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윤길중]
장애인 이동권 투쟁
명숙(인권운동사랑방 상임 활동가. 인권운동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형, 오이도역에서 장애인이 또 추락했대. 빨리가 봐.”
2001년 1월 22일 새벽, 노들장애인야학 교장 박경석은 택시 운전을 하던 후배 김종환에게 연락을 받았다. 또 이런 일이! 전화 한 통에 잠이 확 깼다. 혼자 오이도역에 갔더니 경찰은 이미 폴리스라인을 쳐 놓고 접근을 막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해서 역장에게 물어봐도 제대로 답변해 주지 않았다. 기계 결함이라고 하면서도 설치한 지 6개월밖에 안 된 수직형 리프트가 왜 고장을 일으켰는지 잘 설명하지 않았다. 장애인은 지하철을 타기도 힘들지만 설사 타더라도 위험했다. 1988년 장애인 올림픽을 앞두고 정부가 서둘러 리프트를 도입했지만 안전하지 않아 사고가 잦았다. 1996년 ‘장애인편의시설촉진시민연대’가 만들어지고 장애인의 편의 시설과 이동권 확보를 위해 노력했으나 큰 변화가 없었다.
노들장애인야학은 학생 이규식이 1999년 혜화역 리프트에서 떨어져 전치 4주의 상해를 입자 소송을 해서 손해 배상금도 받고 혜화역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게 만든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서울지하철공사의 공식적 사과나 사고 방지를 위한 다른 계획은 없었다. 장애인들이 수업을 들으러 학교에 가는 것은 쉽지도 않을뿐더러 위험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차에 학생들을 태우며 돌아다니는 일을 계속 할 수도 없었다. 장애인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으려면 대중적인 이동 수단이 있어야 한다. 이동권은 이동만의 문제가 아니라 교육권이기도 하고 탈시설과도 연결된 권리였다. 게다가 이대로 계속 죽고 다치도록 손 놓고 있을 수 없지 않은가.
정부와 서울지하철공사는 오이도역 사고와 관련해 보상금을 지급하며 무마하려 했다. 경사형 리프트에서 급하게 만든 수직형 리프트의 문제라며 서둘러 정리하고 덮으려 했다. 수직형 리프트는 관리 책임자나 안전 기준도 정해 놓지 않아 법적으로 책임을 물을 곳이 없었다. 이에 노들장애인야학, 장애인편의시설촉진시민연대, 장애인실업자연대, 서울DPI, 서울지체장애인협회는 철도청, 보건복지부, 산업자원부를 항의 방문하고 2001년 1월 31일 ‘오이도역장애인수직형리프트추락참사대책위원회(오이도역대책위)’를 구성했다.
최초의 선로 점거 투쟁
“가만히 있으면 미쳐 뒤지겠다 싶어서 선로 투쟁을 해야겠다 생각했어요. 그래서 당시 노들야학 상근을 시작한 도현이와 선로 점거를 위해 살피러 갔어요. 전 장애인이라 지하철을 이용한 경험이 별로 없으니까 걱정도 되고 혹시 잘못해서 치이면 이동권이고 뭐고 다 망하는 거니까. 지하철이 오는 간격이 3분, 5분. 가만 보니 지하철은 맨 앞 선에서 멈추더라고요. 아, 저 앞을 점거하면 사고는 안 나겠구나 싶었지요. 그래서 회의에 가서 제안을 했어요.”
박경석의 말이다. 당시 서울역은 엘리베이터도 있었고 서울지하철공사 관할이고 시청과 가깝기도 했으니 안성맞춤이었다. 2001년 2월 6일 서울역 집회를 마치고 장애인 50여 명이 선로를 점거했다. 경찰도 이런 일이 처음이라 무방비 상태였다. 전철이 멈추자 일부 승객들은 심하게 항의했다. 어떤 할아버지는 “선진국에서는 이렇게 안 한다. 병신 육갑한다”고 욕을 하기도 했다. 장애인들도 지하철을 탈 권리가 있다고 외치며 1시간을 버티다 경찰에게 끌려 나왔다. 그렇게 욕을 한 노인들도 장애인들의 투쟁으로 지금은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편하게 지하철을 탈 수 있게 됐다.
선로 점거로 사회적 관심은 받았지만 변한 건 없었다. 선로 점거라는 사건이 정치가 되기 위해서는 좀 더 단단하고 지속적인 물음이 필요했나 보다. 그해 4월 20일 ‘장애인이동권쟁취를위한연대회의(이동권연대)’를 만들었다. 지하철 엘리베이터 설치, 저상 버스 도입, 장애인 콜택시와 같은 특별 교통수단 확보 등을 목표로 긴 싸움을 시작했다.
쟁취냐 확보냐
이동권연대의 명칭을 확정하는 데 몇 시간의 논쟁이 있었다.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운동 사회의 분위기는 달라졌다. 장애인운동에서도 캠페인성의 활동으로 정부 정책을 끌어내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장애인운동의 급진성, 현장성을 회복하는 게 이번 싸움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한 박경석에게는 작은 것 하나하나가 중요했다.
“이동권 ‘쟁취’를 위한 연대냐 ‘확보’를 위한 연대냐, 단어 하나로 몇 시간을 논쟁했어요. 지금이라면 이런 논쟁을 하지 않았을 텐데. 당시엔 너무 중요해서 물러설 수 없었어요. 마치 사상 논쟁처럼 붙었어요. 장애인운동은 우리만의 요구와 방식이 있는 건데 마치 1980년대 반독재운동 방식인 양 여겼어요. 급진적 투쟁을 한물간 방식으로 여기기도 하고. 결국 한 표 차이로 ‘쟁취’로 결정됐지요.”
단어 하나에 싸움의 방식과 내용이 결정될 수 있다고 여길 정도로 당시 장애인운동에서 대중 투쟁은 사라지고 있었다. 그 후 이동권연대는 서울역 광장 천막 농성, 버스 타기 운동, 이동권 촉구 백만인 서명 운동을 했다. 장애인도 버스를 타자는 투쟁은 버스를 탈 수 없는 환경에서 그 자체가 투쟁이었다. 버스를 점거하거나 막거나 했다. 2001년 7월부터 2005년 1월까지 총 41회를 했다. 재정이 없어 배지 판매로 투쟁 기금을 만들었는데 배지가 하루에 100만 원어치 팔릴 정도로 호응이 좋았다. 무엇보다 시민 사회의 참여가 적극적이었다. 7개 단체로 시작했는데 2005년 말에는 35개 단체가 넘었다. 그동안 장애 의제에 이렇게 적극적으로 결합한 적은 없었다. 선로 점거와 버스 점거라는 사건이 던진 물음에 대한 응답이 이렇게 나타났다. 당시 이동권연대의 사무국 역할을 맡았던 김도현은 이렇게 말한다.
“천막 농성을 하면서 이 싸움은 되겠다 싶었어요. 연대 회의에 온 사람들이 그냥 회의만 하고 가는 게 아니라 실무를 맡아서 적극적으로 하는 거예요. 아마 투쟁다운 투쟁을 하고 싶은 사람들이 신나서 결합한 게 아닐까요.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 운동 사회가 정부 친화적으로 바뀌면서 투쟁 양상도 많이 바뀌었는데 그걸 뒤집는 싸움이었으니까.”
당사자들의 절박함과 시대 흐름을 변화시키는 기운은 사람들을 끌어당긴다. 선로에서 장애인들의 외침이 담고 있었던 건 그게 아닐까. 당시 노들장애인야학의 학생이었던 중증 장애인 이명학 씨가 직장에 휴가를 내고 버스 타기 운동에 함께했던 것도 그 때문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