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드롯츠 디스코드>(조 바이든 정부의 경제정책, 금융시장, 국제정세 등을 다루는 블룸버그의 인기 경제 팟캐스트)에서의 대화가 10년 전 마르틴 키친(Martin Kitchen)의 알베르트 슈페어 전기 서평을 떠올리게 했다. 그 글을 다시 읽으면서 나는 그것이 아마도 동시대적인 울림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966년 10월 1일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각, 제3제국(나치 독일)의 전 군수장관 알베르트 슈페어(Albert Speer)는 슈판다우 교도소에서 석방되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는 여섯 자녀의 어머니이자 한때 나치의 ‘다산상’을 자랑스럽게 받았던, 오랜 세월 고통을 견뎌온 아내 마르가레테를 거의 알아보지도 않은 채, 한 노(老) 산업가 친구가 이 날을 위해 제공한 고급 검은색 메르세데스 뒷좌석에서 전 세계 언론의 플래시와 카메라를 마주했다. 전범재판소(뉘른베르크 재판소)에 의해 전쟁범죄와 인도에 반한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슈페어는, 법정에서 다른 나치 괴물들과 자신을 교묘하게 구분 지은 변론 덕분에 사형을 면했다. 그는 이후 인생의 마지막 15년을 “선량한 나치”로서 자신의 이미지를 다듬는 데 바쳤다. 세 권의 베스트셀러와 <데어 슈피겔>(Der Spiegel), <플레이보이>(Playboy) 등을 포함한 수익성 높은 인터뷰들을 남긴 그는, 1981년 9월 1일 런던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날 그는 아침 내내 BBC와 인터뷰를 했고, 저녁에는 역사학자 노먼 스톤(Norman Stone)과 식사를 한 뒤, 아름다운 젊은 애인의 곁에서 비교적 대놓고 임종을 맞았다. 히틀러의 가장 가까운 동료이자 독일 전시 군수 “기적”의 설계자였던 그는, 자신의 조명을 받는 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포스트모던 시대의 유명 인사로 다시 빚어냈다.
슈페어는 이미 뉘른베르크 법정에서 스스로를 새로운 기술관료 시대의 참회하는 예언자처럼 제시했다. 그는 법정 최후 진술을 이용해, “해방되지 않은 공학과 과학이 인간을 파괴하는 작업을 완수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힘은 개인의 자유와 자기 신뢰뿐”이라고 세계에 경고했다. 히로시마와 아우슈비츠 이후, 기술과 권력의 결합은 문화적 비평의 강박적인 주제가 되었고, 이는 슈페어에게 두 가지 이점을 제공했다. 그것은 연합군의 전략폭격을 그의 법정 옆자리에 함께 세움으로써 그 자신에 대한 시선을 흐리게 했고, 동시에 베를린 유대인 수만 명의 강제이송과 강제수용소 노동력의 살인적 착취에 있어 그 자신의 구체적 책임에 대한 질문에서 주의를 돌렸다.
역설적으로도, 슈페어는 개인적 책임의 문제를 흐리게 하면서도 자신을 나치 전시 경제의 필수적 전략가로 묘사하는 데 성공했다. 1942년 2월부터 그가 지휘를 맡은 이후, 전차와 전투기의 생산량은 급증했고, V2 로켓 같은 선구적 기술 혁신이 나치 조립라인에서 대량 생산되기 시작했다. 그는 1945년, 아직 기소되기 전, 전후 재건에서 핵심적 역할을 맡을 수 있으리라 진지하게 상상했고, 비시 프랑스(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와 협력한 프랑스 괴뢰정부)의 협력자 친구들에게 생산을 외주 준 것을 근거로 자신을 유럽 통합의 선구자처럼 포장하기까지 했다. 이것이 바로 그의 법정 변론이었다. 어떻게 누가 그를, 이처럼 진보적이고 개방적이며 현대적인 사람을, 약물 중독에 탐욕스러운 괴링(Goering)이나 <데어 슈튀르머>(Der Stürmer)의 혐오스러운 반유대주의 편집자 율리우스 슈트라이허(Julius Streicher) 같은 인간들과 같은 부류로 분류할 수 있겠는가?
이 이미지는 전쟁 직후 수십 년간 역사서술을 지배했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이 허상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슈페어의 공모 부인에 의문이 제기되었다. 실제로 그는 독일 수도의 아리아화 과정과 1942~43년의 집단학살적 식량배급 및 노동력 징발 프로그램에 관여한 것으로 드러났으며, 1944년에는 그와 그의 참모진이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수십만 명의 헝가리 유대인 가운데 노예노동력을 선별하기 위해 매일 SS(나치 무장친위대)와 협력했다. 1995년, 기타 세레니(Gitta Sereny)는 슈페어가 진실과 씨름하며, 1943년 10월 6일 포젠에서 히믈러(Himmler, 무장친위대 수장)가 지역 총독들에게 절멸 프로그램의 공포스러운 비밀을 처음 밝힐 때 자신이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하려 한 노력 등을 분석한, 고된 작업이지만 흥미로운 책을 출간했다. 지난 15년 동안 여러 경제사학자들은 슈페어 신화를 떠받치던 토대를 해체했다. 그들은 “군수 기적”이 사실상 유럽 전역에서 노동력, 원자재, 자본을 폭력적으로 동원하여 이룬 평범한 산업 공정이었으며, 괴벨스의 선전으로 마법처럼 포장된 것이었음을 보여주었다.
마르틴 키친의 《슈페어: 히틀러의 건축가》(Speer: Hitler’s Architect)는 이 수정주의 역사서술을 전기로 전환하는 일을 성실하게 수행했다. 그 결과는 공허하고, 자기애적이며, 강박적으로 야망에 사로잡힌 인물의 파괴적인 초상이다. 키친은 슈페어가 권력을 향해 탐욕스럽게 나아간 과정과 스스로를 끊임없이 만들어가는 모습을 연대기적으로 기술하면서, 로베르트 무질(Robert Musil)의 《특성 없는 인간》(The Man Without Qualities)을 인용한다. 이런 고급 문화적 인용은, 우려스럽게도, 슈페어 자신의 취향에 너무나 잘 어울렸을 것이다. 슈판다우 감옥에서 슈페어가 주문한 사치품 목록-1급 던힐 파이프, 송로버섯을 곁들인 푸아그라, 벨루가 캐비어, 예거 르쿨트르 시계-을 읽고 있자면, 오히려 브렛 이스턴 엘리스(Bret Easton Ellis)가 묘사한, 살인을 저지르며 제품 집착에 사로잡힌 월가의 야피를 그린 《아메리칸 사이코》(American Psycho)가 떠오르게 된다. 슈페어의 고급 문화 취향, 고전 음악 후원, 종교적 심오함에 대한 관심조차 그를 잘 아는 이들에게는 늘 피상적인 느낌을 남겼다.
슈페어 신화는 슈페어 혼자만의 창조물이 아니었다. 마르틴 키친의 연구는 슈페어를 만들어낸 네트워크를 추적할 때 가장 빛난다. 1920년대 젊은 건축가였던 슈페어는 예술과 공예를 옹호하던 저명한 건축가 하인리히 테세노(Heinrich Tessenow)의 지원을 받았다. 처음에는 정치색 없는 미학주의자로 삶을 시작한 슈페어는, 대공황 첫 겨울의 참담한 혼란 속에서 히틀러 운동의 역동성에 휩쓸렸고, 1931년 3월에 나치당에 입당했다. 히틀러 정권이 등장하자, 겸손은 유행이 아니었고, 슈페어는 자신의 충성을 고급 디자이너 파울 루트비히 트로스트(Paul Ludwig Troost)에게로 옮겼다. 그의 첫 번째 큰 기회는 괴벨스의 베를린 별장 개조와 히틀러의 베를린 집무실 개보수 작업을 수주하면서 찾아왔다. 이 작업은 슈페어를 히틀러와 매일 접촉하게 만들었고, 히틀러는 그의 젊은 에너지와 카리스마에 매료되었다. 그는 뉘른베르크에서 열리는 거대한 당 대회장을 설계했고, 과시적인 신 제국수상관 공사를 맡아 슈페어는 히틀러의 곁에 확고히 자리 잡았다. 1937년 1월, 슈페어와 히틀러는 자신들의 대작이 될 계획, 즉 새로운 독일 제국의 수도 게르마니아(Germania)로 베를린을 재건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 계획은 나폴레옹의 개선문을 가로지를 정도로 큰 300피트가 넘는 개선기념물과,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의 16배 크기로 18만 명의 대표단을 수용할 수 있는 대회당을 포함하고 있었다.
슈페어의 베를린 계획은 단지 나치 독일의 공식 기구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AEG 같은 전기공학 대기업과 IG 파르벤 같은 화학 대재벌 등 독일 기업들을 위한 호화로운 신 사무공간도 배정해두었다. 기업과 나치당, 국가 기구 사이를 기민하게 오가던 역동적인 기술관료들은 히틀러 정권에서 핵심 인물이었다. 아우토반의 기술자이자 설계자였던 프리츠 토트(Fritz Todt)는 없어서는 안 될 중개인으로 자리매김했다. 히틀러는 1940년 3월, 전시 군수 및 탄약 장관으로 그를 지명했다. 한편 슈페어는 수도의 방공호와 군수 공장을 건설하는 책임을 맡았다. 1941~42년 겨울의 위기 속에서 토트가 의문의 사고로 사망하자, 히틀러는 슈페어에게 그 자리를 맡겼다. 베르마흐트가 러시아의 눈 속에 갇히고, 서방에서는 미국과의 전쟁이 임박해지던 시점이었다. 이제 슈페어는 독일 산업을 전쟁 수행에 동원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1945년 이후, 독일 경제계는 스스로의 무고함에 대한 신화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1990년대 강제노동 소송을 통해 생산된 방대한 역사 기록들이 보여주듯, 강제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하지 않은 주요 산업기업을 찾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놀라울 정도로 많은 기업들이 심지어 SS와 계약을 맺고 강제수용소의 유대인 수감자를 노동력으로 사용했다. 기업인들은 단순히 수익을 좇는 편협한 이들이 아니었고, “자기 일만 했다”고 보기 어렵다. 슈페어의 조직의 일원으로서, 그들은 독일 경제를 전쟁 수행을 위해 직접 설계하고 동원했다. 이들 대부분은 독일의 승리를 신념으로 삼은 민족주의자였고, 일부는 나치 이데올로그였다. 이들 모두는 스탈린의 소련을 두려워할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슈페어가 조직한 체계는 이 모든 충동들을 더 추상적인 윤리와 결합시켰다. 그 체계의 참여자들은 “성과”라는 기준에 따라 살고 죽었다. 통계와 생산 기록이 그들의 종교였고, 기술적 향상이 그들의 주문이었으며, 파괴적 혁신이 그들의 마법이었다. 단기적인 성과에 대한 집착은 세계대전이라는 상황에서 독일의 전략적 전망은 물론, 사용된 수단에 대한 어떤 윤리적 성찰도 배제했다. 군수 기적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었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1961년 예루살렘에서 열린 아이히만(Eichmann) 재판에서 목격한 것을 현대 인간 조건에 대한 자신의 이론과 연결하고자 하면서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이라는 논쟁적인 표현을 만들어냈고, 이를 통해 나치 인물의 무사유성과 논리 부재를 포착하고자 했다. 아렌트의 기록에 따르면, 슈페어가 출소 후 쓴 슈판다우 일기는 그가 1975년 12월 사망하기 전 읽은 마지막 책들 중 하나였다. 과연 아렌트는 슈페어를 아이히만보다도 더 본질적인 나치적 평범성의 사례로 보았을까? 혹은, 슈페어는 아이히만과는 달리 자신의 행동을 더 큰 사회적, 기술적 힘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었던, 훨씬 더 불편한 존재였던 것일까? 그 자신이 저지른 행위를 정당화하고 교수형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만든 산업적·기술적 근대성의 신화를 형성하는 데 기여한, 불편할 정도로 설득력 있는 “사고 지도자(thought leader)”였던 것은 아닐까?
[번역] 이꽃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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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투즈(Adam Tooze)는 컬럼비아대학 교수이며 경제, 지정학 및 역사에 관한 차트북을 발행하고 있다. ⟪붕괴(Crashed)⟫, ⟪대격변(The Deluge)⟫, ⟪셧다운(Shutdown)⟫의 저자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