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스리랑카는 처음으로 좌파 성향의 대통령을 선출했다. 새 정부는 변화를 바라는 지지자들의 기대와 파괴적인 긴축 프로그램을 계속해야 한다는 IMF의 압력 사이에서 갈등을 겪게 될 것이다.
지지자들의 응원을 받고 있는 아누라 쿠마라 디사나야케 신임 스리랑카 대통령. 출처: 아누라 쿠마라 디사나야케 공식 페이스북
스리랑카는 9월 21일 첫 좌파 대통령을 선출했다. 아누라 쿠마라 디사나야케(Anura Kumara Dissanayake)는 2022년 인구 2,200만 명의 섬나라가 국가 부도가 난 이후 처음으로 실시된 여론 조사에서 42%의 득표율을 얻었다.
2년 전 민중 봉기로 고타바야 라자팍사(Gotabaya Rajapaksa)를 대통령 임기 중반에 몰아낸 야나타 비묵티 페라무나(Janatha Vimukthi Peramuna, JVP, 인민해방전선)와 그 연합정당인 민족의 힘(National People’s Power, NPP)의 지도자인 ‘AKD’로 널리 알려진 디사나야케가 그 자리에 올랐다. 놀랍게도 콜롬보 증권거래소는 투표 결과 발표 후 상승세를 보였다.
AKD 지지자들이 주장했던 압승은 아니었으며, 1차 투표에서 승리하는 데 필요한 50% 플러스 1표에 미치지 못했다. 그의 대통령 당선은 결선 투표를 통해 확정되었고, AKD는 가장 가까운 라이벌인 전 야당 지도자 사지트 프레마다사(Sajith Premadasa)를 압도적으로 이겼다.
그는 전후 분열된 사회에서 타밀족과 무슬림 소수 민족(전체 인구의 25% 미만)으로부터 싱할라족(대부분 불교도) 다수 민족과 같은 수준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 결과는 AKD가 권력, 계급, 자본의 방해를 뛰어넘어 이뤄낸 놀라운 역전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2019년 선거에서 3%의 득표율에 불과했던 AKD는 어떻게 단 한 번의 선거 주기로 스리랑카 최고 권력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 JVP의 기원과 발전 과정은 무엇이며, 새 정부의 정책 방향과 당면한 과제는 무엇인가?
민중 봉기와 그 여파
이번 달의 정치적 지진은 2022년 민중 운동(자나타 아라갈라야(janatha aragalaya), 싱할라어로 "인민 투쟁")을 떠올리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다. 그해 상반기, 수십만 명이 대통령 퇴진(#GotaGoHome)과 '체제 변화'를 외치며 거리로 나섰다. 이들은 통일된 리더십이나 일관된 요구 없이 자체적으로 조직된 지역 행동과 콜롬보의 대규모 시위를 통해 힘을 모았다.
그해 초, 코로나19 팬데믹 동안 서서히 시작된 위기가 점차 심화되면서 외환 보유고가 바닥을 쳤다. 이는 국채 상환, 급락하는 루피화 방어, 그리고 감소하는 정부 수입으로 인해 고갈되었다. 연료, 식량, 의약품 수입 대금을 지불할 수 없게 되면서 나라는 그 기능을 멈췄다.
에너지 배급이 이루어지고 학교와 중소기업이 문을 닫는 등 생활 필수품 부족 사태가 이어졌다. 외국 채권자들은 스리랑카가 그해 갚아야 할 부채를 상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고, 정부는 워싱턴 D.C.로 달려가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처음에는 2019년과 2020년 대선과 총선에서 거의 과반수로 선출된 정부의 무능함에 대한 불신과 좌절이 있었으나, 이는 곧 1948년 스리랑카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권력을 잡아온 모든 정치인과 정당에 대한 분노로 빠르게 번졌다.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자신의 고통을 정치권의 뿌리 깊은 이기심과 연이은 대형 부패 사건들과 연결 지었다.
시위 운동의 주요 목표는 현직 대통령 고타바야 라자팍사와 그의 형인 전 대통령 마힌다 라자팍사를 포함해 정부와 국가 정치에 자리 잡은 라자팍사 가문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또한 시위대는 부패하지 않은 새로운 국민 대표로 조기 선거를 통해 의원들을 교체하고자 했다.
그러나 라자팍사 가문이 정부에서 축출된 후, 신자유주의 우파의 역사적 지도자인 라닐 위크레메싱헤(Ranil Wickremesinghe)가 대통령직에 올랐다. 위크레메싱헤는 의회를 해산하고 새롭게 재구성하라는 요구에 저항했다. 그는 인권과 헌법을 침해하며 활동가들을 구금하고 탄압했으며, 지방 정부 기관의 선거를 연기하면서 IMF 긴축 프로그램을 통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한편, 권력자들에게는 '안정'을, 부자들에게는 '회복'을 제공했다.
사실 대선 당일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위크레메싱헤가 투표장에서 굴욕을 피하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오토골페를 계획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AKD의 승리 이후 11월 14일에 예정된 총선은 모든 정당의 구세력을 몰아낼 수 있는 기회로, 2년 전 미완의 과제가 이제 다시 마주하게 된 것이다.
JVP의 부상
JVP-NPP는 민중 봉기를 촉발하거나 주도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메시지는 사회 각계에 퍼졌다. JVP는 수년간 정치 및 경제 부패 문제를 지적해왔으며, 이러한 논리는 봉기 이후 더 널리 퍼졌다.
JVP는 오랫동안 스리랑카의 정치적, 경제적 문제들이 두 영역에 뿌리 깊은 부패의 결과라는 생각을 대중 담론에 주입해 왔다. 정부 내 뇌물 수수와 부패를 폭로하고, 공적 자금 사용에서의 낭비와 비효율성을 강조하면서 인기가 높아졌다. 그러나 이 정당이—마르크스주의적 기원을 가진 집단이라면 예상할 수 있었던 것처럼—하지 않은 것은, 부패가 사악한 사람이나 취약한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경제적 문제이며, 자본주의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스리랑카의 의회 정당 중에서 유일하게 JVP-NPP 대표들은 공적·사적 생활에서 범죄나 폭력적인 행동을 저지르지 않은 도덕적 조직의 훈련된 구성원으로서 명성을 쌓아왔다. 2022년 봉기 동안과 그 이후, 당-연합의 전통적인 사회적·민족적 지지 기반을 훨씬 넘어서서 다양한 사회 계층이 JVP-NPP를 기존 정치 계급에 대한 윤리적 대안이자 체제 변화를 이끌 주체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JVP에 대한 대중의 인식 변화의 중요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난 30년 동안의 발전 과정과 현재 지도자의 배경을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60년대 중후반 JVP의 창립자들은 마오이즘에 매료된 젊은 싱할라족 간부들이었으며, 이들은 실론 공산당(Communist Party of Ceylon, CCP) 출신이었다. 당시 CCP는 소련을 지지하는 그룹과 중국을 지지하는 그룹으로 나뉘었고, JVP는 후자로부터 분리되어 처음 발전했다.
그 이후로 JVP는 스스로를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당으로 정의해 왔다. 그러나 동시에 싱할라 불교 문화와 이념을 받아들였으며, 최근에는 국가 주권과 영토 보전에 대한 외부의 ‘인도 팽창주의’와 내부의 ‘타밀 분리주의’ 위협에 맞서 싱할라 민족주의를 옹호해왔다.
JVP는 창립자 로하나 위제위라(Rohana Wijeweera)의 지도 아래 두 차례의 반란을 조직했다. 1971년 반란은 트로츠키주의 제4인터내셔널의 일원이었던 스리마보 반다라나이케(Sirimavo Bandaranaike) 정부를 상대로 일어났으며, 당시 친소련 실론 공산당(CCP)과 랑카 사마 사마자당(Lanka Sama Samaja Party)이 좌파 연합 전선 정부의 소수 연합 파트너로 참여하고 있었다. 그 당시와 이후로도 대중의 동정은 사회 변화를 위해 무기를 든 학생들과 청년들에게 쏠렸지만, 그들은 무분별하게 살해되거나 수년 동안 재활 캠프에 수감되었다.
1977년 정권이 교체된 후 위제위라와 다른 지도자들이 석방되었고, JVP에 대한 금지령도 해제되었다. 이로 인해 JVP는 노동자, 대학생 및 중·고등학생, 불교 성직자, 군 하급 관리 등을 대상으로 공개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위제위라는 1982년 대통령 선거에서 JVP 후보로 출마했으며, 4%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두 번의 반란
1983년 7월, 타밀족을 겨냥한 국가 주도 폭력 사태 이후 JVP는 또 한 번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했다. J. R. 자야와르데네(J. R. Jayewardene) 우파 정부는 해당 폭력 사태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던 JVP와 두 개의 좌파 정당을 금지시켰다. 당시 자야와르데네 정부는 라닐 위크레메싱헤의 삼촌이 이끄는 통합국민당(UNP)이었으며, 실제로 폭력 사태를 주도한 정당이었다.
JVP는 다시 지하로 숨어들었고, 무기 수집과 은행 강도 등을 통해 자금을 확보하며 군사 훈련을 시작했다. 당시 국가는 섬 북부와 동부의 여러 타밀 무장 조직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JVP는 국가와 전쟁 중이면서도 타밀 민족의 자결권을 극렬하게 반대했다.
인도는 타밀족이 다수인 섬 북부와 동부에 군대를 주둔시키며 내전 개입을 강화했고, 인도 중재로 제한된 권한을 가진 지역 정부가 전쟁의 정치적 해결책으로 세워졌다. 이 시점에서 JVP는 1987년부터 1989년까지 두 번째 반란을 일으켰다.
1971년의 반란이 사회주의를 추구한 것이었다면, 이번 반란은 싱할라 민족주의 기치를 내걸고 시작되었다. 1980년대 들어 노동계급 의식이 약화되고, 좌파 노동조합과 정당이 쇠퇴하면서 JVP는 이러한 반동적 전환에 기여했다. JVP는 인도의 민족 분쟁 개입과 당시 우파 정부에 반대하는 애국 인민 운동(Patriotic People’s Movement, PPM)을 조직하여 회원을 넘어선 대중적 운동을 전개했다.
JVP가 주도한 PPM은 여당 관계자와 지지자뿐만 아니라, 국가 보안 요원과 그 가족들, 그리고 좌파 반대자들, 학생 지도자, 노동조합원, 농민 조직가들까지 암살했다. JVP가 일으킨 폭력은 국가에 의해 수 만 배의 보복을 당해, 4만에서 6만 명에 이르는 젊은 남녀가 탄압 속에서 희생되었다.
JVP는 다시 진압되었고, 1989년 체포된 위제위라는 이번에는 목숨을 건지지 못했다. JVP가 일으킨 이 공포의 시대(bheeshanaya, 싱할라어로) 기억은 2024년 선거에서 JVP의 경쟁자들이 이를 악용해 JVP의 지지세를 약화시키기 위해 이용했다.
재건
JVP가 1990년대 초 회복과 재건의 단계에 들어섰을 때, 아누라 쿠마라 디사나야케는 당 내에서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다. 그는 스리랑카 북중부 시골의 작은 농부 가정에서 태어나 가난한 사람들의 자녀들이 다니는 지역 학교에서 공부했다. 그의 아버지는 정부 부처의 일용직 근로자였다.
디사나야케는 1980년대 후반 JVP에 가입하여 콜롬보 외곽에 있는 공립대학의 학생 조직에서 활동하며 물리과학 학위를 취득했다. 당시 JVP와 관련이 있다는 소문만으로도 사형 선고를 받을 수 있었던 시기였지만, 그는 동시대의 많은 사람들과 달리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1990년대 중반까지 그는 당의 사회주의학생연합(Socialist Students’ Union) 전국 조직자가 되었고, JVP 중앙위원회에 입성했다. 1998년에는 JVP 정치국(Politburo) 위원으로 승진했다. 2년 후 그는 처음으로 국회의원이 되었고, 그 이후로 의석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2014년, 그는 JVP의 다섯 번째 최고 지도자가 되었으며, 창당 이래 세 명의 지도자는 1989년 11월에서 1990년 1월 사이에 국가에 의해 초법적으로 살해되었다.
JVP가 중앙 정부에 참여한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2004~2005년 짧은 기간 동안 연립정부의 일원으로 AKD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농업 분야를 담당했다. 같은 시기 그는 남부 지방의 한 지역 단체를 이끌기도 했다.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는 JVP가 타밀엘람해방호랑이(LTTE)와의 평화 회담에 반대하는 거리 시위와 파업을 벌였던 시기이기도 하다. JVP는 2005년 마힌다 라자팍사(Mahinda Rajapaksa)의 싱할라 민족주의 대선 캠페인을 지지했고, 승리 후 전면전을 복귀시키는 데 앞장섰으며, JVP 지도자들은 최전선에서 군을 독려하기도 했다. 또한 JVP는 타밀 민족주의자들이 전통적인 고향으로 여기는 북부와 동부 지역을 분리하라는 대법원 청원에도 성공했다.
JVP의 최근 기억 속에서의 방향성은 왜 그들이 타밀족이 다수인 지역에서 정치적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했는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비록 타밀족 지역에서 조직화를 위한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나 2024년 선거에서는 북부와 동부에서 뚜렷한 태도 변화가 나타났다. 타밀족이 다수인 북부에서 국민회의(NPP) 득표율이 2019년 1%에서 710%로 급증했다. 또한 무슬림과 싱할라계 젊은이들이 대거 AKD를 지지한 동부에서 2025%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JVP의 군사주의적 입장과 싱할라 민족주의에 가까운 태도는 두 차례의 당내 분열을 초래했다. 2008년에는 우파, 인종주의 분파인 국민자유전선(National Freedom Front)이, 2012년에는 좌파, 사회주의 분파인 전선사회주의당(Frontline Socialist Party)이 각각 분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JVP는 강력한 공공 및 민간 부문 노동조합을 포함한 주요 조직과 선출된 기관에서의 대표성을 유지하고 있다.
NPP 프로그램
JVP는 2019년 국민회의(NPP) 연합을 결성하면서, 계층 기반을 넓혀 선거에서의 소외를 막고 이를 되돌리려 했으며, 과거의 이념을 공식적으로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과거의 역사를 떨쳐내고자 했다.
JVP는 지난 30년간 의회에 꾸준히 존재해 왔으며, 2000년 이후로는 가장 큰 좌파 의원 그룹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규모는 크게 변동했다(표 1 참조). JVP는 의회 정치에서 "제3의 세력"으로 널리 환영받았지만, 교대로 정권을 잡아온 두 동맹에 비해 훨씬 뒤처져 있었다. 원칙적이지만 무력한 "영구 야당"의 역할은 자유주의자들과 일부 좌파들이 JVP의 운명이라고 믿었던 것이었다.
2019년, JVP는 NPP를 명시적인 좌파 연합이 아닌 '진보적' 선거 전선으로 출범시켰다. 이 전선의 파트너들은 주로 젊은 정치, 노동, 문화 활동가들로 구성된 시민 사회 단체들이며, 스리랑카 좌파의 몰락 이후 남은 나이든 (주로 남성) 마르크스주의자들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 NPP는 다민족, 다종교 연합이지만 타밀족과 무슬림의 대표성은 낮다. 다른 정당에 비해 국가 지도부에서 여성의 비율이 더 높다.
그러나 NPP는 그 존재와 조직적 인프라 면에서 JVP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NPP가 JVP에 제공하는 주요 자산은 JVP가 권력을 잡기 위해 열심히 구애해 온 계층과 사회적 프로필이다. JVP는 이제 "전문가에 의한 통치"—즉, 학자, 전문가, 기업가들이 정치인에 의한 통치를 대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생각에 따르면, '교육받은' 중산층이 자신을 대변할 수 없는 사람들을 대표해야 하며, 정치인들은 그들이 조언하는 정책을 실행해야 한다는 것이
그러나 중산층조차도 엘리트층 못지않게 JVP의 외형과 과거에 깊은 불안을 느낀다. 이러한 두려움을 달래기 위해 JVP는 NPP를 통해 프로그램적으로 중도좌파로 이동했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을 표명하면서도, 이제 그 레퍼토리를 반영하고 있다.
NPP의 현 관점에 따르면, 민간 부문이 성장의 엔진이며, 국가는 시장을 감시하고 촉진하며 규제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스리랑카는 수출 수입을 늘리고 다각화하며, 자유무역협정을 이행하고, 투자자들의 요구에 맞는 비즈니스 환경을 조성하여 외국 자본을 유치해야 한다. 투자 촉진 구역은 섬 전역으로 확대하고 자본 시장도 확장해야 한다.
반면, NPP의 선언문은 시장 근본주의의 신념에서 벗어나 국내 산업 및 농업 생산의 중요성과 산업 및 농민에 대한 국가 지원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중소기업에 대한 양허적 신용과, 고리대금으로 여성들이 받은 소액 금융 대출에 대한 구제를 요구하고 있다.
이 동맹은 국영 기업의 민영화에 반대하며, 빈곤층에 대한 현금 지원을 늘리고, 필수 식품, 의약품, 지역 공산품에 대한 간접세를 폐지할 것을 약속한다. 또한 스리랑카의 대외 부채에 대한 감사를 실시하여 그 중 어느 부분이 부당하고 불법적인지 파악하겠다고 약속한다.
인권 및 정치 개혁 분야에서는, NPP는 가혹한 ‘테러방지법(Prevention of Terrorism Act)’을 폐지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존중하며, 단체 교섭을 촉진할 것을 약속한다. 또한 대통령의 행정 권한을 폐지하고, 타밀족이 다수인 북부와 동부 지역을 포함한 지방에 권한을 이양하는 새 헌법을 도입하고자 한다.
도전 과제
의회 과반수가 없는 상황에서, 주로 라자팍사 정당 출신인 기존 의원들에 대한 대중의 불만을 의식한 AKD는 취임 직후 의회를 해산했다. 의회 선거는 내년 8월 이전에 예정되어 있었다. 그는 현재 소속 정당의 세 명의 현직 의원들과 함께 임시 정부를 구성했다.
프랑스식 제도처럼 대통령보다 권한이 적은 총리직에 NPP의 유일한 여성 의원을 임명한 것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총선은 11월 14일에 치러질 예정이며, 한 선거 캠페인이 막 끝난 상황에서 또 다른 선거가 시작되었다. 이번 선거 결과는 NPP가 입법 계획을 추진할 수 있는 권한과 의석을 확보할 수 있을지를 결정할 것이다.
한편, AKD는 선거 운동 기간 동안 여러 차례 밝혔듯이 NPP가 IMF 프로그램을 계속할 것임을 재확인했다. 그러나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많은 구호를 제공할 수 있는 변화를 협상할 계획이다. IMF는 경제 목표와 조건이 불변이라고 강조해 왔다. 만약 NPP가 이에 따를 경우, 복지 공약을 포기하고 완전한 긴축 정책을 강요해야 할 것이다.
글로벌 신용평가사 무디스는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놓았다.
"디사나야케의 당선은 스리랑카 정치 지형에 큰 변화를 가져왔지만, 우리는 개혁에 대한 전반적인 열망은 그대로 유지될 것으로 보고 있다. IMF 프로그램 하에 진행 중인 부채 구조조정과 구조 조정을 포함한 스리랑카의 개혁 의제나 거시경제 정책에 큰 차질이 생길 것으로 예상하지 않는다."
스리랑카 중앙은행 총재와 재무부 장관이라는 두 핵심 인사가 전임 대통령과 함께 IMF에 종속되어 있던 상태에서 유임된 것은 경제 정책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새 정부가 총선에서 필요한 과반수를 확보하는 것은 어렵지만, 좌파 대통령은 IMF와 해외 채권단의 요구와 지지자들의 기대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하는 더 큰 어려움에 직면할 것이다.
[출처] Sri Lanka Is Experiencing a Political Earthquake
[번역] 이꽃맘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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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스칸타쿠마르(B. Skanthakumar)는 콜롬보에 있는 사회과학자협회(Social Scientists’ Association) 회원이며, 『스리랑카 좌파의 길(Pathways of the Left in Sri Lanka)』(콜롬보, 2014, 에큐메니컬 연구 및 대화 연구소) 공동 편집자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