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 민주당 집권 때 잠시 문교부 차관까지 역임했던 법철학자 이항녕은 자신의 친일행적을 죽을 때까지 반성하고 살았던 선비다. 그 자신이 교육에 들어선 계기를 “해방 되면서 나의 과거 행적이 부끄러워 세상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어 교육기관에 피신했다”고 표현했다.
아마 1980년대 초반이었을 것이다. 친일파였던 한 시인은 ‘해방이 그렇게 빨리 될지 몰랐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중경에서 임시정부를 이끌던 김구도 ‘해방이 된 것은 좋은 일이지만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왔다’는 말을 했다. 물론 이 두 사람이 생각하는 해방이후 자신들이 나가고자 하는 방향은 달랐을 테지만 일단은 해방이 생각보다 일찍 왔다는 느낌은 공통적이었다. 어쨌든 해방을 맞아 모두들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데 여념이 없는 동안 친일파들은 어떻게 하면 자신의 죄과를 덜 수 있을까에 온 신경을 집중해야만 했다. 그 고민의 결과는 첫째, 근신하면서 때를 기다리는 것이었고, 둘째는 같은 처지의 사람들끼리 모여 정당을 만드는 것이니 한민당이 그 결과물이다. 그들은 이승만에게 매달 정기적으로 15만원의 정치자금을 지원하였다. 물론 임정에 대해서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임정이 귀국하기 전에 이미 귀국지사후원회를 조직하여 1차로 9백만 원을 만들어 정치자금으로 전달하였다. 한민당이 이처럼 이승만과 임정에게 정치자금을 후원한 것은 해방 후 정치적으로 살아남기 위한 것임은 물론이다. 세번째 방법은 재산의 일부를 정치조직이나 개인에게 주는 것이니 해방이 되고 본격적인 건국사업을 진행하던 건국준비위원회 건물이나 김구가 45년 11월 환국한 후 생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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