지키는 의지 속에는 십년 전 그날의 아픔이 고스란히 상처로 남아있습니다. 시민의 안전을 지킨다는 근원적인 사명감을 절대로 놓지 않은 것이 지하철 노동자들의 해고 사유입니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지하철 해고자가 아직도 그대로 길 위에서 싸우는 도시, 이 곳은 대구입니다.

다시 십팔 년을 더 거슬러 갑니다. 1995년에 대구 지하철 공사가 한창일 때, 지금 지하철 천막 농성장이 있는 상인역 부근에서 폭발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길 가던 사람이 붕 날아 오르더니 순식간에 파편처럼 찢겨 버리더라던 목격자들의 증언이 아직도 생생히 귀에 박혀 있습니다. 공사장 위를 지나가던 자동차가 장난감처럼 구겨져 널부러져 있던 현장 사진은 아직도 대구 지하철을 떠올리면 여전히 우리 기억의 표면에 떠도는 모습들입니다. 때마침 등교 시간이라 인근 학교로 향하던 아이들의 발걸음을 영원히 묶어버린 그 사건의 원인도 부실 공사 때문이었습니다. 가스배관을 땅속 깊이 묻지 않고 지표에 가까이 묻었던 것이 사고의 주된 원인입니다.

대구 시민들은 지하철을 타다가 약간의 이상만 느껴져도 치명적인 불안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시민들이 이용하는 바로 그 철로에서 두 번의 대형 사고로 수많은 목숨이 희생된 상처는 당사자와 가족의 몫만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대구 시민들의 몫, 그리고 누구보다 시민들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고 있는 지하철 노동자들의 몫이었습니다. 대구 지하철 노동자들의 싸움이 이토록 절박하고 지난한 이유의 이면에는 대구 지하철 대형 참사가 아직 끝나지 않은 참사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대구 지하철 노동자들의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 희망릴레이는 평택과 울산 등, 여러 지역의 노동자들이 모여서 걷는 길 위에서 이어집니다. 노동자들의 고통은 그 시대의 가장 보편적인 문제점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대구 지하철 참사가 지하철 노동자들의 투쟁을 불러온 것처럼, 이 길 위에서 만난 노동자들의 고통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보편적인 아픔입니다. 쌍용 자동차에서 해고된 노동자들, 울산 현대 자동차 비정구직 노동자들이 일터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자신의 일터에도 편하게 일할 수 없는 날이 오고야 말 것입니다.

길위의 노동자들은 걸어 걸어 이 길을 이어 갑니다. 이 길 위에서 우리들 모두의 평범한 희망이 다져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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