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해방의 길, 정의로운 전환

동물권에 대해 알기 시작한 이래, 가장 많이 접한 언어는 ‘동물해방’이었다. 그에 대해 상상하는 것은 가슴이 먹먹해지는 일이기도 했다. 소와 돼지와 닭이 도살되지 않고, 자유롭게 목욕을 하고 풀을 뜯는 그런 모습.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동물이 해방된 세상은 인간도 해방된 세상이라는 막연하고 유토피아적 상상으로 가득한 구호가 점점 더 멀게 느껴졌다. 동물해방으로 가는 길에 있어, ‘과도기’에 대한 논의는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동물해방 된 세상에서는 적어도 축산업이 존재할 수는 없다. 누군가를 고문하거나 죽이는 방식으로 이익을 창출하는 것이 해방일 수는 없다. 축산업이 사라지는 과정은 어떤 모습일까? 살아온 세상을 바탕으로 상상한다면, 2024년 제정된 ‘개의 식용 목적의 사육·도살 및 유통 등 종식에 관한 특별법’(개 식용 종식법)을 통해 논의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인간의 친구’인 개와 소, 돼지, 닭, 물살이와 같은 동물이 동일한 이유로 식용 산업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 한들, 한 종에 대한 식용 산업이 종식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동물해방으로 가는 과도기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어야 한다. 

한 활동가는 개 식용 종식 후 개들이 어떻게 되는 것인지 구체적인 해결책이 제시되지 않는 것에 대한 불안을 이야기하곤 했다. 얼마 후 나는 그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마당 개’와 산에서 산책하던 도중 발견하게 된 개 농장 앞에서. 다섯 명(命)의 개가 갇힌 소규모 농장이었다. 산업이라고 하기엔 적은 수의 정체 모를 뜬장들이 그곳에 있었다. 다섯의 개들을 발견하고 지인들, 지인의 지인들, 동물이나 구조와 관련된 여러 단체에 문의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개들이 지낼 보호소에 자리가 없다는 답변이었다. 고작 다섯이었다. 다섯의 개들도 갈 곳이 없었다. 

뜬 장 속 개들. 혜리

뜬장에서 시보호소로 인계된 다섯의 개들은 청소하기 용이한, 개들의 습성과는 맞지 않는 바닥 위에서 지냈다. 그곳에는 다섯의 생명 외에도 많은 이들이 갇혀 있었다. 누군가 그들을 ‘구원’하지 않는다면 약물 죽임될 예정이었다. 한 활동가가 사비를 들여서라도 위탁소에 보내겠다고 했다. 한 달 위탁소 비용은 한 명당 몇십만 원에 달한다. 숨 쉬는 게 모두 돈이라는 것이 실감이 나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구조된 개들의 ‘유일한 희망’은 입양이다. 그러나, 이미 너무 많은 동물이 입양을 기다리고 있고, 한국을 넘어 해외까지 입양이 추진되고 있다. 해외 입양의 경우 한 명당 최소 백만 원의 비용이 드는 큰 프로젝트다. 

현재 ‘식용견’ 산업의 피해 동물들은 약 46만 명이다. 정부와 지자체에 신고된 수만 그렇다. 이 산업이 종식되는 과도기에 46만 명의 개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생산’된 ‘재고’까지 팔고 끝나는 것일까? 아니면 일단 뜬 장에서 꺼낸 후 ‘안락사’라는 약물 죽임을 시행할까? 46만 명의 사람들이 각각 1명씩 입양을 해야 할까? 모든 보호소가 포화 상태다. 입양할 여력이 있는 이들은 이미 동물을 돌보고 있다. 이렇게 개인에게 분배하고 책임지게 하는 방식으로 우리는 개 식용을 종식했다고 할 수 있을까?

산업의 피해 당사자에게 정의로운 전환을

1833년 영국에서 노예제폐지법(the Slavery Abolition Act)이 통과되고 보상을 받은 이는 노예가 아닌 ‘노예 소유주’였다. 그들이 정부로부터 받은 보상은 4만 6,000건에 이르렀고, 영국 정부는 약 3,000곳의 노예 소유주 가문이 입은 금전적 손실을, 당시 재무부 1년 지출예산의 40퍼센트에 달하는 거액으로 보상했다. 과거의 방법이 현재도 반복되고 있다. 

2027년 개 식용 전면 금지를 앞두고 6,000곳 가까운 개 사육 농장 폐업을 지원하기 위해 정부가 막대한 예산을 지원한다. 2025년 2월 6일까지 전·폐업하면 ‘마리당’ 60만 원을 지급, 이후로는 점점 줄어들어 2026년 9월에는 22만 5,000원을 지급한다. 인간 소유자는 ‘금전적 손실’에 대한 보상을 받지만, 이 산업의 ‘피해 당사자’인 개들의 미래는 구체적으로 논의되지 않는다.

사회 운동에 있어 자주 언급되는 말인 ‘정의로운 전환’. 한 산업이 끝난다는 것은 그 구조 속에 있는 무수히 많은 이들이 영향을 받는 일이다. 그러므로, 산업의 종식을 논하는 과정에 있어 이해관계로 연결된 이들의 삶 역시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 동물권도 마찬가지이다. 개 농장, 실험실, 동물원, 펫숍, 축사, 양식장이 문을 닫을 때, 정의는 ‘소유자’나 노동자에게 한정되어선 안 된다. 피해 생존자들을 모두 시설에 빽빽하게 가두는 것, 약물로 죽이는 것, 개를 흑염소로 대체하는 것은 정의로운 전환이 아니다.

개 다음은 염소. 염소 경매장의 모습. 혜리

동물 산업에서 정의로운 전환에 대해 고민할 때 우리는 무엇을 상상하고 제시할 수 있을까? 과도기에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피해 생존자를 죽을 때까지 돌보는 공간인 생추어리(Sanctuary)는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지만, 모든 동물을 시설에 가둬서 돌보는 것이 답이 될 수는 없다. 생추어리가 많아지는 것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2024년 4/4분기(12월 1일 기준) 가축 동향 조사 결과에 따르면, 사육되고 있는 동물의 수는 한·육우 347만 4천, 젖소 38만 1천, 돼지 1,084만 6천, 산란계 7,900만 3천, 육용계 8,897만 5천, 오리 715만 8천이다. 46만 개들의 정의로운 전환조차 어렵다면, 더 까마득한 수의 동물들의 정의는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도살장 앞 트럭. 혜리

정의로운 전환, 인식의 전환

동물해방의 길에서, 우리는 어떻게 정의로운 전환을 실현할 수 있을까? ‘안전한’ 울타리 안으로 동물을 가둘 것이 아니라, 울타리 밖에서 ‘섞여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장애인, 퀴어, 이주민이 사회 곳곳에서 차별 없이 살아가기 위한 권리는 비인간에도 확장되어야 한다.

장애가 있는 비인간, 이익이 되지 않은 비인간, 복종하지 않는 비인간, 통제되지 않는 비인간, 더러운 비인간, 귀엽지 않은 비인간, 시끄러운 비인간, 늙은 비인간, 떠돌이 비인간, 병이 있는 비인간, 발전을 방해하는 비인간, 인간에게 손해를 가져오는 비인간, 인간을 포식할 수 있는 비인간이 우리와 함께 살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내 공간, 내 안전, 내 이익이 침해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내가 안전한 것은 ‘위험한’ 존재들을 구제(驅除) 사업*이란 명목으로 제거해 왔기 때문이다. 

*해수구제사업(害獸驅除事業) : 근대 이후 맹수의 피해를 줄이기 위한 일환이었다. 해수구제의 움직임이 본격화한 것은 일제강점기였다. 특히 조선총독부는 호랑이와 표범은 물론이고 조류에 이르기까지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각종 동물을 해로운 짐승으로 보고 이를 제거하기 위한 목적으로 해수구제를 시행하였다. 이 사업은 시베리아호랑이와 아무르표범 등 한반도 내 대형 포식동물의 멸종에 결정적 원인이 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해수구제는 사람과 우마牛馬 그리고 농작물에 피해를 주는 호랑이, 표범, 늑대, 곰, 멧돼지, 사슴, 노루 등은 물론이고 조류까지 대상으로 삼았다. 1918년에 실시한 전선해수구제(全鮮害獸驅除)에서 포획한 동물은 범 19마리, 표범 73마리, 곰 332마리, 미상 197마리, 멧돼지 1,844마리, 사슴 79마리, 노루 4,232마리, 토끼 282마리, 기타 241마리였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 해수구제사업(害獸驅除事業)]

생태학적 관점으로

2011년 이스탄불. 혜리

2011년 튀르키예 곳곳에서 나는 편안하게 쉬는 개와 고양이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러한 모습들은 흔하게 SNS 공유되며, 튀르키예는 동물과 공존이 가능한 나라로 그려지곤 했다. 그러나 작년, 의회가 길 잃은 개를 거리에서 없애는 것을 목표로 하는 법안을 승인했다. 사람들은 이 법안을 ‘대량 학살법’이라 반발했다. ‘대량 학살’의 근거에는 광견병의 확산과 사람에 대한 피해가 있었다. 한때, 튀르키예가 얼마나 개와 고양이에게 관대했건 결국, 우리가 동물을 대하는 근본적인 시각이 바뀌어야 ‘공존’이라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그 근본적인 변화는 ‘인간의 삶을 생태학적 관점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페미니스트 생태학자 발 플럼우드는 인간이 스스로를 다른 생명체와 다르고 더 우월한 존재로 만듦으로써, 우리를 불쾌하거나 불편하게, 혹은 위험하게 만드는 동물을 제거해 왔다고 지적했다. 인간은 생태학적 관점에서 다른 동물의 ‘먹이’임에도, 해수 구제와 같은 방법을 동원해 포식자를 제거해 왔다. 포식 경험이 부재한 우리는, 우리가 먹이라는 것을 부정했고, 인간을 잡아먹는 포식은 괴물 같은 것으로, 보복의 대상이 되었다. 인간이 ‘먹이이자 살로서 동물적 질서에 포함된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동물이 감히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일은 용납될 수 없다. 

비인간 포식자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일을 우리 사회가 과연 할 수 있을까? 인간을 해칠 수 있는 동물들이 쏟아져 나오는 세상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인간에게 해가 된다는 이유로 거리에서, 산에서, 바다에서, 각자의 집에서 끌려 나와 총으로, 전기로, 약물로, 분쇄기로 죽임당하는 세상이라면 우리가 광장에서 외치는 슬로건들은 판타지로만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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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및 인용

서울신문, <식용견 마리당 최대 60만원 보상… “안락사 계획 없어”>

한겨레, <차등 지원으로 “‘개식용’ 조기 종식”…46만마리는 어디로>

포인트경제, <터키, 유기견 없애려 '대량 학살법' 승인...미이행 시장은 최대 2년 징역형>

염운옥, 『낙인찍힌 몸』

발 플럼우드, 『악어의 눈』

덧붙이는 말

혜리는 새벽이생추어리 활동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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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권 정의로운 전환 동물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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