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3대 대중투쟁을 꼽는다면 무엇보다 1919년 3.1만세운동을 꼽을 수 있다. 그렇다면 나머지 두 투쟁은 무엇일까? 시기순으로 말한다면 1926년 6.10만세투쟁과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그것이다. 3.1운동은 일제의 식민지통치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조선공산당은 1927년 12월과 1928년 2월에 각각 두 개의 3차 당대회를 치렀다. 이로써 일본 제국주의로부터의 독립을 위한 민족해방과 노동자·농민의 해방을 목적하는 혁명가들의 비밀 결사체였던 조선공산당은 엄중한 조직적 분열을 맞이했다.
조선공산당의 3차 당대회는 고양군 아현리 537번지, 즉 현재의 마포구 아현동 331-12번지에 위치한 김병환의 하숙방에서 개최되었다. 지금껏 이 장소는 나에게는 막연히 아현동의 재개발로 인하여 새로 지어진 고층아파트 단지 속 어딘가에 편입된 것으로 생각했다.
당 중앙의 주류 세력이었던 레닌주의 동맹은 1928년 2월에 별도의 당대회를 치르게 된다. 1925년 4월 창당 이후 하나의 조선공산당을 유지하던 조선의 사회주의 운동은 양당 체제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조선공산당은 해산 결정이 내려진 1928년 12월까지 당의 분열 상태를 극복하지 못하였고, 코민테른이 2차 당대회 결정을 내렸던 1927년 4월 결정서에 근거하여 서로가 적법한 계승자의 지위를 두고 다투었다.
1927년 11월 6일 이 사직공원에 산책을 나와 한담을 나누는 것처럼 보이는 두 사내가 만났다. 그들은 양명과 김세연이었다. 이 둘은 비밀결사 조선공산당의 긴급한 현안을 가지고 만났다. 그 현안이란 다름 아닌 중앙지도부의 조직과 관련한 것이었다.
일제하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에서 창당에서 해산까지 당의 주요한 직책을 맡으면서 함께했던 사람들의 지역이 있다. 바로 안동이다. 다른 많은 지역도 일제강점기 내내 사회주의 운동에 종사했으나, 안동과 같이 창당과 해산의 과정에서 조직의 주요간부로 활동한 지역은 흔치 않다.
1925년 4월 17일 식민지 조선의 한복판인 경성의 중국요릿집에서 조선공산당이 비밀리에 창당되었다. 올해는 그로부터 딱 100년이 된 해다. 식민지 시절 가장 선두에 서서 치열하게 민족해방투쟁을 전개했던 사회주의 운동세력의 중심에는 조선공산당이 있었다.
기억은 엇갈리기 마련이다. 더구나 기록도 일관되지 않았다. 조선공산당 2차 당 대회가 그렇다. 우선 일제 관헌이 자료에는 당 대회 장소가 서대문형무소밖 독립문 부근 (김준연등 32인 예심종결결정), 서대문 형무소 부근 (김준연등 28인 판결문), 혹은 천연동 (김철수 신문조서 3회) 으로 기록되었다. 일반적으로 사건장소가 주소까지 특정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회의장소가 특정되지 않고 있다.
아직 여름의 기운이 다 가시지 않은 1926년 9월 3일 정오의 기온은 24.6도였다. 삼선평으로 넘어가기 위해 지나야 하는 혜화문 부근 산속에 은밀하게 세 명의 사내가 모였다. 그 사내들의 이름은 김철수, 원우관, 신동호였다. 이들은 이곳에 모인 이유는 조선공산당의 중앙집행위원회 재건을 위해서였다.
아마도 김재봉은 일제경찰의 허를 찌르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 같다. 그가 몸을 숨기기로 결정한 곳은 도심의 한복판, 그것도 유흥지구이기에 유동인구가 많아서 낯선 이가 돌아다녀도 의심을 받지 않을 곳이면서 조직과 연루된 사람이 아닌 의외의 인물의 집을 선택한 것이다. 낙원동 195번지에 몸을 의탁한 곳은 김미산의 집이었다. 김미산은 명월관에서 일하는 여급이었다.
참세상은 여러분의 소중한 제보를 이메일을 통해 받고 있습니다.
독자제보 E-Mailnewscham@gmail.com
이메일
비밀번호
이메일로 회원가입비밀번호 찾기
가입하면 기사에 댓글을 쓸 수 있습니다. 입력한 이메일로 인증 메일을 보내 드립니다.
닉네임 (댓글에 표시됩니다)
비밀번호 (8자 이상)
웹사이트
이미 가입했다면 로그인
가입한 이메일을 입력하면 비밀번호 재설정 메일을 보내 드립니다.
로그인으로 돌아가기
새 비밀번호 (8자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