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어느 삼부자 이야기

어느 삼부자 이야기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는 형제, 남매, 부자, 부부 등 가족 단위의 참여가 적지 않았다. 권오설 오직 형제, 김형선 명시 남매, 조두원 원숙 남매, 박헌영과 주세죽 부부 등 그 사례가 매우 많다. 일제강점기의 저명한 이론가였던 최익한의 경우도 그러했다. 고향인 울진군 북면에서 그의 형제인 익래는 고문으로 불구가 되었고 두 아들인 재소와 학소 그리고 여러 조카가 갖은 고문과 옥고를 치렀으며, 큰아들인 재소는 옥사하고 말았다. 1937년 3월 6일. 최익한은 아들 재소가 옥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이었다. 그는 곧바로 서울 창신동 집에서 함흥교도소를 향해 달려갔다. 그가 도착한 함흥교도소에서 맏아들 재소의 시신을 마주했다. 십수 년의 세월 동안 굽힘 없이 사회주의 혁명에 헌신했던 그에게도 아들의 사망 소식은 큰 충격이었다. 일본 유학 본격적 혁명운동에 뛰어든 최익한 큰아들을 잃고 최익한은 비통한 심경을 한시(漢詩)로 남겼다. 시의 제목은 곡아이십오절(哭兒二十五絶)이다. 시는 1937년 4월 조선일보에 재직 중이던 홍기문에 의해 실렸다. 홍기문은 과거 일본 유학 시절 최익한과 함께 일월회 활동을 했던 인물이다. 시에서 최익한의 큰아들에 대한 깊은 부정(父情)을 느낄 수 있다. 13세에 결혼하여 18세에

6.10만세투쟁 결정한 강달영의 아지트

6.10만세투쟁 결정한 강달영의 아지트

일제강점기 3대 대중투쟁을 꼽는다면 무엇보다 1919년 3.1만세운동을 꼽을 수 있다. 그렇다면 나머지 두 투쟁은 무엇일까? 시기순으로 말한다면 1926년 6.10만세투쟁과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그것이다. 3.1운동은 일제의 식민지통치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아동노동을 돌아보며

아동노동을 돌아보며

산업혁명은 아동노동의 성격을 바꿔놓았다. 교육과 훈련이 아닌 타인의 이윤을 위해 일하는 ‘아동 노동자’가 생겨났다. 5살이 되면 성냥공장에서 방직공장에서, 조금 큰 8살이 되면 탄광에서 일했다. 유럽 각지에 ‘성냥왕’이 등장했지만, 한편에선 백린에 중독되어 죽어가는 어린 노동자들이 있었다.

춘경원에서: 조선공산당의 분열

춘경원에서: 조선공산당의 분열

당 중앙의 주류 세력이었던 레닌주의 동맹은 1928년 2월에 별도의 당대회를 치르게 된다. 1925년 4월 창당 이후 하나의 조선공산당을 유지하던 조선의 사회주의 운동은 양당 체제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조선공산당은 해산 결정이 내려진 1928년 12월까지 당의 분열 상태를 극복하지 못하였고, 코민테른이 2차 당대회 결정을 내렸던 1927년 4월 결정서에 근거하여 서로가 적법한 계승자의 지위를 두고 다투었다.

[낡은책] 공산주의도, 자본주의도 싫어한 노동운동가의 자서전

[낡은책] 공산주의도, 자본주의도 싫어한 노동운동가의 자서전

가족 관계 때문에 김태엽은 반공주의자의 변모를 여지없이 드러낸다. 김태엽은 해방 직후 전평에도 많은 동료들을 두고 있었지만 남로당의 정치놀음에 이용물 정도로 여기고 절대 기웃거리지 않았다. 대한노총에 들어가 부산지부장을 지냈지만 그 마저도 우익 정치 모리배들의 제물이 되자 뛰쳐나왔다.

[최인기의 빈민운동사]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까지

[최인기의 빈민운동사]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까지

우리 사회 반(反) 빈곤운동의 주동력이었던 철거민운동과 노점상운동의 흐름을 살펴보고 우리 사회의 변화된 양상과 이 과정 속에서 숨을 거둔 열사들의 희생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를 짚어보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