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인도네시아가 매우 가난하게 보일지라도, 말레이시아가 반민주적으로 보이고, 캄보디아가 후퇴하고 있더라도 이런 국가들이 매우 풍부한 역사를 갖고 있다는 것을 한국인들도 인식해야 한다.
난 여전히 함께 웃고 노래하는 우리들에 대한 꿈을 꿔요. 나는 마음 깊은 대화를 위해 어디론가 가서 서로의 손을 잡았던 것도 기억하고요. 그런데 내가 이런 꿈에서 깨면, 이제 이런 모든 게 끝났다는 걸 실감하지요.
“인민에 봉사한다”는 생각은 실천에 옮기지 않는다면 빈말일 뿐이지요. 사실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인정있게 구는 것은 인민에 봉사하는 것의 핵심입니다. 저는 이런 정신을 우리가 산을 떠난 후에도 계속 일하면서 유지를 하고 있어요.
나는 혁명 전투에 가담한 것으로 나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다고 생각해요. 나는 그녀가 나를 자랑스러워하기를 바랍니다.
제가 비록 영웅적이고 환상적인 뭔가를 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혁명을 성공하진 못했지만 우리 자신이 너무도 자랑스럽습니다. 저에게 혁명은 더 이상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내 남편에게 게릴라로서의 삶은 달랐어요. 집안일을 할 필요도 없었던 그는 그래서 게릴라에서 어려움을 전혀 견디지 못했어요. 난 등에 30킬로그램을 지고 다닐 수 있었지만, 남편은 10킬로그램도 못했거든요.
\"나는 그 운동에 동참하는 과정에서 매우 많이 변화되었어요. 운동가가 아닌 내 동생, 언니들은 매우 다르지요. 혁명가로써 우리는 더욱더 넓은 마음과 열린 가슴이 되기 위해 많은 것들을 배웠습니다.\"
나는 태국-말레이시아 국경지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곳에 내 임무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모택동 사상에 영향을 받았고, “농촌으로 도시를 포위하라”는 모 주석의 지침을 따르라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나에게 물었죠. 왜 가족 모두를 게릴라에게 데려갔냐고요. 그래서 말했어요, 당신들의 정부가 내 남편을 납치했어요. 공산당을 따라서 게릴라에 들어가는 것 말고 내가 네 아이들을 데리고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내 이이들은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었겠죠.
저는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 좋아서 공산당에 가입했어요. 공산당이 춤추고 노래할 수 있는 청소년을 위한 여러 가지 행사를 개최하곤 했거든요. 당은 대중들에게 다가가서 게릴라군을 확대하려고 했기 때문에 우리더러 대중을 위해 노래하고 춤추라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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