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엇갈리기 마련이다. 더구나 기록도 일관되지 않았다. 조선공산당 2차 당 대회가 그렇다. 우선 일제 관헌이 자료에는 당 대회 장소가 서대문형무소밖 독립문 부근 (김준연등 32인 예심종결결정), 서대문 형무소 부근 (김준연등 28인 판결문), 혹은 천연동 (김철수 신문조서 3회) 으로 기록되었다. 일반적으로 사건장소가 주소까지 특정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회의장소가 특정되지 않고 있다.
아직 여름의 기운이 다 가시지 않은 1926년 9월 3일 정오의 기온은 24.6도였다. 삼선평으로 넘어가기 위해 지나야 하는 혜화문 부근 산속에 은밀하게 세 명의 사내가 모였다. 그 사내들의 이름은 김철수, 원우관, 신동호였다. 이들은 이곳에 모인 이유는 조선공산당의 중앙집행위원회 재건을 위해서였다.
아마도 김재봉은 일제경찰의 허를 찌르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 같다. 그가 몸을 숨기기로 결정한 곳은 도심의 한복판, 그것도 유흥지구이기에 유동인구가 많아서 낯선 이가 돌아다녀도 의심을 받지 않을 곳이면서 조직과 연루된 사람이 아닌 의외의 인물의 집을 선택한 것이다. 낙원동 195번지에 몸을 의탁한 곳은 김미산의 집이었다. 김미산은 명월관에서 일하는 여급이었다.
아서원은 1934년 반도호텔 공사가 시작되면서 부지를 환지(換地)하여 지금의 롯데호텔 건물의 중간쯤에 있던 2층이던 건물을 비우고 주소를 황금정 181-4로 옮기고 400여 평에 3층 건물을 신축하였다. 이곳은 한국 사회주의 운동에서 의미가 큰 곳 가운데 하나이다.
이들의 간단한 이력에서도 고단한 투쟁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이들은 민족해방과 신사회 건설이라는 자신들의 삶을 걸고 결의한 길에서 비켜 서지 않았다.
비록 파업투쟁은 패배로 끝났지만, 파업 과정에서 보여준 노동자들의 놀라운 조직력과 드높은 의식성은 이 시기 노동운동을 민족해방운동의 수준으로 한 단계 상승시켰으며 이후 노동운동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후 노동자들의 투쟁은 단위 사업장을 넘어 함경남도 영흥과 원산에서와 같이 지역 차원의 동맹파업으로 발전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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