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나라 딸세포

[달나라 딸세포] 4. 돌멩이 된장찌개의 비밀

[달나라 딸세포] 4. 돌멩이 된장찌개의 비밀

아버지가 쉰살이 되던 날, 그와 나눈 대화를 나는 기억한다. 그는 여느 때처럼 긴 다리를 펼치고 앉아 체조에 열중해 있었다. 불현듯 그가 마침내 쉰살이 되었다는 걸 기억해낸 나는, 그가 어쩐지 불쌍해져서, 그리고 사람의 한 生이라는 것이 두려워져서 그에게 말을 걸었다. “아빠, 쉰살이 되니까 기분이 어떠세요? 저처럼 젊은 것들이야 학교를 간다 취직을 한다 결혼을 한다… 인생에서 아직 겪어보지 못한 일들에 대한 막연한 기대 같은 걸로 산다지만, 아빤 이제 학교도 끝마쳤고 결혼도 해봤고 직장생활도 실컷 하셨으니 무슨 재미로 사신대요?” (설마 이런 싸가지없는 질문을 아버지한테 했으랴, 생각하겠지만 정말로 나는 그렇게 물어보았다. 무엇보다도, 나는 궁금했다. 내가 살아보지 않은 세월, ‘그다음’에 일어나는 일들이.) 그러자 그는 “이놈아, 나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스무살엔 스무살 때만 태양이 뜬다고 생각하겠지만, 쉰 살에는 쉰 살의 태양이 떠오르는 법이다. 너는 들어봤느냐 순수 오십, 이란 말을?”이라고 반문하면서, 약간은 허풍스러워 보이기도 하는 주름잡힌 웃음, 을 터뜨렸다. 순수 오십….. 그럴 수 있을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부모에 대해서 매우 단단한 편견을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달나라 딸세포] [tv부인] 엽기적인 그’놈’

[달나라 딸세포] [tv부인] 엽기적인 그’놈’

-‘녀’가 ‘놈’이 되면 얼마나 많은 의미가 달라지는지 깨닫다. 내 동생은 ‘뉴 논스톱’ 팬이다. 상세히 부연하자면 머리가 산(山)만한 양동근 팬이다. 난 동생 덕분에 추석 연휴에 그 시간대에 편성된 ‘뉴 논스톱’ 특집들을 ‘모두’보았다. ‘섹션티비’를 패러디한 특집, ’21세기 위원회’의 진행자가 진행하는 게임쇼 형태의 특집, 영화를 패러디한 특집까지. 난 깨닫는다, 내 동생만 팬이 아니었구나. 영화패러디 특집에 ‘엽기적인 그놈’이 있었다. 그녀가 ‘엽기적’이었던 이유가 거친 입과 자제력없이 뻗는 주먹과 대책없는 자기중심성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게 모두 ‘남성성’이란 이미지 속에 지나치게 일반적이라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과연 ‘그놈’은 엽기적일까 의심하였다. 뭐, 꽃미남 조인성이 네모공주 박경림과 사귀는 것 자체가 ‘그놈’이 엽기적인 증거라고 한다면야 할 말 없다. ‘남자’가 술을 먹고 휘청거리고, 지하철 내에서 토악질을 하고, 처음 본 여자에게 술 기운을 빌어 ‘자기야’를 한다 한들 그게 어찌 ‘엽기’가 될 것인가? ‘남자’가 허황한 이야기를 떠벌리면서 자신의 기발함에 찬탄할 것을 강요한다 한들 그게 어찌 ‘엽기’가 될 것인가? ‘남자’가 수업 중인 애인의 강의실에 저벅저벅 걸어들어가 꽃을 바친다 한들 그게 어찌 ‘엽기’가 될 것인가? 그’녀’의

[달나라 딸세포] 그녀와 그녀가 만났을 때 (공간, 질서, 사랑의 불협화음)

[달나라 딸세포] 그녀와 그녀가 만났을 때 (공간, 질서, 사랑의 불협화음)

- 에릭 로메르의 사계 연작 중 을 보고

[달나라 딸세포] 살림

[달나라 딸세포] 살림

1. 식탁에서 어머니는 프라이팬째 볶음밥을 드신다. (만약 내가 그랬다면, “기집애가 그게 무슨 꼴이냐!!”라고 호통이 떨어질 텐데. 당신의 딸내미는 공주처럼 우아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거다.) 반찬통에 남은 밥을 넣고 대충 비벼드시기도 한다. 바닥에 남은 반찬을 누가 싹싹 다 집어 먹겠는가. 당연한 듯 버리게 될 것이다. 살림을 직접 하지 않는 자라면 아까울 것 없는 일이다. 아버지는 반찬을 끼니 때마다 새 그릇에 덜어 먹기를 원하신다. “어~이. 반찬통 통째로 죄다 식탁에 늘어놓고 이게 뭐어야. 한 끼에 먹을 양만 그릇에 담아 오지.” 물론 그릇에 조금씩 새로 담는다면 위생상 더 좋을 것도 같다. 침이 반찬통 전체에 섞이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 딱 한 끼니분 반찬 양은 누가 잴 것인가? 혹시 남았다면 다시 반찬통에 넣을 것인가 말 것인가? 약간 남았다면 다시 넣기도 애매하고 번거로워서 버리게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릇에 묻은 양념만큼의 유기물과, 그 그릇을 씻었을 때 필요한 물과 세제, 그건 괜히 낭비되는 거 아닌가? 게다가 그렇게 해서 추가되는 설거지는 누가 할 건데? 아버지가 할 것도 아니면서. 우아하고

[달나라 딸세포] 욕실연가

[달나라 딸세포] 욕실연가

도대체가 변기를 지저분~하게 해노코 사는 사람들은 이해가 안 간다카이. 맨날 할 필요도 없고 한번씩 이래 물만 부조도 깨끗한 거를. 매일매일 변기와 욕실을 청소하는 고향집 엄마. 어쩌면 이 사람 눈에 띌 때마다 변기를 청소하고 있는 걸 지도 모른다. 허드렛물만 생기면 변기에 쏟아부으며 닦아댄다. 변기가 더럽지도 않은걸까? 어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린 나는 내 허벅지며 엉덩이에 물이 묻는 게 싫었다. 조심한다고 조심해도 튀는 게 물이고, 튀었다하면 항상 변기 위다. 그것만으로도 골치아픈데 엄마는 열두번도 더 변기를 적신다. 게다가 그건 허드렛물. 변기 커버 위의 물은 보기만 해도 짜증이 났다. 그게 어떤 물인지도 모르고, 그게 물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샤워기가 달린 호스를 끌어다 변기를 닦고, 다시 그 위를 마른 화장지를 둘둘둘 뜯어내서 닦아야만 성에 차던 그 시절 나는, 매일같이 욕실청소를 해대던 엄마도 싫었고, 그렇게도 조준을 못 하나 싶은 남동생도 맘에 안 들었다. 하루에 열두번도 더 쓸고 닦고 물을 퍼부어대던 엄마가 왜 그렇게 싫었던 걸까. 그럴 시간 있으면, 책이라도 읽지. 그럴 시간 있으면, 차라리 운동이라도 하지. 엄마는

[달나라 딸세포] 살길찾기 – ing

[달나라 딸세포] 살길찾기 – ing

집 TV를 보면서 듣는다. 압력밥솥이 칙칙거리는 소리, 설거지물이 떠내려가는 소리, 쓰레기 비닐 봉지의 부시럭 소리…… TV소리랑 섞여서 짜증은 나는데 또 미안하니까 짜증을 낼 수는 없다. 그래서 내가 “엄마 이제 좀 나랑 tv나 봐요” 하며 돌아보면, 엄마는 어느새 김치를 담그려고 사다놓은 무를 한참 벌려놓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론 미안해서 거북하고, 한편으론 내 소중한 휴식을 방해받는 게 싫어서 나는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그리고 혼자 살면 절대로 집안 일에 “목숨 걸지” 말아야지 한다. 대충 해도 되는 걸 엄마가 왜 그렇게 부지런하게 하는 건지 늘 불만이다. 자취방 소원대로 작은 자취방을 얻어 살게 되었을 때, 나는 얼마나 좋았던지. 내 몸 하나만 건사하면 되는 거니까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대로 “집안일”은 최소로 하기로 했다. 쓰레기는 일단 뒀다가 치우고 싶을 때 치우는 게 그만이요, 청소는 내가 더럽다 느낄 때 하면 된다, 먹는 데 공들이지 않고 사먹거나 간단하게 해결하자 등등. 그렇지만 나는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았다. 나는 내 지저분한 방을, 쌓여있는 쓰레기더미를 보아 넘길 수가 없었다. 나에게 적합하다고 생각한 나의 생활방식을

[달나라 딸세포] 함께 살다

[달나라 딸세포] 함께 살다

#1. 눈덮힌 설악산에 가고 싶다. 그건, 연초에 작정한 ‘올해 내가 할 일’ 목록에 들어 있었다. 더 이상은 지쳐서 안 되겠다고 연 초에 마음 속에 들어온 결심은 날씨나 계절이나 개인적 감상에 따라 커지기도 작아지기도 단단해지기도 물렁해지기도 하다가, 1월도 지난 어느 날-양력으로 치자면 한 해 계획 따위로는 이미 소용없어진- 입 밖으로 나와 실행되었다. 무언가 슬로모션으로 진행될지도 모른다고 약속한 시간과 네시간 여유를 두고 끊은 하행 버스는 느끼던 것과 달리 아주 짧았던 물리적 시간 때문에 교환되었다. 십 분 걸렸다, 3년 7개월의 연애를 끝내는데. 난 같은 목적지의 하행버스 대신 양양행으로 바꾸었다. 추운 날, 산에 가고 싶었다. 오늘 내가 죽더라도 너랑은 상관없어, 라고 입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난 붐비는 버스 터미널에 서 있었다. 늦게 도착한 양양에서 푸짐한 한정식을 먹으면서도 난 몰랐다. 택시를 타고 오색에 닿았을 때도, 산 밑 여관에서 새벽에 깨어 나왔을 때도, 큰 눈으로 통제된 산을 그냥 등지고 돌아서면서도 난 몰랐다. 아주 오래 지나고 나서야, 눈 덮힌 설악산을 가고 싶어한 게 누구였는지 기억해냈다. 가고싶다,고 같이 가자,

[달나라 딸세포] 딸의 선택 ―취약한 위치에서 벗어나기

[달나라 딸세포] 딸의 선택 ―취약한 위치에서 벗어나기

※ 경험담 [참조 : 글쓴이의 특징] 1. 서울 중류 계급 20대 여성 2. 인문학도 3. 예쁠 것 없음 4. 게으름 5. 상식적으로 됨됨이를 평가받기 위한 유형, 무형적 성과가 없음(4번의 보충1) 6. 아직 空想중(4번의 보충2) 97년 여름 학생 식당에서 한 친구와 일품 음식을 먹고 있었다. 나는 멍한 상태에서 정리되지 않은 말을 지껄여 친구들을 당황하게 하곤 했는데 그 날의 말 또한 울적하기 이를 때 없었다. “계속 이렇게 먹고살겠지…?” 친구는 이 말을 반사적으로 받아 쳐 나를 화들짝 놀라게 했다. “절대로 그럴 리 없어. 나는 이딴 거 말고 잘 해 먹고 살 꺼야. 왜 그런 생각을 해?” 대학교 3학년 당시 나는 학교 근처에 자취방을 얻었다. 집에서 나가 살고 싶다는 욕망은 아주 오랜것이었으며 가장 큰 이유는 가족 관계, 방구석에 널린 잡동사니들, 교통 체증으로 소모되는 시간들을 온전하게 하나를 위해 활용하고 싶어서였다. 하나를 위해? 물론, 대강 학업이라고 하자. 책 읽고 글쓰고수업 챙기고 하는 등등. 자취방에는 변변한 식기 하나 없었고, 세 끼니 모두 학교 식당 혹은 밖에서 해결했다.

[달나라 딸세포] 생활의 지혜-내가 만드는 살림사전

[달나라 딸세포] 생활의 지혜-내가 만드는 살림사전

1. 가난 가난함에 대항하는 내 무기는 ‘솔직함’이다. 우리 집은 가난하지 않았는데도, 어렸을 때는 부자가 아닌 것이 부끄러웠다. 부자 친구들과 놀아야 할 때, 나는 ‘없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으로 부끄러움을 표현했다. 부자가 아닌 것은 나의 ‘잘못’이었다. 아직도 나는 친구들을 집에 놀러오지 못하게 하려고 거짓말을 하는 꿈을 꾼다. 나는 지금 가난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돈이 없다’는 말을 해야 하는 상황에 부딪힌다. 그 때마다 나는 ‘돈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 어렸을 때부터 가난했던 내 마음이 조금씩 치료되는 것 같다. 그렇지만 밥을 사달라고 처음으로 친구에게 부탁해야 했을 때는 굉장히 힘들었다. 돈이 있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지만 돈이 정말로 없을 때는 그런 말이 잘 안 나온다. 여러가지 생각이 든다. 거절당하면 어쩔 것인가? 차라리 처음부터 할 일이 있어서 먼저 집으로 가겠다고 하는 것이 백 번 낫지 않을까? 구걸은 영혼에 좋다고 한다. 나는 그 말을 믿게 되었다, 아무 것도 없는 나를 부디 먹여달라고 타인에게 내 양식을 의탁했을 때, 그 사람이 말없이도 내 사정을 이해하고 있다고 믿었을 때, 돈이 아니라

[달나라 딸세포] editorial- 침묵으로부터의 탈출

[달나라 딸세포] editorial- 침묵으로부터의 탈출

지난 수년간 여성주의자들이 "일상이 되어버린 성폭력"이라는 모토를 써왔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 이 "정말 그 애가 그랬다니 믿을 수 없어라" 라고 말하고 있다. 성폭력은 일상에 너무 나 깊이 들어와 있음에도, 많은 부분이 덮여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