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주현 〈참소리〉 기자
“오후만 되면 미군 비행기가 부대 쪽으로 와서 기관총으로 사격하고 폭탄도 떨어트리고 끔찍했어요.”
해방을 코앞에 둔 1945년 봄. 경기도 시흥의 일본군 훈련소에 강제 징병된 스무 살 청년에게 그해 봄은 ‘지옥’이었다. 일제로부터의 해방은 상상하기 힘든 현실, 생존만이 유일한 목표였다. 폭격에 대비해 일본군은 조선 징병자들에게 방공호를 만들게 했다. 매일 폭격이 있었고 매일 땅을 팠다. 이 일에는 시흥 인근 주민들도 동원됐다.
일제 치하에서 징집되었기에 조선 청년의 신분은 일본군이었다. 그러나 말만 군인이었을 뿐이다. 그 자신이 ‘군인’이라고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은 오전 내내 구토가 나올 정도로 고통스러웠던 행군과 군사 훈련 때뿐이었다. 오후에는 어김없이 중노동에 시달렸다. 나라 없는 설움을 느끼는 것도 사치였다.
“조선 사람은 그냥 무조건 죽일 놈이었어요. 욕하고 때리고 차별은 말할 것도 없지. 군인이 아니라 노예였어요. 조센징이라며 노예 취급을 했지요. 군인이 영양실조로 죽는 것을 상상할 수 있어요? 보리밥 한 덩이에 단무지로 버티게 했어요. 영양실조로 죽은 동료들도 많았어요.”
일제의 패망으로 맞이한 해방, 조선 청년은 ‘살았구나, 이제야 벗어날 수 있구나’라는 마음에 기뻐했다. 강제로 끌려간 청년이 돌아온 고향에서 사람들도 큰 고생 했다며 위로의 말들을 건넸다.
“1965년 한일 굴욕 외교의 피해자, 국내 강제 동원자”
일본군 강제 징병에서 살아 온 조선 청년은 이제 93세가 됐다. 벌써 70년이 흘렀지만, 당시의 고생과 아픔은 제대로 치유되지 않았다. 영양실조로 죽어간 동료와 가난으로 강원도와 함경도 등 국내 탄광지로 끌려갔다가 살아 돌아온 동향 사람들의 한(恨)도 마찬가지.
김영환 씨는 전북 군산시 회현면에서 살다가 징병된 당시의 기억을 꺼내면 분노와 원망에 울컥한다. 과거에는 분노의 화살이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 일본에만 향했다면, 지금은 한국 정부에도 똑같은 화살을 겨누고 있다. 그 분노의 뿌리는 196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 정부의 굴욕 외교로 지금도 회자되고 있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 그 협정에 앞서 진행한 청구권 소위원회 회담 내용이 지난 2005년 처음 공개됐다. 김 씨를 비롯한 국내 징용자들이 재판을 통해 얻어 낸 결과였다. 비공개로 진행된 회담에서 일본은 ‘보상’이라는 개념을 인정하지 않고, ‘경제 협력 기금’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50년이 지난 현재의 위안부 협상과 같은 태도이다.
이 협상에서 한국 측은 보상의 범위를 국외 징용자로 한정한다. 김영환 씨를 비롯한 국내 강제 징용자들은 이런 사실을 40년이 지나서야 알게 된 것이다.
이 협정을 근거로 1975년부터 1977년까지 진행된 보상 사실도 뒤늦게 알았다. “한일 협정 당시에는 정부가 그것을 공포하지 않았잖아요. 그래서 알 수가 없었죠. 보상 내역이 그 안에 들어있는지도 몰라서 가만히 있었죠.” 7차 소위원회 회담 내용을 조금 더 살펴보면 한국 측의 입장을 살필 수 있다.
제6차 한일 회담 일반 청구권 소위원회 7차 회의 (1961년 12월 15일)
한국 측 제5항의 4는 한국인 피징용자에 대한 보상금인데 이것은 과거 일본에 강제 징용된 한국인이 징용으로 말미암아 입은 피해에 대하여 보상을 청구하는 것이다.
오시오까(일본 측 위원) : 조선에서 징용된 자도 포함하는가?
이상덕(한국 측 위원) : 포함되어 있지 않다.
오시오까 : 군인, 군속도 그런가?
이상덕 : 그렇다.
우타베(일본 측 위원) : 조선에서 징용된 자를 포함하지 않은 것은 무슨 이유인가?
이상덕 : 한국 내에는 실제 그 수가 그리 많지 않았고, 또 자료도 불충분하여 포함하지 않았다.
“(관련 법률에 따른 각종 지원은) 태평양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일제에 강제 동원으로 피해를 입은 자가 입은 고통을 치유하기 위한 시혜적 조치로 입법자가 목적과 현황, 국가 재정 능력 등을 고려해 구체적 내용을 형성할 수 있는 재량이 인정된다 할 것이다.”
“살피건대, 국외로 강제 동원되는 경우 가족과 유리되어 낯선 이국땅에서 겪을 정신적, 육체적 고통과 괴로움이 국내로 강제 동원되는 경우보다 더욱 클 것이라는 점은 합리적인 추정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국외’ 강제 동원자로 제한한 것이 입법 재량의 범위를 넘는 자의적 차별이라고 볼 수는 없는 바, 이 사건 법률 조항이 헌법상 평등권을 침해했다는 청구인의 주장은 이유 없다.”
국가가 지켜 주지 못한 피해자였다. 국가는 그 피해자들을 자료 부족과 수가 적다는 이유로 배제했다. 그러나 그 이유는 사실에 기초한 것도 아니었다. ‘일제강점하강제동원 진상규명위원회(진상규명위원회)’에 따르면 2012년 기준 국내 강제 동원 피해자들은 모두 2만 3514명으로 추정된다. 국외 강제 동원 피해자들의 10분의 1에 불과하지만 결코 적은 수라고 할 수 없다. 1960년대 청구권 협정 당시에는 국내·외 강제 동원 피해자들이 100만 명에 육박할 것이라고 예상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당시 한국 측이 국내 강제 동원 피해자들을 보상에서 제외한 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도 똑같은 강제 동원 피해자인데, 왜 우리는 차별하나?”
한국 정부는 지난 2007년 12월 〈태평양전쟁전후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에관한법률〉이 제정되고 나서 국외 강제 동원 피해자들을 지원하고 나섰다. 그에 앞서 진상규명위원회가 진행한 조사에서 국내 강제 동원 피해자로 결정받은 김 씨는 처음으로 의문을 제기했다. “왜 똑같은 강제 동원 피해자인데, 국외와 국내 구분을 두는가요?”
법의 지원 대상이 국외 피해자로 한정되면서 김 씨를 비롯한 국내 강제 동원 피해자들은 정부로부터 어떤 위로도 받지 못했다. 광복 이후 고향 사람들의 ‘고생했다’는 말이 김 씨가 강제 동원에서 벗어나고 받은 처음이자 마지막 위로가 되었다. 김 씨는 한국 정부가 그 위로를 하지 않는 이유를 바로 1965년 협정 때문으로 보고 있다.
“일본과 만주 탄광에서 죽으면 보상금(정부의 표현은 위로금이다)을 주고, 함경도와 강원도 탄광에서 죽은 사람들은 보상금을 못 받아요. 왜 일제 강제 동원자들은 다 똑같은데 차별을 합니까? 무엇이 다릅니까. 그 당시 (한반도가) 한국 땅이었습니까? 다 같은 일본 식민지였는데 그게 어떻게 국내·국외로 구분됩니까?”
김영환 씨는 한국 정부를 상대로 보상과 관련해 소송을 제기했다. 국내 강제 동원 피해자에게도 국외 피해자들에게 지급되는 연 80만 원의 의료 지원금을 지급해 달라는 신청에 대한 정부의 기각 결정을 취소해 달라는 소송이다. 지난해 10월 1심과 지난 4월 2심에서 모두 패소했다. 소송에 들어간 비용도 모두 김 씨의 몫이 됐다.
손수 자료를 찾아 가며 소송 이유서를 쓰고 진행한 법정 싸움은 헌법재판소까지 포함하면 벌써 8년째다. 헌법재판소를 포함해 세 번의 재판. 그는 모두 패소했다. 지난 4월 25일 항소심 패소는 그에게 큰 충격을 줬다. “몸에도 한계가 오고 재판장에서 문제를 호소하는데 들어 주지도 않고 지속을 못 하겠어요.” 밤마다 불면증으로 신경 안정제를 먹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난 2009년 헌법재판소는 김 씨의 소송에 앞서 국내 강제 동원 피해자 박 모 씨가 낸 헌법 소원에서 6(합헌) 대 3(위헌) 의견으로 국외 강제 동원 피해자들만 보상하는 법률이 합헌이라고 결정한 바 있다. 헌재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국내 강제 동원 피해자를 배제한 법률의 정당성을 인정했다.
“국내 강제 동원자들도 이제 죽는 날만 기다리는 사람들이에요. 이웃인 95세 오 모 씨는 함경남도 탄광에서 월급도 못 받고 알몸으로 돌아와 겨우 살아 숨 쉬고 있어요.” 오 모 씨는 지난 2011년 5월 KBS 1TV 〈시청자 칼럼 우리 사는 세상〉에 출연해 “함경도 탄광에 2000명이 끌려갔는데, 1년 3개월 만에 500명이 살아 돌아왔어요”라고 증언했다. 강제 동원된 장소가 국내였다고 해서 그 고통과 괴로움이 결코 적지 않다는 것이다.
김 씨는 “함경남도 청진의 경우에는 소련군이 들어와서 많은 군인들(강제 징병된 조선 청년들)이 죽었다고 해요. 포로로 잡힌 사람만 당시 약 2000명이었다고 해요. 저와 함께 대응했었던 서울 사람은 3개월 만에 겨우 살아서 왔다고 해요. 영양실조로 죽은 사람들도 상당했어요”라며 강제 징병 군인들의 처지에 대해 말을 보탰다.
2011년 5월 KBS 〈시청자 칼럼 우리 사는 세상〉에 나올 당시 김 씨는 6명의 출연자 중 한 사람이었다. 6명의 국내 강제 동원 피해자들은 김 씨의 집 거실에서 KBS와 인터뷰를 나눴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현재, 김 씨는 거실에서 홀로 기자에게 국내 강제 동원 피해자들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어떤 이는 요양원에 가 있고, 어떤 이는 군산시청에서 고용한 요양사의 도움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 억울함을 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