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체제전환운동 조직위원회는 11월 9일 노동자대회까지 체제전환을 알리는 공동실천 <가자, 체제전환 공동행동>을 진행중입니다. 11월, 우리가 기리는 전태일의 정신은 평등정신입니다. 모두가 똑같이 존엄한 인간이라는 전태일의 평등정신은 노동해방, 반전평화, 페미니즘, 기후정의, 반빈곤과 학생인권 등 오늘의 실천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맞서고 바꿔야할 ‘체제’에 대해 <00은 체제의 문제다>로 알아봅니다.
[출처] Elvert Barnes, Flickr
건강은 ‘좋은’ 삶을 성취하는 데 꼭 필요한 ‘수단’으로서 특별한 가치와 의미를 가진다. 아마티아 센이 말했듯이, 건강은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할 수 있는 능력(capability)이자 자유다. 누구에게나 건강이 소중하다 보니, 세계인권선언에서도 ‘모든 사람’이 “도달 가능한 최고 수준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향유할 권리”(사회권규약, 제12조1항)를 가진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보편적 차원의 건강권 실현은 지금 시대를 형성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체제 하에서는 사실상 불가능해 보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체제가 ‘반(反)건강(권)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보건의료의 자본화
건강권을 말하면 흔히 보건의료를 떠올린다. 보건의료는 영양, 위생 등과 함께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많은 요인 가운데 하나지만, 건강을 지키는 유력한 수단이라는 점에서 보편적 의료보장은 건강권 보장의 필수 조건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보건의료가 가치재(공공재)로서 ‘필요’ 원칙에 따라 모든 구성원에게 평등하게 제공될 때 달성될 수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는 보건의료 영역을 시장화 함으로써 필요가 아닌 ‘비용지불능력’에 따라 서비스가 생산·분배되도록 만든다. 경제적 부담으로 인한 미충족의료 문제나, 특히 지금 벌어지고 있는 ‘필수·지역의료 위기’의 근본 원인도 바로 이것이다. 수익성 논리로 돌아가는 시장 메커니즘에 따라 인력과 자원의 불균형한 분포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는 상품의 ‘생산 질서’가 없는 체제의 근본적 특성이기도 하다. 더욱이 지역의료 위기는 보건의료체계의 시장화 범위를 넘어선 문제다. 자본축적에 최적화된 공간 배치를 위해 비수도권 지역의 저발전을 고착화한 지역불평등 구조가 저출생·고령화 현상과 맞물리며 지역 인구가 빠르게 감소한 결과 의료시장 자체가 위축·붕괴되고 있는 실정이다. 또 보건의료가 상품으로 ‘물신화’됨에 따라 의사-환자 관계 등이 탈인격화 되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될 심각한 병폐 중 하나다.
누구든지 어디서나 제때 필요한, 신뢰할 수 있는 양질의 보건의료에 접근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을 보건의료체계의 공공성 강화라고 한다면, 이는 곧 탈(반)자본화를 의미할 수밖에 없다. 물론 체제의 경향성이 그대로 현실화되는 것은 아니며, 또 체제내적 제도개혁을 통한 공공성 강화가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하다는 뜻도 아니다. 다만 이러한 접근과 노력만으로는 보편적 건강권 실현이 불충분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임에도 서구 복지국가들이 공공성 수준이 높은 보건의료체계를 구축할 수 있었던 데에는 2차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적 특수성이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순정자본주의’라 할 수 있는 신자유주의가 대두된 이후 거세진 체제의 압력은 이들 국가에서도 보건의료체계의 공공성 약화로 나타나고 있다. 단적인 예로, 한때 “자본주의 국가 내 사회주의 섬”이라 불렸던 영국 국가공영의료체계인 ‘NHS(국가보건서비스)’는 체제의 영향력 속에서 갈수록 그 공공성이 후퇴하고 있는 현실이다. 나아가 오늘날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에서 비롯된 체제의 위기는 건강과 보건의료 영역의 영리화·산업화를 추동하고 있다. 이는 보건의료 공공성 강화 운동이 체제를 문제화할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다. 즉, 공공성을 약화하는 체제의 경향적 힘에 맞서고 이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더욱 상위 차원의 체제전환이라는 장기 전망과 과제에 조응하는 전략과 실천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건강을 억압하는 불평등 체제
건강권 보장은 비(非)보건의료적 요인에 대한 접근도 포괄해야 한다. 사회역학에서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이라 말하는, 소득, 노동, 주거, 교육, 젠더, 인종 등 우리 삶을 둘러싼 거의 모든 사회 조건들은 다양한 경로와 기제를 통해 건강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영향이 불평등하게 작용한다는 점이다. 타고난 체질이나 유전 요인 등에 따른 건강 차이가 일정 수준 불가피하기에, 건강권 운동이 문제 삼는 ‘건강불평등(health inequity)’은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체계적 격차를 의미한다. 즉, 부정의한 사회 구조적 ‘힘’들이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 발현된 결과물이 바로 건강불평등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건강불평등은 각종 사회적 불평등을 포괄하는 메타불평등이자 사회 부정의를 가늠하는 척도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건강불평등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불평등들의 공통된 핵심 원인인, 심층 구조에 자리하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를 문제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가부장주의나 인종주의, 이성애중심주의 등과 같이 자본주의만으로 환원되기 어려운 구조적 원인들이 있지만, 이것들 역시 자본주의 체제와의 복잡한 뒤얽힘과 상호작용 속에서 그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자본주의 체제는 기본적으로 생산수단을 소유한 계급과 그렇지 못한 계급 간의 격차를 심화시키고, 노동력 가치의 격차에 따른 불평등을 낳는다. 그런데 노동력 상품 시장에서 저평가된 노동자들만이 건강불평등 구조의 피해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낸시 프레이저가 말했듯이, 자본주의 체제는 저임금 노동자뿐만 아니라 가사와 양육, 성인·노인 돌봄 등 ‘사회 재생산’을 담당하고 있는 무임금 노동자 역시 착취하고 있다. 또 착취당하는 노동자와 더불어 장애인, 환자, 노인 등 자본축적에 ‘일조’하지 못해 잉여화·주변화된 존재들 역시 건강권의 실질적 보장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다. 한편 고임금 노동자나 고소득 자본가라 할지라도 건강불평등 구조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건 아니다. 시장 경쟁에서 승리하고 계층 사다리를 올라가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는 과정에서 그 대가로 건강상의 손실을 감수해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계급과 정체성 등에 따른 고통의 불평등을 무화해서는 안 될 테지만, 자본주의 체제는 ‘건강’ 이데올로기를 통해 모든 이들의 ‘건강할 자유’를 억압하는 속성이 있다.
‘건강’을 통해 억압하는 체제
건강은 인간의 고유하고 보편적인 욕구지만, 건강관은 보편적이지 않다. 건강에 대한 인식과 규범, 가치와 문화는 시대와 사회의 맥락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해 왔다. 체제의 경향성에 따라 건강에 대한 관점이 달라진다는 점에서 오늘날 지배적인 건강관 역시 자본주의 체제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무제한적 건강추구 욕망과 행위로 표출되는 건강지상주의는 자본주의 체제 속 생활양식의 한 단면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가 건강할 자유를 누리는 것을 지향하면서도, 지금의 건강관에 내포된 문제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앞서 언급한 보건의료 영리화 문제와 같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건강은 경제성장을 위한 산업이자 상품으로 호출된다. 그 결과, 건강검진 산업과 건강기능식품 산업의 과도한 팽창에서 보듯이 우리는 자본의 필요에 의해 대량 생산되는 상품과 서비스를, 실제 건강에 필요한 것 이상으로, 계속해서 소비하도록 떠밀리고 있다.
동시에 더 심각한 문제는, 건강을 최고 가치로 중시할수록 오히려 그만큼 권력 약자들의 건강권 보장이 힘들어진다는 점이다. 자본주의적 건강관은 자본축적에 유리하다고 판명된 형태의 노동생산성만을 ‘정상성=건강’의 절대 기준으로 삼는다. 따라서 이 건강관은 이러한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즉 ‘비생산적인(쓸모없는)’ 몸으로 분류된 (중증·난치성) 질환자와 장애인, 노인, 성소수자, 빈민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과 배제를 정당화하는 억압적 패러다임으로 작동한다. 여기에 추가로 결부된 신자유주의적 건강관은 모든 개인을 끊임없이 자기계발에 힘쓰는 기업가적 주체로 호명함으로써, 모두가 건강의 포로가 되어 자기 자신을 스스로 착취하도록 만든다. 도덕적 의무가 된 건강관리에 실패한 이들은 무능하고 무책임한 존재로 매도당한다. 이렇듯 자본주의적 건강관은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기능하며 체제를 공고화하는 측면이 있다. 따라서 역설적이게도 지금 시대에 요청되는 건강권 보장 운동은 건강중심사회에 도전하는 ‘질병권(잘 아플 권리)’ 운동과 같이 ‘탈건강’ 담론과 실천의 형태가 돼야 할지 모른다.
‘건강’을 매개로 체제전환을 상상하기
위와 같이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는 우리가 지향하는 건강평등사회 구축이 요원할 수밖에 없다. 이는 곧 보편적 건강권 보장 운동과 체제전환 운동이 분리될 수 없는 문제임을 의미한다. 체제전환에 관한 좋은 이론이 부족한 지금 상황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한 가지 대안 전략은 자본 논리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방식의 보건의료 공공성 강화 투쟁을 전개하는 가운데, 더욱 정의롭고 평등한 사람 중심의 반자본적 건강관을 주류화 함으로써 체제의 균열을 키우는 것이다. 이러한 운동이 체제전환의 마중물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까닭은, 무엇보다 건강이 자본 운동에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장애·보건의료 활동가 애들러-볼튼과 비어칸트가 주장한 것처럼, 이것이 바로 “자본이 오직 건강만을 두려워하는” 이유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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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식은 시민건강연구소 연구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