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Unsplash+, Curated Lifestyle
브레턴우즈 체제는 미국 달러를 세계 준비통화로 제도화했다. 미국은 외국 정부와 중앙은행을 상대로 금 1온스당 35달러라는 고정가격에 금을 사고팔겠다고 약속했다. 달러가 준비통화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이 달러를 금으로 바꾸기 위해 한꺼번에 몰려들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다시 말해 금으로 환산한 달러 가치가 안정적일 것이라는 기대에 기반하고 있었다. 이러한 기대는 다시 상품으로 환산한 달러 가치 역시 단기적인 변동은 있더라도 장기적으로는 안정적일 것이라는 전망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이런 믿음이 유지되는 동안 미국은 원하는 만큼 지출할 수 있었다. 세계 각국이 언제든 달러와 달러 표시 자산을 보유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이 확대된 뒤 미국에서 인플레이션이 심해지면서 이러한 기대가 무너졌고, 결국 브레턴우즈 체제도 붕괴했다.
하지만 과도기를 거친 뒤 달러는 다시 지배적인 위치를 되찾았다. 달러를 더 이상 고정가격에 금으로 바꿀 수는 없었지만, 사실상의 세계화폐 역할을 다시 맡기 시작했다. 세계 무역, 무엇보다 석유 거래에서 달러를 광범위하게 결제수단으로 사용하고, 그 결과 달러를 자산 보유 수단으로도 활용하게 된 것은 달러의 가치가 세계의 각종 상품에 비해 안정적일 것이라는 기대에 기반하고 있었다. 이 역할은 자연스럽게 미국에 특별한 이점을 안겨주었다. 미국은 세계 다른 나라들로부터 돈을 빌려 원하는 만큼 지출할 수 있었다. 오랫동안 세계 각국은 이런 미국의 특권을 사실상 “그럴 수도 있다”는 식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미국은 세계 각국이 달러와 달러 표시 자산을 보유한다는 사실을 이용해 자국의 요구를 강요하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달러의 역할은 무기화됐다. 그 순간 달러는 미국에 경제적 이익을 안겨주는 준비통화에 그치지 않고, 다른 나라를 압박하기 위해 극도로 냉소적으로 사용하는 위험하고 강력한 수단으로 변했다.
이런 일은 1979년 처음 벌어졌다. 이른바 ‘인질 사태(hostage crisis)’가 발생한 뒤 지미 카터 대통령은 120억 달러 규모의 이란 자산을 압류했다. 완전히 몰수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않았지만 자산 사용을 막았다. 이는 명백한 국제적 약탈 행위였으며, 이후에도 이런 일은 수없이 반복됐다. 세계 여러 나라가 미국 통화 형태로 자산을 보유한다고 해서 미국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그 자산을 압류할 법적·도덕적 권리를 갖는 것은 아니다. 한 나라 안에서 통용되는 화폐가 중앙은행의 부채라고 해서 정부나 중앙은행이 누구의 현금 자산이든 임의로 압류할 권리를 갖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하지만 미국은 모든 달러 거래가 어디에서 이뤄지든, 미국 국내이든 해외이든 이른바 미국의 ‘환거래은행’을 거쳐야 한다는 점을 이용해 외국의 달러 자산을 동결할 권리를 스스로 차지했다. 그리고 이렇게 정당성 없이 확보한 영향력을 이용해 다른 나라가 미국의 요구에 따르도록 압박해 왔다.
요컨대 달러는 이제 노골적으로 미국 제국주의의 도구가 됐다. 미국이 어떤 나라와 대립하게 되면 유엔의 승인을 받지 않은 일방적 제재를 그 나라에 가하고, ‘환거래은행’ 체계를 이용해 해당 국가의 달러 자산을 동결한다. 최근 이런 조치를 받은 나라 가운데 하나가 러시아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둘러싸고 미국과 유럽연합이 러시아에 제재를 가하면서 러시아의 외환보유액 가운데 약 3,000억 달러를 동결했다. 마찬가지로 이란이 보유한 1,000억~1,500억 달러 규모의 외환보유액도 미국이 동결했다. 미국은 이스라엘과 함께 이란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란의 외환보유액 대부분은 미국 밖 은행들, 그중에서도 인도와 중국에 있는 은행들에 보관돼 있었다.
이처럼 달러가 준비통화에서 미국의 뜻을 거스르는 나라를 겨냥하는 노골적인 미국 제국주의의 무기로 변하면서 ‘탈달러화’를 요구하는 목소리에도 긴박감이 더해졌다. 최근 뉴델리에서 열린 브릭스 정상회의에서도 이런 분위기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러시아와 중국, 이란은 각기 강조하는 부분과 강도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미국의 일방적 제재 체제에 맞서야 하며 새로운 무역·금융 체제가 필요하다는 점을 주요 의제로 내세웠다. 이런 맥락에서 브릭스 회원국 간 무역에 각국의 자국 통화를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고, 회원국들은 역내 무역 규모도 크게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이는 단지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에 더 유리한 ‘더 공정한’ 체제를 만들자는 요구에 그치지 않았다. 미국의 노선을 따르지 않는 국가에 미국이 일방적으로 제재를 가하고 해당 국가의 달러 자산까지 동결하는 상황에서 벗어나자는 목적을 훨씬 더 분명하게 담고 있었다. 인도는 브릭스 역내 무역을 확대하고 자국 통화를 더 많이 사용해야 한다는 점에는 대체로 동의했지만, 안타깝게도 달러 자산 동결에 반대하는 문제에서는 침묵했다.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국민민주동맹(NDA) 정부 아래의 인도는 유엔이 승인하지 않은 일방적 제재에 반대하면서도 제재 대상국의 달러 자산을 미국이 압류하는 문제를 공개적으로 비판하지 않는다. 인도 외무장관은 심지어 ‘탈달러화’에 반대한다는 입장까지 밝혔다.
물론 브릭스 역내 무역에서 자국 통화를 사용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여러 통화를 이용해 무역을 하려면 투기를 막기 위해 회원국 통화 사이의 환율을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안정성을 장기간 유지하려면 국제수지 적자와 흑자를 조정하는 방식부터 지금의 국제 체제와 달라야 한다. 현재 국제 체제에서는 무역 불균형을 없애기 위해 적자국이 경제활동 수준을 낮추는 방식으로 조정을 강요받는다. 그 결과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들이 ‘긴축’을 떠맡는다. 훨씬 더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방식은 흑자국이 조정 부담을 지도록 하는 것이다. 흑자국의 국내 수요가 늘어나면 무역 흑자가 줄어들고, 그에 따라 적자국의 무역 적자도 감소한다. 따라서 자국 통화를 사용해 브릭스 역내 무역을 확대하려면 현재의 국제 체제와는 다른 ‘게임의 규칙’이 필요하다. 단순히 자국 통화를 더 많이 사용하기만 한다면, 오늘날 국제 무역·결제 체제가 안고 있는 모순을 브릭스 내부에서 그대로 되풀이하게 된다.
인도가 독립 이후 수십 년 동안 소련과 맺었던 양자 무역협정을 다시 살펴보고, 이를 오늘날 참고할 모델로 삼을 필요가 있다. 당시 무역은 양국의 공기업이 주로 담당했다. 오늘날에도 이런 방식을 상당한 규모로 활용한다면 원칙적으로 통화 투기의 여지를 줄일 수 있다. 또한 당시에는 결제하지 못한 흑자와 적자를 다음 시기로 이월했는데, 이는 흑자국이 적자국에 자동으로 신용을 제공하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냈다. 그리고 양국이 적절한 구매를 통해 시간이 지나면서 흑자와 적자를 해소했기 때문에 적자국 혼자 적자를 줄이려고 ‘긴축’을 시행해야 하는 문제도 생기지 않았다. 따라서 인도-소련 무역협정은 오늘날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이 현행 국제 체제에서 겪는 문제에 시달리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브릭스 역내에서 자국 통화를 이용한 무역을 확대하려면 우선 회원국들이 인도-소련 양자 무역협정과 비슷한 형태의 양자 협정을 맺는 방식으로 시작할 수 있다.
브릭스 정상회의에서는 자국 통화를 이용해 역내 무역을 확대하자는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이렇게 하면 브릭스 역내 무역에서 달러가 결제수단으로 차지하는 역할을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효과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실제로 시행할 때 생기는 문제는 거의 논의하지 않았다. 이는 브릭스가 세계무대에서 의미 있는 세력으로 자리 잡기까지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이다. 실제로 브릭스 내부에는 제국주의에 우호적인 국가들도 존재하는 등 구성 자체가 매우 이질적이기 때문에, 과연 끝까지 그 길을 갈 수 있을지조차 여전히 미지수다.
[출처] The Weaponisation of The Dollar
[번역] 이꽃맘
- 덧붙이는 말
-
프라바트 파트나익(Prabhat Patnaik)은 인도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이자 정치 평론가다. 그는 1974년부터 2010년 은퇴할 때까지 뉴델리의 자와할랄 네루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경제 연구 및 계획 센터에 몸담았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