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나는 진보적 경제 포럼(PEF, Progressive Economy Forum)이 주최한 하루짜리 컨퍼런스에 참석했다. PEF는 영국의 좌파 경제 싱크탱크로, 과거 코빈-맥도넬(Corbyn-McDonnell) 체제 하의 영국 노동당 지도부에 조언을 제공한 바 있다. PEF의 목표는 “영국을 위한 새로운 거시경제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위해 저명한 경제학자들과 학자들로 구성된 평의회를 조직하는 것”이다. 이 평의회는 “환경 붕괴, 경제적 불안정, 사회·경제적 불평등, 기술 변화라는 현대의 과제들에 대응하는 거시경제 정책을 발전시키고, 이러한 정책이 진보적 정책 입안자들과 협력하여 실행되도록 독려하며, 대중의 경제학 이해를 향상시키는 것”을 추구한다. PEF의 사명문에서 내가 확인할 수 있었던 유일한 구체적 정책 제안은 다음과 같다. “PEF는 긴축과 현재의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및 담론에 반대하며, 긴축을 종식시키고 다시는 그것이 경제 정책의 수단으로 사용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캠페인을 벌인다.”
전직 변호사 패트릭 앨런(Patrick Allen)은 PEF의 설립자이자 의장이며 주요 자금 제공자이다. 그는 PEF의 임무를 “국내 최고의 진보적 경제학자들과 뜻을 같이하는 학자들을 진보적 정치인들과 결합시켜, 신자유주의의 실패와 긴축의 무의미함을 보여주고, 빈곤 없는 안정적이고 공정하며 녹색이고 지속 가능한 경제를 실현하기 위한 신뢰할 만한 케인스주의 영감을 받은 정책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본다.
케인스 경제학을 명시적으로 언급한 점은 PEF의 입장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것은 ‘진보적’ 경제학이지, 사회주의 경제학도, 확실히 마르크스주의 경제학도 아니다. 이것은 ‘트럼프 시대의 경제 정책‘이라는 제목으로 열린 PEF 컨퍼런스의 여러 저명한 연사들을 통해서도 분명했다. 발표자들은 모두 잘 알려진 케인스주의자 또는 포스트-케인스주의 경제학자들이었다. 마르크스주의의 기운이 조금이라도 느껴진 유일한 순간은 그리스 자택에서 사전 녹화된 영상으로 회의를 연 야니스 바루파키스(Yanis Varoufakis)의 발언이었다. 그는 2014~15년 채무 위기 동안 좌파 시리자(SYRIZA) 정부의 재무장관을 지낸 인물로, 스스로를 한때 “변덕스러운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불렀다.
그는 짧은 연설에서 자본주의의 균열은 무역과 자본 흐름의 세계적 불균형과 미국 제국주의가 패권적 지위를 유지하려는 과정에서 무너지고 있다는 자신의 잘 알려진 논지를 개괄했다. 미국은 ‘글로벌 미노타우로스(global minotaur)’—즉,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모든 것을 소비하는 존재—로서의 위상을 유지하려 했고, 이로 인해 균열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는 또 자본주의가 우리가 알고 있던 형태로서는 ‘죽었다’고 보며, 지금은 ‘테크노-봉건주의(techno-feudalism)’가 이를 대체하고 있다고 간략히 언급했다. 그에 따르면 이 테크노-봉건주의는 미국의 ‘매그니피센트 세븐(Magnificent Seven)’이라 불리는 초거대 미디어 및 기술 기업들이 자본주의의 나머지 영역으로부터 ‘클라우드 임대료’를 추출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러한 신봉건 질서에 대한 대안으로 바루파키스는 다음의 정책들을 제안했다. 첫째, 지구 온난화를 막기 위한 투자에 신용을 제공하는 ‘녹색 은행‘ 설립, 둘째, 기업 내 노동자 민주주의 확대, 셋째, 보편적 기본소득 도입. 그러나 그는 매그니피센트 세븐, 주요 글로벌 은행, 화석연료 기업들을 국유화하자는 제안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은 PEF 컨퍼런스의 주제와 정확히 들어맞았다. 컨퍼런스는 자본주의를 ‘대체’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재정립’해야 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했으며, ‘임대자본주의’는 제약을 가하고 사회보호제도는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진 발표자들은 줄줄이 등장해 ‘임대자본주의(rentier capitalism)’ 혹은 ‘추출 자본주의(extractive capitalism, 스튜어트 랜슬리)’ 또는 ‘디스토피아 자본주의(dystopian capitalism, 오즐렘 오나란)’의 실패와 불평등에 대해 논의했다. 이들은 마치 이러한 자본주의의 변종들이 1950~60년대에 존재했던 원형의 ‘생산적 자본주의(productive capitalism)’를 대체한 듯 서술했다. 당시 자본주의는 모든 사람에게 효과적으로 작동했으며, 적어도 케인스주의 거시경제 정책을 활용한 정부의 관리를 전제로 할 때 그랬다고 했다. 전후 시대의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 세계무역기구 등 브레튼우즈 체제 하에서 전 세계는 안정적으로 관리되었고, 자본주의는 순조롭게 굴러갔다. 오직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와 임대자본주의가 득세하면서부터 자본주의는 파괴적이고 더 이상 ‘진보적’이지 않게 되었고, 위기, 불평등 심화, 지구 온난화, 새로운 세계적 갈등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왜 1960년대의 이 ‘진보적 자본주의’가 지금의 신자유주의적, 추출적, 임대 자본주의로 대체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어디에도 없었다. 당시 잘 작동하고 있던 체제를 왜 자본가들과 그 정책 전략가들이 바꾸었을까? 1970년대 생산적 자본의 수익률이 전 세계적으로 하락했고, 그 결과 자본이 금융 투자와 투기로 전환되었으며, 다국적 기업들이 투자처를 글로벌 북반구에서 남반구로 이전하면서 노동력을 착취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스튜어트 랜슬리는 1980년대 이후 억만장자와 금융 자본이 부상하면서 나타난 부의 불평등에 대해 충격적인 통계를 제시했다. “전후 시대에는 금융 및 경제 엘리트들이 마지못해 평등화의 정치에 순응했고, 전쟁 이전 수준의 착취는 감소했다. 그러나 자본의 인내심이 바닥나자, 착취는 다시 시작되었다.” 착취가 재개된 이유는 수익성 부족이 아니라 인내심의 부족 때문이었다는 설명이다.
여러 발표자들은 미국 자본이 영국 경제의 상당 부분을 장악한 상황을 강조했다. 이는 앵거스 헌턴이 ‘속국 상태‘라고 표현했고, 경제학자이자 작가인 윌 허턴은 이것이 영국 산업의 기술 발전을 파괴했다고 주장했다. 유럽과 영국은 미국의 생산성 수준에 점점 더 뒤처지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미국 자본의 침투에 대한 해답은 무엇인가? 그것은 국유화가 아니라, 애국주의였다. 헌턴은 “영국산을 사라”고 주장했고, 허턴은 “영국 기업은행”을 설립하자고 했지만, 공공 소유로 전환하자는 제안은 없었다. 현재 공익사업, 은행, 대기업은 대부분 외국 자본(주로 미국)에 의해 소유되고 통제되고 있지만 말이다.
또 다른 세션에서는 전 세계 무역 및 자본 흐름의 심각한 불균형, 미국 패권과 달러의 국제통화 지위 약화 조짐, 중국의 부상 등에 대해 논의했다. 이에 대한 해답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브릭스 플러스)가 세계 불균형을 완화하고, 트럼프의 관세 중심 민족주의에 맞서 다자주의를 회복시켜줄 수 있기를 바라는 희망이었다.
이 세션에서 앤 페티포어(Ann Pettifor)는 자본주의 위기의 원인을 과도한 부채라고 주장했다(수익률이나 투자 동향은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미국의 좌파 경제학자이자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의 최근 저서 ⟪자유로 가는 길⟫(The Road to Freedom)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책에서 스티글리츠는 “진보적 자본주의”의 창출을 다시금 촉구했다. “세상이 꼭 지금처럼 흘러가야 할 필요는 없다. 다른 길이 있다. 그것이 바로 진보적 자본주의다. 진보적 자본주의는 모순어법이 아니다. 우리는 시장의 힘을 사회를 위해 활용할 수 있다.”(스티글리츠) 결국 문제는 자본주의 자체가 아니라, 독점자들과 은행가들 사이에 존재하는 ‘기득권’이라는 설명이다. 스티글리츠가 믿듯, 해답은 1950~60년대 황금기에 존재했던 ‘관리된 자본주의(managed capitalism)’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다. 스티글리츠는 말했다. “지난 40년 동안 우리가 목격해온 자본주의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작동하지 않았다. 우리는 진보적 자본주의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자본주의를 길들여야 하고, 자본주의를 재조정해 사회를 위해 복무하게 만들어야 한다. 사람들이 경제에 복무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가 사람들을 위해 복무해야 한다.”
또 다른 세션에서는 소득과 부의 충격적인 불평등에 대해 논의되었다. 흥미롭게도 벤 티펫(Ben Tippett)과 같은 일부 발표자들은 영국에서 부유세를 도입해도 불평등을 크게 줄이거나 정부 재정을 실질적으로 늘리는 데에는 별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부유세는 ‘마법의 해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티펫의 말이 옳았다. 부유세는 불평등을 해결하지도 못하고, 공공 투자에 필요한 재원을 충분히 마련하지도 못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이런 질문은 하지 않았다. 도대체 왜 우리는 억만장자와 이런 극단적 불평등을 갖게 되었는가? 불평등은 재분배 이전, 즉 자본에 의한 노동 착취의 결과다. 조세는 그 착취 이후의 부와 소득을 재분배하려고 시도할 뿐이며, 그 효과는 제한적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조시 라이언-콜린스(Josh Ryan-Collins)는 주택 위기의 해법이 더 많은 주택을 짓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 위기의 원인이 저금리(저렴한 대출)로 인해 수요가 폭등한 데 있다고 말했다. 그의 해법은 이렇다. 큰 집에 살고 있는 노년층이 '다운사이징(downsize)'을 하도록 유도해 기존 주택 재고를 젊은 구매자들에게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가 자금을 투입해 공공 임대 주택을 짓는, 1950~60년대에 성공적으로 시행했던 방식은 이제는 해법이 아니라는 듯한 입장이었다.
조 미첼(Jo Michell)은 노동당 정부가 ‘국가 재정 장부를 맞추겠다’며 자발적으로 설정한 터무니없는 재정 규칙들을 비판했다. 그러나 그는 이 규칙들이 너무 ‘단기적’이라는 이유로만 반대했다. 이는 스타머 정부가 고령자, 장애인, 가정을 대상으로 한 복지 지출 삭감을 통해 긴축 재정을 강행하겠다는 계획을 피할 수 있는 근본적인 수입 확보 방안, 즉 어떤 급진적 대안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었다.
프랜시스 코폴라(Frances Coppola)는 영국은행의 양적완화 정책 및 최근의 통화 긴축이 정부 재정에 연간 200억 파운드에 달하는 부담을 주고 있다고 지적하며, 그 실패를 비판했다. 그러나 어떤 발표자도 영란은행의 이른바 ‘독립성’을 되돌려 런던 금융가에 대한 종속 상태를 끝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영란은행의 역할은 ‘물가 안정 유지’라는 것이었다(코폴라의 주장). 이는 중앙은행들이 코로나 이후 인플레이션 급등을 전혀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매우 이상한 주장이다. 그러나 어쨌든 중앙은행이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 편이 낫다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어떤 ‘방만한 정부’(비록 민주적으로 선출되었을지라도)가 금리 등을 좌지우지하여 금융 시장에 위기를 불러오는 일이 없다는 논리였다. 결국 시장이 지배하며, 그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주요 은행이나 금융 기관을 공공 소유로 전환하자는 주장은 어떤 발표자도 언급하지 않았다.
마지막 세션에서는 ‘임대’, ‘추출’, ‘디스토피아’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보다 근본적인 대안을 논의했다. ⟪프레카리아트⟫(The Precariat, 불안정한(precarious)과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의 합성어로 고용·소득·사회적 지위·정체성 등에서 구조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 놓인 계급 또는 집단을 지칭)의 저자이자 PEF 평의회 위원인 가이 스탠딩(Guy Standing)은 파시즘의 재부상 위험과 그것이 ‘진보적 의제’에 가하는 위협을 강조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전통적 노동계급은 전 세계적으로, 그리고 영국에서도 점점 ‘불안정 계급’으로 대체되고 있다. 이 계급은 안정된 일자리도, 적절한 임금과 노동조건도 없는 채 ‘뒤처지고’ 있으며, ‘금권계급’이 조장하는 반동적 사상에 쉽게 노출된다. 그리고 이 초부유층과 프레카리아트 사이에 계급 협력이 이뤄질 수 있다는 심각한 위험이 존재한다. 이때 그들이 함께 맞서는 대상은 ‘샐러리어트(salariat)’인데, 나는 이 용어가 전통적인 노동계급을 의미하는 것이라 이해했다. 그 해답은 무엇인가? 스탠딩은 노동계급이 아니라 프레카리아트를 포용하고, ‘추출 자본주의’를 해체하여 이를 ‘커먼즈(the commons)’로 대체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가 말한 ‘커먼즈’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말하는 ‘공유지(common land)’를 뜻하는 것인지, 아니면 사회주의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컨퍼런스 전체를 통틀어 ‘사회주의’라는 단어는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존 맥도넬(John McDonnell)과 나디아 위톰(Nadia Whittome)은 영국에서 가장 뛰어난 좌파 노동당 정치인들 가운데 두 명이다. 맥도넬은 이번 컨퍼런스에서 자신이 정계에 몸담은 50년 동안 영국과 세계의 상황이 지금처럼 암울한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 해법은 무엇인가? 스타머 정부가 다시 ‘제대로 된 노선’으로 돌아가 노동자들을 위한 정책을 채택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 생각에 그것은 헛된 희망이다. 위톰 역시 국내외에서 자본주의가 초래한 참혹한 결과들을 상세히 설명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해답은 무엇이었는가? 설마 자본주의를 ‘더 잘 관리’하는 것이 대안이란 말인가?
아마도 해답은 PEF가 이번 컨퍼런스 문헌에 인용한 1942년 윌리엄 베버리지(William Beveridge)의 구호 속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세계사적 혁명적 순간에는 땜질이 아니라 혁명이 필요하다.”
정말 그렇다!
그러나 지금의 PEF는 땜질을 주장하고 있다.
[출처] Progressive Economics and progressive capitalism
[번역] 이꽃맘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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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로버츠(Michael Roberts)는 런던 시에서 40년 넘게 마르크스 경제학자로 일하며, 세계 자본주의를 면밀히 관찰해 왔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