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위 있는 매체에 품위 없는 얘기를 쓰게 돼서 유감이다. 이게 한국 정치의 현실이라 어쩔 수 없다. 국정감사는 입법부의 행정부에 대한 견제 수단이다. 그런데 올해 국정감사는 스캔들과 정쟁으로 얼룩진 형태로 전개되고 있다. 이게 어떻게 진행되느냐에 따라 이후 여의도 정치 상황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10월은 터닝포인트가 될 전망이다.
출처: AI 생성 그림
더불어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야권은 김건희 여사를 정조준해 공세를 펴고 있다. 국정감사를 시작하자마자 10개 상임위에서 김건희 여사 관련 이슈가 다뤄졌는데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사건, 공천 개입, 논문 표절, 관저 공사 관련 의혹 등등이 총망라돼 있다. 핵심 증인들이 출석을 거부하고 누구는 아예 도망을 가버린듯 하지만 권력엔 이런 상황 자체가 부담이다. ‘야당이 너무한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하는데, 도저히 그렇게 눙치고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은 아니기 때문이다.
국정감사장에서 떠들썩한 동안, 밖에서는 최근 김건희 여사의 공천개입 의혹 덕분에 갑작스레 얼굴과 이름을 알리게 된 명태균 씨가 연일 시선을 끌고 있다. 언론의 취재에 거의 응하지 않던 이전의 태도를 바꿔 적극적으로 메시지를 발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명태균 씨의 여러 메시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첫째, 명태균 씨는 보수 정치의 주요 인사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고 그 인맥으로 윤석열 대통령의 당선을 도왔으며 이후에도 대통령 부부에 여러 조언을 했다. 둘째, 김건희 여사의 공천 개입 의혹은 사실이 아니다. 셋째, 하지만 검찰이 명태균 씨를 본격 수사한다면 ‘세상이 뒤집어지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물론 명태균 씨의 주장을 모두 다 믿을 수는 없다. 그러나 최소한 ‘크로스 체크’ 되는 것들이 있다. 명태균 씨의 측근이자 김영선 전 의원의 회계책임자였던 강모 씨는 유튜브 방송에 출연해 명태균 씨가 윤석열 대통령의 사저에 출입했으며 자체 여론조사 등을 활용한 분석을 제공했고 그 대가로 김영선 전 의원 공천이 이뤄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통령실은 명태균 씨와의 관계를 이례적으로 길게 설명했는데, 명태균 씨가 사저에 방문한 일이 있고 윤석열 대통령을 만난 일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대통령실이 의혹의 직접 당사자인 대통령과 영부인의 입장을 고려한 설명을 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해보면, 명태균 씨의 주장은 아예 근거가 없는 수준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김건희 여사가 명태균 씨에게 보냈다는 메시지의 존재는 의혹을 더 짙게 만든다. 명태균 씨가 먼저 공개한 건 김건희 여사가 김영선 전 의원이 단수공천을 받는 게 좋지만 경선이 불가피하다는 취지의 주장을 하는 내용이었다. 이 메시지는 두 사람 간의 신뢰 관계를 증명하는 내용이라는 점에서, 지난 총선 당시 김건희 여사가 공천에 대해 이러한 주장을 직접적으로 할만한 위치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의구심을 키운다.
두 사람의 관계는 그럼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이준석을 여당 대표로 만드는 데 역할을 한 사람’으로 명태균 씨를 소개받고 선거 때 도움을 받은 게 아니냐는 의심을 해볼 수밖에 없다. 명태균 씨는 대통령 취임식에도 초청을 받았다. 언론은 대통령이나 영부인이 초청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명태균 씨는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정권 초 이준석 의원을 대북특사로 보내는 방안을 검토할 것을 건의한 적이 있다고 말했는데, 정권재창출을 위한 준비의 방향까지 짚어줬다는 취지다. 만약 구상대로 됐다면, 명태균 씨는 ‘두 번에 걸쳐 연속으로 대통령을 만든 사람’으로 정치판에 널리 알려지게 됐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힘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것이었을 테다. 명태균 씨 입장에선 추진해 볼만한 프로젝트였을 거라는 얘기다. 진상은 더 확인해 봐야겠지만 퍼즐이 맞는 부분은 분명히 있다.
‘2016년 정세’를 떠올리게 하는 ‘명태균 이슈’는 하루가 다르게 몸집을 키우고 있다. 이런 국면이 10월 내내 계속된 이후 11월에 김건희 특검이 다시 발의되면 어떻게 될까? 지난 번 재표결 국면에선 여당으로부터 4표의 이탈표가 있었다. 이 중 2표는 찬성표였고, 1표는 찬성을 뜻하는 ‘가’를 표기한 무효표였다. ‘매직넘버’ 8표까지는 단 4표가 남았다. 10월을 거치고 나면 이탈표의 숫자는 아무래도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의 행보에 시선이 모이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삼국지’, ‘궁중암투’를 말하며 내부 정치와 거리를 두려는 듯한 언행을 계속하던 한동훈 대표는 최근 태도가 달라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른바 ‘친한계’가 세력화되는 듯한 모습이 있어서다. 만일 이들이 조직적으로 김건희 특검에 대한 찬성으로 움직인다면?
물론, 한동훈 대표와 가까운 쪽에서 특검에 동조하는 움직임은 없다. 이들은 오히려 재의결 국면에서의 이탈표에 대해 “우리 쪽이 아니다”라고 했다. 당시 한동훈 대표는 부결을 호소했다.
그러나 최근 한동훈 대표 주변 인사들이 김건희 여사를 겨냥한 압박의 수위를 올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들은 한동안 김건희 여사의 사과를 요구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사과로 진화가 될 단계는 지났다는 주장이 공개적으로 나오고 있다. 사과와 더불어 앞으로의 활동 계획을 밝혀야 한다는 지적도 있었는데, 이는 결국 대선 때 대국민 사과 당시처럼 영부인으로서의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사과를 재차 해야 한다는 의미다.
검찰에 김건희 여사를 기소할 것을 주문하는 목소리도 있다. 검찰이 김건희 여사를 기소하면 ‘검찰 수사를 지켜보자’는 논리로 야당의 특검 공세를 방어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검찰이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사건과 관련해 김건희 여사 무혐의 처분을 검토하고 있다는 보도가 이래저래 나오는 판국에 친한계 인사가 이러한 주장을 내놓은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이들의 이러한 움직임을 촉발하는 동력은 두 가지인데, 첫 번째는 대통령의 태도다. 대통령은 전당대회 때부터 한동훈 대표가 당권을 잡는 걸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공공연히 드러내 왔다. 한동훈 대표 취임 이후엔 대표를 배제한 원내지도부와의 만찬 모임 개최 등으로 ‘고사작전’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한쪽이 강공을 펴면 다른 쪽은 뭉칠 수밖에 없는 거다. 그런데 뭉친다고 해도 연료가 무엇이 되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외부적 조건이다. 이게 두 번째 요인인데, 그것은 보수 유권자층 전반에서도 김건희 여사 문제에 대해서만은 이대로 지나가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높다는 것이다. 얼마 전 동아일보에 김건희 여사의 사과로는 부족하고 이제는 사법처리가 필요하다는 기자의 기명 칼럼이 실릴 정도였다. 애초에 한동훈 대표가 윤석열 대통령의 노골적인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대표가 될 수 있었던 것 역시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기대한 보수 유권자층의 기대를 등에 업은 덕택이었다.
한동훈 대표 입장에선 딜레마다. 김건희 여사 문제는 해결해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과의 ‘파워 게임’으로 봐도 그렇고 보수유권자층의 기대를 봐도 그렇다. 그런데 그게 ‘적을 이롭게 하는’ 결과를 낳아서는 안 된다. 보수유권자층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 보수 궤멸로 이어질 뻔했다는 ‘탄핵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유승민 전 의원이 여러 노력에도 보수 정치의 지도자 지위를 회복하지 못하고 ‘배신자’ 프레임에 여전히 갇혀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동훈 대표도 김건희 여사 문제를 해결하려다가 ‘배신자’가 되고 말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한동훈 대표는 윤석열 대통령이 그렇듯 ‘보수의 적자’도 아니다. ‘배신자’가 되는 건 순식간일 수 있다.
국민의힘과 한동훈 대표 입장에서 최악의 시나리오는 누구도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10월 이후 특검법이 등 떠밀리듯 처리되는 것이다. 그런 상황이 되면 이 난장판에 자의로든 타의로든 엮여있는 모든 이해관계자가 일반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의 행보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상상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해야 한다.
물론 거시적으로 봤을 때 혼돈은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게 무엇을 위한 것인지는 물어야 한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현대 정치의 사례는 보통 어떤 이념이나 노선의 차이를 배경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서술한, 한국 정치의 갈등과 모순의 구조적 근간을 이루고 있는 이른바 ‘윤-한 갈등’과 김건희 여사 문제는 그런 것이라기보다는 마피아들의 권력 쟁투를 다룬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느낌은, 윤석열 정권이 국정을 다루는 태도, 즉 통치에 대한 철학이라는 본질에서 연유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명태균 씨 논란이나 김대남 전 행정관 논란 같은 게 애초에 존재하는 거다.
이것을 퇴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새로운 현상이라고 해야 할까? 질문을 바꿔보자. 역사의 발전은 민주주의의 강화와 함께 이뤄져 왔고, 민주주의란 더 많은 사람들의 의사를 제도에 반영하는 것이라는 게 지금까지의 도식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저열한 통치 철학을 인준한 주체는 누구였나? 이게 본질을 외면하는 정치가 주류인 시대에 오히려 본질을 묻는 게 필요한 이유라는 게 오늘의 결론이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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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하는 정치·사회 평론가, 칼럼니스트다.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에서 일하며 한국의 진보정치가 현실적 대안으로 자리 잡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했으나 무엇이 잘못됐는지 기대만큼 잘되지 않았다. 지은 책으로는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 ⟪냉소 사회⟫,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