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주의

미래가 과거가 되어버린 촛불의 시간을 살기 위하여

미래가 과거가 되어버린 촛불의 시간을 살기 위하여

촛불은 미래였던 것을 과거로 만들어버렸다. 우리, 특히 지식인들이 할 일은 좀 더 과감해지는 것이다. 무엇보다 과감히 68년과 87년을 망각하는 것이다. 더 많은 상상력으로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무언가를 만들어야 한다. 그 무언가가 사실은 예전에도 있었던 것이라 해도 그것은 동일한 것의 반복이 결코 아닐 것이다.

사회적 공화주의, 달과 손가락

사회적 공화주의, 달과 손가락

이광일 씨의 재반론에 대하여 또 한 편의 글을 구성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이광일 씨의 첫 글「진보의 재구성, \'사회적 공화주의\'에 대한 짧은 생각」에 대한 반론에서 던졌던 단 한 가지 질문을 좀 더 구체화할 수 있다는 데 그 최소한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일단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다시 글을 쓴다.

금민 씨에 대한 답변 : ‘현자와 바보’

금민 씨에 대한 답변 : ‘현자와 바보’

금민 씨가 길게 반론을 펼쳤지만, 필자가 제기한 핵심 문제에 대해서는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만족할만한 답변을 하였다고 생각지 않는다. 거기에는 ‘탈배제강령’의 해석과 관련, 지난 대선에서 보인 창조한국당에 대한 한국사회당의 태도도 포함된다.

손가락은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을 보고 있다

손가락은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을 보고 있다

이 글은 독자적인 기고문이 아니며, 이광일 교수 기고문의 구성방식과 논점을 따라가는 형태로 전개된다. 아울러 굳이 이와 같은 기고문을 쓰기로 한 이유는 이광일 교수의 글이 마치 ‘사회적 공화주의’가 진보의 재구성을 방해하고 있는 것처럼 비춰지는 정치적 효과를 낳기 때문이라는 점도 먼저 밝혀 둔다.

진보의 재구성, ‘사회적 공화주의’에 대한 짧은 생각

진보의 재구성, ‘사회적 공화주의’에 대한 짧은 생각

\'사회적 공화주의’ 강령에는 이런저런 ‘정책들’만 있을 뿐 모순과 긴장을 해소, 극복할 정치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행의 전략도 보이지 않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왜 그 비판자들이 ‘사회적 공화주의’를 ‘국적 불명’의 강령이라고 말하는지, 왜 자본-임노동관계를 한 치도 건드리지 않고 있다고 비판하는 지 그 이유를 다시 한 번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