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1970~90년대 한국 경제 성장과 세계화의 선두에 있었던 대표적인 기업가다. 그의 경영방식은 공격적인 세계화 전략과 독특한 노무관리 방식으로 유명하다. 2019년 고인이 되었다. 그런 그가 ‘모던인물史미스터리’라는 프로그램으로 소환되었다. 김우중은 노동자에게 어떤 인물인가.
1985년 대우자동차 투쟁. 출처: 노동자역사 한내
24시간 불이 켜진 대우빌딩
대우그룹의 사훈은 “창조, 도전, 희생”이었다. 김우중 회장이 쓴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책은 베스트셀러에 오를 만큼 유명했다. 특히 김 회장의 경영방식은 차별화된 노무관리와 세계화로 세간의 관심을 받기도 했다.
대우그룹은 능력과 성과를 우선하는 평가시스템을 도입했다. 노동자의 나이나 근속 연수보다는 실적을 바탕으로 승진과 보상을 결정해 고성과자에게 파격적인 보상을 제공했다. 승진 기회가 상대적으로 열려 있어 젊은이들이 빠르게 고위직으로 승진할 수 있는 조건을 확보하기도 했다. 현장 노동자들에게도 기능사 시험을 통해 경쟁을 유도하며 기사-기장-기성의 꿈을 제시하기도 했다. 합리적인 듯 보이는 이러한 노무관리는 노동자의 고혈을 짜냈다. 장시간 근무는 기본이고 성과 중심의 압박이 높아 직원들의 피로도가 심했다. 성과주의는 저성과자의 몫이 고성과자에게 배분됨으로써 차별이 심화하기도 했다. “24시간 불이 켜진 대우빌딩”이라는 유행어는 인사정책으로 인해 생존경쟁에 놓였던 당시 형국을 표현하는 말이다. 김우중은 신자유주의 노무관리 전파자였다.
대우 맨, 김우중 맨 만들기
대우그룹 마크는 오대양 육대주를 상징한다. 이는 김 회장의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상징적 말과 통한다. 그는 해외 주재원 파견을 확대했다. 또 충성심을 유발하여 임직원들이 ‘대우 맨’, ‘김우중 맨’이 되도록 했다. 해외 근무는 자연스럽게 ‘김우중 맨’이 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김 회장은 직원들에게 도전과 희생정신을 요구했으며, 이를 통해 강한 기업 문화를 만들었다.
김 회장 자신도 365일 중 200일을 해외에 체류하며 세계 경영에 매진했다. 각국 정상들과 친분을 쌓은 것은 물론, 리비아의 카다피와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북한의 김일성 등과도 경제적 교류를 이어가며 세계인에게 주목받았다. 김우중 회장은 자본의 세계화에 초석을 다진 셈이다.
제일은행장 들어오라고 해
언론은 재계 순위 2위까지 치고 올라간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을 자수성가의 전형으로 미화하기도 하지만, 대우그룹 성장을 말할 때 정치권력의 지원을 빼놓을 수 없다.
박정희가 존경했던 인물 중 한 사람이 대구사범학교 스승인 김용하다. 이 사람이 바로 김우중의 아버지다. 박정희와 김우중이 만난 것은 1967년이었다. 당시 김우중은 공장 인수자금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각하, 이번에 수출 전진기지로 공장을 인수해야 하는데 수출금융으로 좀 도와주십시오.” 박정희는 그 자리에서 비서를 불러 세웠다. “어이! 김 비서, 제일은행장 들어오라고 해.”
김우중의 그룹과 세계화 경영은 박정희로부터 시작됐다. 대우가 스스로 창립한 회사는 대우실업(보세의류가공)이었고, 나머지는 대부분 인수한 기업들이었다. 자동차, 조선, 전자, 건설, 증권 등 41개 사업체를 인수하고 396개 해외법인으로 대우그룹을 만들었다. 사업체 인수 역시 박정희 정권의 뒷배로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회장님의 축구 사랑과 파업 방해
대우가 인수한 사업장 대부분에는 이미 노조가 있었다. 김우중은 노동조합과의 갈등을 최소화하는 노사관계를 지향한다고 했지만, 노동조합과 김우중은 철학부터 달랐다. 김우중 회장은 축구 광팬으로 알려져 있다. 계열사 사장들은 축구팀을 만들어 운영했고, 매년 그룹 차원의 축구대회가 열리곤 했다. 사장들은 회장에게 눈도장을 찍기 위해 강한 축구팀을 만들어야 했기에 프로팀, 대학팀을 돌며 선수들을 선발했다. 축구팀은 계열사 축구대회를 위한 준비에 전념했고 총무부 소속으로 자질구레한 일을 하기도 했다. 노동자에게 축구팀은 어떤 존재였을까. 노동조합이 투쟁하거나 파업하면 이들이 등장해 투쟁을 방해했다. 일종의 구사대다. 이후에도 대우조선 구사대 ‘상록회’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김우중 회장의 노조와 갈등을 최소화한다는 주장은 말뿐이었다.
운동권 대거 특채의 속내
김우중은 1992년 10월 경제 대통령이 되겠다는 꿈을 안고 대선 출마를 준비한다. 하지만 당시 노태우 정권이 반대하며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진행하자 그룹 내부에서도 출마 포기 요구가 거셌고 즉시 출마를 포기했다. 이미 그해 3월 김우중은 ‘정치지도자 양성학교’를 세우겠다는 계획을 발표하며 기업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정치를 꿈꿔왔다.
그 연장선에서 1995년 김 회장은 ‘운동권 특별채용’이라는 획기적인 인사를 단행한다. 그는 학생운동, 노동운동 활동가 100여 명을 직접 면접했다. 대부분 서울대 출신으로 노동운동 경력이 있거나 학생회, 동아리 활동을 했던 이들이다. 운동하면서 익힌 지도력과 추진력이 기업에도 절실하고 이른바 ‘품성론’이 몸에 배 융화를 잘한다는 것이 특채 이유이자 기대하는 바였다. 보수세력은 이런 행태를 비판하기도 했지만, 김우중 회장이 개의치 않고 독특한 행보를 보인 까닭은 정치진출의 꿈과 연결된다고 봐야 할 것이다.
대우그룹에 특채된 운동권들은 입사 직후 전 세계를 도는 연수에 참여했고 이후 기꺼이 김우중의 친위대가 됐다. 대우그룹이 망한 뒤에도 노동조합을 탄압하는 컨설팅 회사 등에 몸담으며 복수노조를 활용하여 노동조합 해체에 열을 올리기도 했다.
대우그룹이 IMF 외환위기의 여파로 해체되자 김우중은 해외로 잠적, 경영 비리 혐의로 인터폴 적색 수배자가 된 지 5년 8개월 만에 돌연 귀국한다. 공항에는 김우중의 친위대인 운동권들이 김우중을 환영하는 충성심을 보이기도 했다. 이 중에는 필자가 아는 몇 명도 있었다.
대우그룹의 몰락
대우그룹은 외형 확장의 대가로 막대한 부채와 분식회계를 쌓아가다가 1997년 외환위기가 발발하면서 자금난에 봉착했다. 국가신용등급이 하락하면서 해외 채권자들이 자금을 회수하라고 압박했고, 금융당국도 기업어음과 회사채 발행을 제한했다. 이 과정에서 대우그룹의 부채 비율이 400%가 넘는 것으로 밝혀졌다. 대우그룹은 결국 해체되었다. 세계화는 신화가 아니었고, 노동자에게 있어서는 거대한 착취의 다른 말이었다. 김우중이 내뺀 자리에는 또 다른 이름의 세계화가 진주했고, 언제나 그 후과를 감당하는 것은 세계화를 감각하기엔 ‘폭싹 속아버린’ 보통의 노동자들이었다.
(양규헌은 대우전자부품노조 위원장으로 활동하다 해고되었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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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규헌은 노동자역사 한내의 대표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