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남일

[사회주의정치신문 해방] [48호][박남일칼럼]언론이 저지른 ‘살인’의 추억

[사회주의정치신문 해방] [48호][박남일칼럼]언론이 저지른 ‘살인’의 추억

일촉즉발의 위기 직전에 협상이 타결되어 쌍용차 노동자들의 뜨거운 투쟁이 막을 내렸다. 대량 해고에 맞서 파업투쟁을 벌인지 77일만이었다. 그나마 노조 측에서 큰 폭으로 양보를 한 결과다. 용산 철거민 참사보다 몇 배나 처참한 상황이 벌어질 지도 모르는,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으리라. 협상 타결로 농성을 푼 순간에 파업농성 지도부와 연대단체 활동가 수십 명은 손에 수갑을 차고 쇠창살에 갇히게 되었다. 쌍용차 점거농성파업은 이제 이명박 정부 이후 최대 공안사건 국면을 맞고 있다. 게다가 후안무치한 경찰은 노조 측에 5억 원이 넘는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아무리 곱게 봐주려 해도, 이명박 시대 한국 경찰은 천하의 상것들이다. 한편, 1천 명에 가까운 노동자들이 두 달 넘도록 이른바 ‘구사대’와 ‘공권력’의 무지막지한 폭력 앞에 떨고 있을 때, 한국의 대다수 부르주아 언론은 이들을 조롱하고, 저주하였다. 협상이 타결된 며칠 뒤에 이들 부르주아 언론들은 ‘폭력노조원’이니 ‘외부세력’ 개입이니 하면서, 오랜 투쟁으로 지친 노동자들의 가슴을 날카로운 펜 끝으로 마구 긁어댔다. 용산 참사가 일어났을 때 ‘전철연’에 대한 마녀사냥을 부추기던 것과 똑 같다. 예컨대 동아일보 8월 11일자는 “점거

[사회주의정치신문 해방] [46호]‘진보좌파’라는 이름의 허상

[사회주의정치신문 해방] [46호]‘진보좌파’라는 이름의 허상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결하였다. 전직 대통령의 죽음은 남한 사회에 엄청난 바람을 몰고 왔다. 거센 바람이 불면 풀잎이 눕듯, 수백만 인민이 전직 대통령 영정 앞에 엎드렸다. 또는 인간 ‘노무현’이라는 이름 앞에서 눈물을 뿌렸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스스로 분향소를 찾았다. 개중에는 직장에 휴가를 내고 와서 슬픔으로 하루를 보낸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개별적 파업’에 참여한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그 며칠간 추모 열기는 나날이 증폭되었다. 그것은 ‘민주당’이나 ‘노사모’의 동원력을 훨씬 뛰어넘는 일이었다. 그러면서 장례를 치르는 한 주일 동안은 온 나라가 진공상태에 빠진 듯하였다. 한 사람의 죽음을 두고 벌어진, 그 엄청난 규모의 자발적인 추모 물결은 인류의 지난 역사를 샅샅이 톺아보아도 찾아보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또 미래에도 웬만해서는 연출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기억은 편집될 수 있다 그런데 그 거대한 군중이 한 가지 슬픈 감정에 젖어 있는 동안에, 생뚱맞게도 나는 2,3년 전쯤에 ‘공공의 적’이었던 대통령 노무현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 무렵에는 세상 잘못 돌아가는 건 모두 노무현 탓이었다. 오죽하면 인터넷에서는 ‘이게 다 노무현 탓이다’는 댓글놀이가

[사회주의정치신문 해방] [45호]국가의 폭력은 정당한가?

[사회주의정치신문 해방] [45호]국가의 폭력은 정당한가?

지난 20세기 100년의 역사에서 한국인은 ‘국가주의’ 코드에 강력하게 지배당해왔다. 20세기 전반기에 일제 식민지 체제를 경험한 것과 관련이 있으리라. 그리하여 학교에서는 아침마다 가슴에 손을 얹고 태극기를 바라보며 ‘국기에 대한 맹세’를 다짐하도록 강요받았고, ‘나라 잃은 설움’에 대하여 귀에 못이 박이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반공과 애국은 항상 짝이 되어 우리 뇌리에 각인이 되었다. 남자들은 ‘신성한’ 국방의 의무에 동원되어 군대에서 전쟁 기술을 익히고 온 것을 자랑스레 여겼다. ‘국가보안법’이라는 야만적 법률에 의하여 개인의 생명과 인권이 무참하게 유린당하는 일쯤은 ‘국익’이라는 말 한마디로 덮어버렸다. 개인의 권리와 인권을 입에 올리면 국가를 위협하는 ‘빨갱이’로 낙인찍으면 그만이었다. 21세기에 들어와서도 맹목적인 국가주의는 이어진다. 한국인은 세계 다국적 자본의 홍보이벤트장인 월드컵이나 올림픽이 열리면 시청 앞 광장에 모여 ‘대한민국’을 목이 터져라 외치며 응원하는 것을 숭고한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국가주의자들은 거리에서 죄 없는 이웃이 공권력이라는 이름의 군홧발에 짓밟히고, 방패 모서리에 찍혀 피를 흘려도 그저 냉랭한 눈길을 보낼 뿐이다. 국가라는 이름의 괴물 그런 동안에도 국가의 폭력은 이어진다. 급기야는 개발이익에 눈먼 건설투기자본의 횡포에 시난고난 힘없는 저항을 하던 용산

[사회주의정치신문 해방] [43호]유태인은 왜 죽음 앞에서 침묵했을까?

[사회주의정치신문 해방] [43호]유태인은 왜 죽음 앞에서 침묵했을까?

유태인 학살을 다룬 영화는 많다. 그런데 그 영화들 중에 공통되게 나오는 장면 하나가 있다. 바로 음산한 풍경과 우울한 음악을 배경으로, 유태인들이 수용소로 줄을 지어 걸어가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수용소로 끌려가는 발걸음이 왠지 너무 얌전하다는 것이다. 죽음에 이르는 마지막 길에서 한번쯤 커다란 저항이 일어날 법도 하건만, 그건 관객의 희망사항일 뿐이다. 실제로 죽음의 수용소로 가는 도중에 저항이 일어났다는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나치 치하에서 희생된 유태인들. 그들은 왜 죽음 속으로 질서정연하게 걸어 들어갔던 것일까. 유태인이 죽음 앞에서 침묵한 것은 독일군의 거짓말 때문 예컨대 철도 교통의 요충지에 세워진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원래 나치에 저항하는 폴란드 사람들을 격리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그곳이 학살 수용소로 이용된 것은 1941년 말부터였다. 하지만 그 후에도 4개의 가스실을 갖춘 제2수용소에서만 학살이 이뤄졌으며, 제1수용소와 제2수용소 일부는 여전히 노역시설로 이용되고 있었다. 유태인이 죽음 앞에서 침묵했던 이유는, 결국 독일군이 정교하게 연출한 거짓말 때문이었다. 기차에 오르기 전에 독일군은 ‘노동력이 필요한 곳으로 집단 이주할 것’이라고 속이며 유태인을 모았다. 일부 유태인에게는 우크라이나에 상점을 열도록 해준다는 계약서까지 써주었다고

[사회주의정치신문 해방] [실천의날 특호]붕괴의 시대, 사회주의만이 대안이다

[사회주의정치신문 해방] [실천의날 특호]붕괴의 시대, 사회주의만이 대안이다

자본주의의 야만적인 ‘축적’ 본능에 제동이 걸렸다. 단순한 불황이 아니다. 경제공황이다. 금융 위기가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의 붕괴다. 그래서 2008년은 전 세계적으로 독점 자본가들의 똥줄이 타들어가기 시작한 해로 기억될 것이다. 1990년대 초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의 정치체제가 무너졌을 때 그토록 의기양양하게 사회주의를 조롱하며 야유를 퍼붓던 자본주의 중심국 미국의 시장경제가 줄줄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물경 20년도 지나지 않아서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금융위기가 어쩌고 실물경제가 저쩌고 하면서 호들갑이다. 부르주아 언론은 경기침체니, 불경기니, 장기불황이니 하는 식상한 말로 언죽번죽 지금의 상황을 묘사한다. 그냥 “우린 망했다”고 하면 될 것을. ‘재테크’의 함정과 ‘내 집 마련’의 환상에 숨은 속임수 물론 독점 자본가만 망한 게 아니다. 근근이 먹고사는 임금 노동자나 서민들 상당수도 이미 망했거나 망하기 일보 직전이다. 쌈짓돈이 모자라 빚까지 내어 ‘재테크’에 투자한 사람들 대부분이 지금 낙엽처럼 떨어진 주가시세를 지켜보며, 살 떨리는 겨울을 맞이하고 있을 것이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억울함을 억누르면서. 사실 지난 십여 년간 우리는 ‘재테크’니, ‘주식’이니, ‘펀드’니 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재테크를 모르면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금융기관에서는

[사회주의정치신문 해방] [39호]앨버트로스의 똥으로 만든 나라

[사회주의정치신문 해방] [39호]앨버트로스의 똥으로 만든 나라

태평양을 떼 지어 누비던 앨버트로스의 똥이 오랜 세월 산호초 위에 쌓이고 쌓여 섬이 되었다. 적도 바로 아래 태평양에 떠 있는 나우루 섬 이야기다. 세월이 흘러, 섬 지표면을 덮은 똥은 귀중한 산업자원인 인광석으로 변하였다. 그 섬 위에서 미크로네시아 계 원주민 수천 명이 물고기와 열대 과일 따위로 자급자족을 하며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그러던 1888년경부터 이 섬에 출몰하기 시작한 독일과 영국의 자본가들이 철도를 놓고, 인광석을 캐 갔다. 인광석은 질 좋은 화학비료의 원료가 되어, 서구 자본가들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채워주었다. 이어 제1차 세계대전 무렵에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영국 등이 함께 섬을 통치하면서 또 인광석에 군침을 흘렸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점령군이 일본군으로 바뀌었다. 그 사이 섬사람들은 인광석 채굴장에서 노동자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받은 임금 총액은 인광석 생산액의 5퍼센트에 머물렀다. 개발주의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간 나우루 주민들 1945년. 전쟁이 끝나고 일본군은 철수했다. 오스트레일리아를 비롯한 옛 점령자들이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세상에 눈을 뜬 나우루 사람들은 독립을 꿈꾸었다. 그리고 1968년. 자본에 짓밟힌 지 80년 만에 드디어 나우루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더불어

[사회주의정치신문 해방] [38호]한 번 노비는 영원한 노비?

[사회주의정치신문 해방] [38호]한 번 노비는 영원한 노비?

88만원 세대. 이 말은 “20대여, 토플 책을 덮고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라는 다소 자극적인 메시지가 붙은 책 제목이다. 더불어 신자유주의 시대 청년세대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상위 5% 정도만이 대기업이나 공무원과 같은 보장된 직장을 겨우 얻을 수 있고, 나머지는 이미 800만 명이 넘어선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을 마지못해 선택할 수밖에 없는 세대에 붙은 딱지인 것이다. 산술적으로만 계산하면, 이들은 지금 화폐가치 기준으로 평생 88만 원에서 120만 원 사이의 임금을 받게 될 것이다. 한 번 비정규직은 영원한 비정규직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승자독식 사회에서 탈출구가 없는 그들의 처지는 마치 조선 시대 노비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물론 중세시대 노비의 삶과 21세기의 젊은이들 삶을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겠지만, 경제적 지위만 놓고 보면 그 답답한 처지가 크게 다르지는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노비의 삶은 어떠하였을까? 노비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온몸으로 떠받친 사람들 ‘쇄미록’이라는 책이 있다. 임진왜란 전후 약 9년간의 상황이 생생하게 기록된 일기문이다. 저자 오희문(1539∼1613)은, 인조 때 영의정 오윤겸의 아버지이자 병자호란 때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인 오달제의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과거에

[사회주의정치신문 해방] [37호]그의 콧물감기가 러시아를 구했다?

[사회주의정치신문 해방] [37호]그의 콧물감기가 러시아를 구했다?

지치지 않은 정복자 나폴레옹. 그는 1769년 프랑스의 식민지 코르시카 섬에서 태어났다. 프랑스 통치에 협력한 아버지 덕분에 나폴레옹은 프랑스에 유학하여 병사학교와 육군사관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그는 지독한 사투리 때문에 본토 귀족자제들로부터 ‘코르시카의 촌놈’이라고 놀림을 당하며 ‘왕따’ 신세를 면치 못하였다. 졸업 때 성적은 58명 중 42등. 하지만 지독한 피해의식 때문에 출세욕만큼은 단연 1등이었다. 나폴레옹이 사관학교를 마치고 포병장교로 근무하던 1789년에는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 바스티유 감옥이 시민의 손에 점령되었다. 당시 스무 살의 나폴레옹은 그런 역사 현장을 목격하면서도 혁명 대열에 끼어들지 않았다. 1792년 8월, 국왕 루이 16세가 시민의 손에 끌려 다니는 장면을 목격했을 때도 나폴레옹은 ‘천민의 자식들’이니 ‘머저리 같은 놈’이니 하며 시민과 국왕을 싸잡아 비아냥거렸다. 그러던 나폴레옹이 1793년에는 당시 집권자로 공포정치의 대명사가 된 로베스피에르에게 접근하여 혁명 정부의 장교가 된다. 그리고 왕당파의 반란을 격파한 공로로 스물다섯 나이에 이탈리아 원정군 포병 사령관이 되었다. 부르주아 세력 등에 업고 황제 자리에 도전 그러나 1794년 7월, 로베스피에르 일파가 제거되고 의회가 권력을 장악하는 바람에 나폴레옹은 체포되어 조사를 받고 장교의 지위를 박탈당하였다. 하지만

[사회주의정치신문 해방] [36호]양반들만의 타락한 축제, 과거시험 현장

[사회주의정치신문 해방] [36호]양반들만의 타락한 축제, 과거시험 현장

유교적 관리 선발제도인 과거제도는 본디 중국 수나라 때 본격적으로 실시되어 청조 말까지 약 1300여 년간 시행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원성왕 4년(788)에 실시된 ‘독서삼품과’를 과거제의 효시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정식 관리 선발제도로써 과거제도가 도입된 것은 고려 광종 9년(958)이었다. 당시 후주 출신으로 고려에 귀화해온 ‘쌍기’라는 사람이 건의하여 당나라 제도를 모방하여 시행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고려시대의 과거제도는 상류층에게 특혜를 주는 음서제와 병행되었고, 무과가 없었으므로 여전히 반쪽짜리 제도였다. 조선시대에 와서 과거제도는 비로소 문·무과로 나뉘어 실시되었다. 역과, 의과 따위의 잡과도 생겼다. 그런데 조선은 문치주의 국가였으므로, 단연 문과가 중시되었다. 문과는 다시 소과, 대과로 분류됐다. 소과는 생원과 진사를 선발하는 시험이고, 대과는 식년시라 하여 3년에 한 번씩 33명을 뽑았다. 그러나 식년시 외에 ‘증광시’, ‘별시’, ‘알성시’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임시 시험이 있어서 실제 합격자는 더 많았다. 조선시대 과장은 부정시험 만연한, 잡된 무리의 노름판 과거제도는 그동안 혈연이나 파벌에 따라 세습적으로 이뤄지던 인재등용 관행을 바꾸었다. 공정한 절차에 따라, 유교사상을 갖춘 인재를 등용하는, 매우 모범적인 문명제도였다. 오늘날의 행정고시, 사법고시 등 국가고시도 과거제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