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성 복원을 향한 행진, 6월 10일 모이자

[기고] 죽음의 체제에 저항하는 청소년이

‘가만히 있으라’ 침묵행진은 한 대학생이 청와대 게시판에 쓴 한 편의 글에서 시작되었다. “정말 우리는 ‘가만히 있어도’ 되는 걸까요?” 라는 물음으로 시작한 글은, 세월호 사건에서 승객들을 죽게 한 ‘가만히 있으라’는 목소리가 이 사회에서 진행되어온 참사의 주범이라고 주장했다. 우리가 이번에도 가만히 있다면, 이 사회를 지켜온 참사의 전통은 끝나지 않을 것이라며 용혜인 씨는 4월 30일 ‘가만히 있으라’ 추모 행진을 제안했다.

확실히 ‘가만히 있기’에는 꺼림칙했다. 세월호를 기억하고, 가만히 있기엔 꺼림칙한 사람들이 모였다. 행진은 참여자들의 자유발언을 듣고 거리를 걷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5월 3일, 두 번째 침묵행진이 열렸고, ‘가만히 있으라’는 슬로건을 건 침묵행진은 전국 각지로 퍼져나갔다. 부산에서도, 제주에서도, 청주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자원봉사자들도, 음악가들도 ‘가만히 있으라’를 들었다. 나도 청소년으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어, ‘가만히 있으라’ 청소년 침묵 행진을 제안하였다.

‘가만히 있으라’ 침묵행진이 시작한지도 어느덧 한 달이 넘어간다. 세월호를 잊지 않기 위해, 이 나라의 참사의 전통을 끊기 위해, 이윤보다 생명이 더 중요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죽은 자들에게 더 이상 미안해하지 않기 위해, 산 자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우리는 걸어왔다.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나에게 ‘가만히 있으라’ 침묵행진은

침묵행진은 주로 홍대에서 시작되었다. 오후 2시의 홍대, 복잡한 시민들 사이로 우리는 국화꽃 한 송이, 피켓 한 장을 들고 따복따복 걸었다. 국화꽃 위로 반짝이는 햇빛이 내렸다. 죽은 자들을 떠올리며 걷는 것은 내가 살아있다는 걸 자각하게 했다. 나는 여기, 이 자리에 살아있다. 여러분들을 죽게 한 ‘가만히 있으라’는 시스템 안에서. 당신들의 죽음을 무력화시키지 않기 위해, 가만히 있지 않기 위해, 이 자리에 나와 있다.

걷다보면 발소리가 들렸다. 앞 사람, 옆 사람, 뒤에 있는 사람들의 발소리... 발소리는 귓가에 차곡차곡 쌓였다. 홍대에서 시청까지, 침묵행진을 계속하다보면 나도 모르는 새 사람들이 불어나 있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뭉쳐 외치고 있었다. 가만히 있지 말자. 죽음을 잊지 말자. 사람을 죽이는 이 체제 속에서 죽은 채 살지 말자. 더 이상 죽지 말자. 죽음을 멈춰라! 많은 사람들의 발언을 들었다. 나는 ‘가만히 있으라’ 행진이 서로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좋았다. 서로의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이유를 들으며, 서로의 생각은 더욱 풍부해지고 견고해졌다.

하지만 불편한 지점들도 존재했다. 침묵행진 초반에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미안하다’였다. 어떤 어른들은 교복을 입고 행진에 참여한 나를 보며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우리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고, 심지어는 한번만 더 어른들을 믿어달라고 했다. 미안하다는 말만큼 기특하다는 말도 많이 들었다. 나는 이 행진 속에서, 이 사회 속에서 미안하고 기특한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다. 지킴 받아야 하고 어른들만 믿고 따라가야 하는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세월호 희생자들에 대한, 나에 대한, 모든 청소년들에 대한 또 다른 ‘가만히 있으라’는 말에 불과했다. 청소년 침묵행진을 제안했던 것은 그래서였다.

이 나라의 청소년들은 학생다움을 강요당한다. 지금은 가만히 공부나 하고, 어른이 돼서나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된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하다. 가만히 공부나 하지 않으면, 모난 돌이 되면 정을 맞고 마는 것이 우리 사회이며, 일류 대학의 좋은 상품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이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비단 세월호만의 일이 아니다. 세월호 바깥의 청소년들도 이미 주체성을 말살당하며 죽어가고 있다. 또한 죽음은 비단 청소년들만의 일도 아닐 것이다.

침묵행진에 참여하는 것을 넘어 침묵행진을 제안하고 진행하면서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었다. 특히 5월 18일 청소년 ‘가만히 있으라’ 제안자로서 연단에 올라 발언했던 것이 가장 인상 깊다. 나는 그 연단 위에서 수많은 눈들을 보았다. 살아있고자 하는 눈들, 슬픔에 붉게 물든 눈들.

<임을 위한 행진곡>이라는 노래가 있다. 5.18 광주 항쟁을 기념하는 그 노래의 마지막 구절은 이러하다.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나는 그 날 이 노래를 들으며, 문득 우리가 이렇게 거리로 나오고 가만히 있지 않기로 결심한 것은 우리가 살아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월호 추모의 열기가 가라앉고, 이젠 일상으로 돌아오자는 얘기가 하나둘 들려왔을 즈음이라 더욱 그랬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세월호를 잊고, 이제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서, 이제 다시 이 죽음의 체제를 묵과하자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살아있고자 하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우리는 다시 인간이고자 한다. 생명보다 이윤이 더 중요한 체계 속에서 상품으로, 수단으로, 취급되었던 우리는, 다시 인간이고자 한다.

5월 3일, 경찰은 우리들의 길을 막아섰고, 5월 18일에는 100명에 가까운 시민들이 연행되었다. 이것이 가만히 있지 않으려는 시민들의 움직임에 대한 국가의 대답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또다시 ‘가만히 있으라’를 들고자 한다. 우리는 보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다울 수 없는 이 사회를 우리는 똑똑히 목도했기 때문이다.

잊지 않겠다. 세월호를 잊지 않겠다. 여기에 모인 우리들을 잊지 않겠다. 가만히 있지 않겠다. 나에게 ‘가만히 있으라’ 침묵행진은 인간성의 복원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제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시 인간이 아니기를, 상품이고 수단이기를 선택할 수는 없다. 죽음으로 흘러가는 이 사회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 6월 10일, 거리로 모여 청와대로 가자는 제안들이 나오고 있다. 정말이지, 청와대로 가지 않을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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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 침묵행진 , 가만히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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