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런던의 버스 정류장과 지하철 광고판 곳곳에 분홍색 지도가 등장했다. 지도상의 위치는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지도 위에는 이런 내용의 말풍선이 있었다.
“너와 내가 태양 아래 자유롭게 손을 잡고 앉아 있는 모습을 항상 상상해 왔어. 우리는 가보고 싶은 모든 곳들을 이야기했지. 우리에게 쏟아지는 폭탄이 너를 나에게서 데려갈 줄 알았더라면, 내가 그 무엇보다도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기꺼이 이 세상에 말했을 텐데. 미안해. 내가 겁쟁이여서.”
전 세계의 퀴어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곳, 기억하고 싶은 곳에 좌표와 메시지를 남길 수 있도록 제작된 ‘퀴어링 더 맵’이라는 사이트에 남겨진 팔레스타인 퀴어들의 메시지다. 지도 위에 남겨진 메시지들은 이미 몇 년 전에 남겨진 것들이었다. 영국의 트랜스, 시스, 논바이너리 레즈비언-퀴어 단체인 다이크 프로젝트는 이 사이트에서 팔레스타인 지도 위에 남겨진 메시지를 모아 런던의 대중교통 광고판에 붙이고 “우리는 점령을 중단할 것과 영국 정부가 이스라엘 군에 대한 자금과 무기 지원을 중단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 모두가 해방될 때까지 우리 중 누구도 해방될 수 없다”고 썼다.
지도 위에 남겨진 메시지 중에는 이런 내용도 있었다.
“앞으로 얼마나 살지 모르니까 죽기 전에 여기에 내 추억을 남기고 싶어.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나의 집을 떠나지 않을거야. 내가 가장 후회하는 일은 그에게 키스를 하지 못했다는 거야. 이틀 전에 그가 세상을 떠났어. 지난번에 만났을 때 우리는 서로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야기했는데 너무 부끄러워서 키스를 못했어. 그는 폭격으로 사망했고. 나의 일부도 함께 죽었어. 곧 나도 죽게 되겠지. 유누스, 하늘나라에서는 너에게 키스할게.”
글쓴이는 유누스를 만났을까. 이들의 생사를 알 길 없이 2023년 10월 7일 이후 9개월이 되어가는 지금, 가자지구의 상황은 날이 갈수록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급기야 5월 26일 이스라엘은 라파 난민캠프를 공격했고, 그로부터 4일 후 세계보건기구는 라파의 마지막 병원이 문을 닫았다는 소식을 전했다.
2023년 11월
이스라엘의 31세 게이 군인 요아브 아츠모니(Yoav Atzmoni)는 폐허가 된 가자 북부 알-아타트라의 한복판에서 무지개 깃발을 들고 사진을 찍어 소셜미디어에 올리고 이렇게 썼다.
“IDF(이스라엘방위군)는 중동에서 민주주의 가치를 수호하는 유일한 군대다. 게이들에게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는 자유를 허용하는 유일한 군대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 대의가 옳음을 전적으로 믿는다”
그가 들어 올린 무지개 깃발에는 영어, 아랍어, 히브리어로 ‘사랑의 이름으로’라는 손글씨가 적혀 있었다. 이스라엘과 이스라엘 대사관의 X 계정은 그가 ‘사랑의 이름으로’를 쓴 무지개 깃발을 들고 “하마스의 만행 속에 살고 있는 가자 주민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보내고 싶다”고 쓴 게시물을 공유했고, 이스라엘 정부의 X 계정은 여기에 “가자에서 들어 올려진 첫 프라이드 깃발”이라고 썼다.
이제 ‘사랑의 이름으로’ 팔레스타인을 향해 진격하는 이스라엘 군인들의 일부 탱크에는 이스라엘기와 함께 한가운데에 다윗의 별이 자리하고 있는 무지개 깃발이 휘날린다. 가자의 퀴어들은 무지개 깃발 아래, ‘사랑의 이름으로’ 학살당하고 있다.
2024년 6월
서울퀴어문화축제, 영국 대사관은 미국, 독일 대사관과 함께 부스를 열고 “해피 프라이드!”를 외치며 부채를 나눠줬다. 서울퀴어문화축제 홈페이지에 남겨진 부스 소개글에는 “주한 독일, 미국, 영국 대사관은 성소수자들의 권리와 평등을 지지하기 위해 함께 모였습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그러나 ‘사랑의 이름으로’ 학살을 정당화하는 이스라엘에서 팔레스타인 퀴어들에게 쏟아진 전쟁무기의 대부분은 미국과 독일에서 공급하고 있다.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의 보고서에 따르면 2019년에서 2023년까지 이스라엘이 수입한 재래식 무기의 69%는 미국산이며 미국과 이스라엘은 10년 동안 총 38억 달러에 달하는 무기를 지원하기로 협정을 맺었다. 이어서 독일이 29.7%로 2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역사에 원죄가 있는 영국도 계속해서 무기를 수출하는 중이다.
출처: https://www.bbc.com/news/world-middle-east-68737412
바이든 대통령은 이스라엘이 라파를 공격해 ‘레드라인’을 넘으면 무기 공급을 중단하겠다고 했지만 라파의 난민캠프에서 수십 명이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화염에 휩싸여 사망한 다음 날, 백악관은 “이스라엘은 하마스를 공격할 권리가 있다”며 이를 옹호했다. 미국, 영국, 독일의 대사관이 웃으며 “해피 프라이드!”를 외치는 자리에서 학살당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퀴어의 존재는 삭제되었다.
학살자의 언어로는 프라이드를 말할 수 없다
계속된 점령과 학살 속에서도 만나고 사랑하며 살아남아 저항하는 팔레스타인의 퀴어들은 팔레스타인 퀴어의 해방을 위한 요구를 담은 성명에서 단호히 말한다. “학살을 위해 우리의 퀴어성과 신체, 퀴어로서 직면하는 폭력을 도구화하는 것을 거부한다”고.
팔레스타인의 성적 다양성을 위한 단체 알콰스(alQaws)가 강조하듯 팔레스타인 퀴어의 해방을 위한 “연대와 행동의 기준은 식민주의자가 정할 수 없다”. 팔레스타인에서의 퀴어의 현실은 식민주의의 역사적 맥락을 다루지 않고는 이야기할 수 없으며, 다른 모든 국가에서도 그러하듯이 법과 제도, 규율이 사람들의 삶과 인식을 모두 일관되게 좌우하는 것도 아니다.
학살자들의 핑크워싱은 가족과 공동체에서 서로를 돌보며 살아온 퀴어들의 경험과, 학살로 인해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시간들, 폐허가 된 이들의 소중한 집과 만남의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덮어버린다. 폭격이 아니면 존재할 수 있었을 이들의 시간과 희망, 고백, 웃음, 따스한 포옹과 작은 축제들, 그들의 저항과 일상의 낮과 밤을 지워버린다.
2024년 6월 1일 서울퀴어문화축제의 거리 위에서 나는, 우리는 그들의 일상을 학살해 버린 국가들의 부스에서 웃으며 외치는 “해피 프라이드!”를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었다. 대신, 쏟아지는 폭격 속에서 지도 위에 남겼을, 지금은 생사를 알 수 없는 어느 팔레스타인 퀴어의 메시지가 그날 퀴어문화축제에 모인 15만 명에게 닿기를, 팔레스타인 퀴어의 생존과 해방을 위해 함께 학살 중단을 요구하는 15만 명의 집회로 이어지기를 간절히, 간절히 원하며 외치고 행진했다. 학살의 무기가 되어버린 프라이드가 아니라, 저항의 언어로 다시 쓰여야 할 프라이드를 위해. 팔레스타인의 해방의 날 함께 행진할 우리의 프라이드를 위해.
“미디어에서 뭐라고 말하든, 팔레스타인에 게이가 살고 있다는 걸 알아줘. 우리 퀴어들이 여기에 있어.”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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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영은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SHARE의 활동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