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은 결국 힘과 권력이 본질적이다. 문제는 그러한 힘과 권력이 불가역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민주화 이후 자유주의 정권들의 무책임한 역사인식과 과도한 관대함은 결국 또 하나의 역사적 범죄로 기록되고 있다.
1970년대 케인스주의가 파산한 이유 중의 하나도 이것입니다. 물론 위기 정세에서 유효수요 확장은 절대로 필요한 것이고, 그 때문에 맑스주의자들도 확장정책을 요구하지만, 케인스주의와 달리 맑스주의자들은 사회화 프로그램과 자본주의의 지양에서 위기를 진정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른바 “혁명의 결정적 시기”에나 올바른 정당(Party) 출현이 가능하다는 대기주의 함정에 빠져있다. 아직은 코뮤니스트의 무관심한 분열이며 한계다. 투덜거리며 하는 말이지만 비전의 제시는 보다 남쪽의 우리 몫인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능력을 전유하는 질서로부터 우리들의 능력을 재전유하여 공동의 사회를 구축하기 위한 과정으로 [적-녹-보라]동맹의 토대를 구축하려는 이론적인 노력들이 전개되어야 한다.
진보운동의 재구성을 위한 일차적 과제로 주체형성전략을 꼽고 있지만 매우 지난한 과제임에는 틀림없다.
수많은 혁명가들이 시대의 고비 고비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다른 세상,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어떻게 치열하게 고민하고 투쟁했는지, 온몸에 소름 돋도록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노라면 한낮에 폭염 따위는 금방 잊혀 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과 자연간의 관계를 매개하는 노동이 어떤 형태를 취하는가는 인간의 발전과 긴밀한 연관이 있음은 분명하다.
사회운동과 정당간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사회운동을 포괄해야 한다. 정당-사회운동간을 잇는 하나의 거대한 전선체를 만들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해나가야 할 일들 중에 하나인데 사실 아주 까다로운 일이다.
우리에게는 앎의 권리가 있다. 그 ‘앎’은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세계가 우리에게 우호적으로 작용하기 위해, 그리고 이를 위한 우리의 행위들의 조화를 위해, 우리 자신을 향상시킬 권리로서 앎이다.
올해로 4회를 맞는 맑스코뮤날레가 오는 25~26일 서울시립대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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