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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권리로서의 “문화적 권리”

'문화적 권리'는 한국인에게는 아직도 생소한 개념인 듯 싶다. 이 권리의 내용이나 함의, 그와 관련된 쟁점이 무엇인지 관심을 드러내는 사람들도 적으며, 문화적 권리가 세인의 관심을 끌며 논의 대상으로 부상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 문화적 권리에 대한 관심과 인식이 낮은 것은 물론 한국의 사정만은 아니다. 10년 전 필리벡은 문화적 권리는 "인권 가족의 신데렐라"라고 한 적이 있는데, 신데렐라가 계모와 언니들에 의해 뒷방으로 내몰려 지내듯 문화적 권리 역시 다른 인권에 비해 늘 부차적인 위치라는 지적이었다. 니에크도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가 근래에 국제적인 논의 주제로 떠올랐으나 법률적 집행가능성의 견지에서 보면 그중 문화적 권리가 가장 덜 발달한 범주임을 밝힌 적이 있다.

문화적 권리에 대한 경과보고

“문화적 권리”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낮고 그에 대한 논의가 부족한 데에는 그만한 사연이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는 정치나 경제 등 비중이 비슷한 다른 관심사에 비해 문화를 덜 중요한 것으로 취급해왔다. 남북전쟁을 겪어 먹고살기도 어려웠던 50년대, 경제개발이 일어나던 1960년대와 70년대를 거치는 동안 문화는 늘 경제의 깃발에 가려져 아예 보이지 않거나 드러난다고 하더라도 일부 소수에게나 허용되는 것일 뿐이었다. 경제성장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80년대에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때도 한국사회는 여전히 경제발전이 목표였고, 이 결과 문화는 경제의 뒷전으로 내몰리곤 했다. 정치와의 관계에서도 문화의 위상은 낮았다. 1980년대 중반까지 한국사회를 장악한 것은 정치였다. 사회의 3대 층위라 할 정치, 경제, 문화의 관계는 그래서 정치에 대한 문화와 경제의 종속으로 특징지어진다. 문화는 용도를 인정받을 때라도 정치의 ‘시녀’로 전락했을 뿐이다.

물론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문화로의 전환’이 일어나 문화의 위상이 높아진 면도 없지는 않다. 상품 판촉을 위한 디자인 혁신 등 상품생산에서 미학적 고려가 중요해지고, 광고와 홍보의 중요성이 커지고, 여가생활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문화산업에 기반을 둔 대중문화가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80년대 후반 이후 형식적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정치적 환경이 조성되면서 문화가 정치의 파트너라는 인식이나, 문화가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원천이라는 인식도 생겨났다. 그러나 이것은 기본적으로 문화를 경제의 수단으로 보거나 정치의 활용 대상으로 보는 것이라는 점에서 문화를 그 자체로 중요시한 것은 아니다.

문화와 문화적 권리를 개념적으로 규명하기 쉽지 않은 것도 문화적 권리에 관한 논의가 제대로 진척되지 못한 이유일 것이다. 사실 문화란 무엇인지, 어떤 기준으로 문화와 문화 아닌 것을 구분해야 하는지 근거를 대기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문화적 권리를 다른 권리와 구분하는 기준이 될 문화 자체가 규정하기 어렵다면 문화적 권리를 설명하는 것도 어려워지고 문화적 권리를 사회적 쟁점으로 떠올리기도 어려운 일이 된다. 사회적 쟁점이 되려면 대중이 쉽게 수용할 수 있는 개념적 명료성을 지녀야 하는데 문화적 권리는 그런 명료성을 결여한 듯 보이기 때문이다. 또, 한국이 처한 국제적 상황도 문화적 권리가 사회적 관심의 바깥에 놓이게 하는 데 적잖은 작용을 했다. 특히, 1997년 외환위기와 함께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는 조건으로 급속도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펼치게 되면서 ‘문화산업론’과 같은, 문화를 경제의 하위 범주로만 보는 입장이 지배적 경향으로 대두함에 따라 문화와 문화적 권리에 관한 외면과 무관심은 더욱 심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이제 더 이상 문화와 문화적 권리의 중요성을 외면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듯하다. 압축적 근대화는 우리 모두를 이윤만 추구하는 사람들로 만들어 서로간의 아귀다툼으로 몰아넣었다. 우리가 삶의 여유, 호혜정신을 대부분 잃어버린 것은 “경제적 이성”의 노예가 되어 돈이 되지 않으면 무엇이든 가치가 없다고 팽개치고, 돈이 되면 아무리 소중한 것이라도 바로 상품으로 전락시켜버리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삶을 바꾸는 일은 근본적으로 삶의 의미와 가치를 다시 돌아보고 삶의 거친 결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치는 문화적 접근, 즉 새로운 문화를 만드는 일을 요구한다. 새로운 문화를 가꾸고, 더 나은 문화를 추구하며,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문화적 권리를 신장하는 일이 그동안 정치와 경제의 발전을 사회 발전의 지배적 모델로 삼은 탓에 야기된 문제들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일 것이다. 문화적 권리를 신장하려면 그 권리를 사회적으로 보장할 방도, 예컨대 법률적ㆍ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내 논의가 별로 진척되지 못한 상황에서 우선 문화적 권리의 개념을 규명하고, 문화적 권리가 인권 가운데 어떤 위상을 차지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문화적 권리”를 보는 관점들

문화에서 인간 권리의 진작과 탄압은 어떻게 이루어지며, 어떤 양상을 띠는가? 문화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서 이에 대한 답변은 크게 달라질 것이다. 문화를 보는 관점은 크게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창조성을 중시하는 문화주의적 관점, 이데올로기론의 관점, 권력/욕망이론의 관점이 그것이다.

첫째, 문화주의적 관점에서 문화는 인간 본연의 창조적 능력 또는 그 발현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문화를 인간 본연의 능력이 어떤 완벽한 수준에서 성취된 것, 인간적 가치가 가장 잘 구현된 것으로 간주하는 고급문화 시각이고 다른 하나는 문화를 인류 보편의 역능으로 보는 식이다. 따라서 문화주의 관점 안에는 상반된 이런 두 시각에 따라서 엘리트주의적 접근과 문화민주주의 접근이 공존한다. 엘리트주의는 배타적 엘리트주의와 시혜적 엘리트주의로 나뉠 수 있다. 전자가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이 문화를 독점하고자 하는 것으로서 문화적 생산에 필요한 인적 물적 자원의 독점 형태를 띤다면, 후자의 경우는 소수가 성취한 문화를 대중에게 보급하고자 하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에 등장하는 문화정책은 “문화 민주화” 정책인데, 고급문화의 대중적 분배 혹은 고급문화에 대한 대중 접근권의 확대라는 형태를 띤다.

다른 한편 문화를 인간본연의 창조성이라고 보더라도 누구나 문화적 창조성을 가질 수 있다고 보는 관점에서는 문화민주주의라는 관점으로 문화정책을 펼친다. 이 두 상반된 태도를 모두 문화주의라고 간주할 수 있는 까닭은 문화를 귀중하게 여기는 태도, 즉 문화를 가치 있는 것으로 보는 데서 동일하기 때문이다. 문화주의 관점에서 문화적 권리의 관건이 되는 것은 고급한 것이든 아니든 문화에 대한 접근권과 문화적 생활 또는 활동에 대한 참여권을 가지는가 않는가 여부이다. 문화는 여기서 소유 혹은 향유의 대상이며 문화적 권리는 소유나 향유의 기획 획득 여부의 문제가 된다.

둘째, 이데올로기론의 관점에서 볼 때 “문화”는 지배의 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여기서 문화는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 결백한 어떤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사회지배의 중요한 기제이거나 사회적 모순이 가동되고 사회적 저항이 일어날 수 있는 장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문화적 권리는 사회적 지배에 대해 저항할 수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와 연결될 수 있을 것 같다. 이 점과 관련하여 우리 사회에서 문제가 되는 쟁점은 사상의 자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데올로기론에서 볼 때 문화는 지배의 문제인 만큼 지배를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은 지배의 재생산을 강요하는 체제와는 다른 체제를 사고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이런 사고는 사상의 자유 없이는 불가능하다. 현존하는 체제를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체제로 인정할 것을 강요할 수 없다면 사상의 자유는 문화적 권리로 보장되어야 할 것이다.

문화적 권리는 문화적 생존권

셋째, 문화를 욕망 또는 쾌락의 관점에서 이해할 때, 문화에 대한 ‘권력이론’의 접근이 나온다.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본 문화가 과학적 사유와 인식의 문제라고 한다면, 권력이론의 관점에서 본 문화는 신체적 반응의 문제이다. 이때 문화는 욕망이나 쾌락 생산이 어떤 방식으로 배치되느냐의 문제이며, 여기서 일어나는 운동은 기존의 배치에 머물러 있느냐, 새로운 배치로 전환되느냐의 문제가 된다. 이때 중요한 문화적 권리는 표현의 자유가 아닐까 싶다. 신체적 반응은 사상의 자유보다는 표현의 자유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겠기 때문이다. 물론 표현의 자유가 사상의 자유와 전적으로 무관한 것은 아니다. 예컨대 예술활동과 관련하여 한국의 현존 국가보안법이 주로 문제삼는 것은 많은 경우 “사상 문제”이다. 좌파적 관점을 표현한 것으로 사찰 대상이 되고 국가보안법에 의해 입건되어 구속되는 경우 문제로 떠오르는 것은 이해관계 문제에서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 즉 어느 편을 지지하고 어느 편 이익을 대변하느냐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표현의 자유는 사상의 자유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다른 한편 표현의 방식에 고유한 쟁점도 있다. 예를 들어 1997년에 세간의 관심을 끈 <빨간 마후라> 사건, 이현세의 만화 <천국의 신화>, 좀더 최근의 김인규 교사의 나체사진 홈페이지 게재 사건 등은 이들 ‘작품들’을 포르노그라피로 규정함으로써 표현 자체에 검열을 가하려는 움직임이었다. 여기서 관건은 어떤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라는 문제보다는 특정한 표현이 쾌나 불쾌를 야기하느냐, 독자나 시청자의 욕망을 어떻게 유도하느냐이다.

넷째, 위 3가지 관점과 부분적으로 연관되어 있지만 다른 차원의 문화적 권리 문제가 있다. 문화적 생존권이 그것이다. 이 생존권과 함께 중요하게 부각되는 것은 문화적 종 다양성을 유지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 개별 문화권의 관점에서 볼 때는 자신의 문화가 과연 생존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문화적 생존권은 특히 약소문화, 소수문화에 관건이 되는 권리이다. 문화를 고급문화 중심으로 보거나, 발달한 사회, 국가, 문명권의 특권으로 볼 경우 문화는 서로 다른 사회들을 차별하는 근거가 된다. 세계화가 고도로 진행된 오늘 문화는 더 이상 하나의 사회, 하나의 국민국가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특히 자본의 세계화로 국민국가의 시장개방 정도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만큼 문화의 교류는 많은 문제들을 낳고 있다. 문화분야의 자본 침투 현상이 심화하면서 문화제국주의에 의한 문화시장의 침투는 그중 가장 큰 문제에 속한다. 이런 상황에서 문화적 생존권은 갈수록 그 중요성이 커져만가는 문화적 권리가 아닐까 싶다. 문화적 생존권은 문화적 자결권 또는 주권과 깊게 연관되어 있다. 문화적 자결권을 행사하지 못할 경우 문화적 생존권은 보장받기 어렵다. 스크린쿼터제 철폐 여부를 둘러싸고 국내 영화인들과 사회운동단체가 적극 나선 것도 이 점을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문화적 권리에 대한 사회적 인식

개념적 지형도를 대충 맞게 그려낼 수 있다 해도 온전한 논의가 전개되려면 문화적 권리에 대한 사회적 이해가 형성되어야 하는데, 한국에서 문화적 권리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한심하다 할 정도로 낮다. 이는 정부조직 구도에서 문화부문의 위상이 매우 낮은 데서 그대로 드러난다. 프랑스에서는 문화부의 정부 내 서열이 정권에 따라 1위가 될 때도 있다지만 한국에서는 문화에 대한 통합적 시각이 없다고 해야 할 정도로 문화에 대한 인식이 낮다. 문화와 문화적 권리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높이는 일, 정부기구나 사회단체가 공적으로 문화적 권리를 인정하도록 하는 일은 이런 상황에서 매우 중요한 과제로 보인다.

최근 들어와서 다행히 문화의 중요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형성되고 있다는 조짐은 보인다. 우선 문화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고 있다. 이런 관심의 증가는 “문화연구”(Cultural Studies)라고 하는, 문화 문제를 화두로 삼는 비판적 인문사회과학의 한 조류가 1960년대 이후 꾸준히 영향력을 쌓아 1980년대 이후부터는 세계적으로 확산된 데서도 확인된다. 1980년대 후반 이후 냉전구도가 와해된 것도 문화에 대한 태도들을 바꾼 중요한 요인이다. 냉전구도의 와해로 체제의 우위를 비교할 필요성이 훨씬 줄어들었고, 경제 개발을 위해 문화를 희생시켜도 된다고 하는 냉전적 사고와 태도에도 변화가 생긴 것이다. 물론 다른 한편에서는 신자유주의의 사회 지배가 강화됨에 따라 문화를 경제적 이윤 창출의 수단으로 보는 문화산업론과 같은 입장이 대두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 과정에서 문화가 지닌 창조적 능력에 대한 인식과 함께 문화 자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다. 생태론이 대안적 문명론으로 등장한 것 또한 문화의 중요성과 문화적 권리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강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최근에 들어와서 개별 국가나 각 국의 시민사회가 2차 세계대전 이후 많은 나라들이 채택한, 경제성장을 기축으로 한 사회발전 전략에 대해 제동을 걸기 시작하고 있는 것도 이 변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상 언급한 일련의 변화는 사회발전에 대한 문화적 접근이 등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새로운 발전 모델은 압축적 근대화 또는 경제 중심의 발전 모델 대신 “지속 가능한 발전”을 지향한다. 이런 생태론적 발전 모델이 문화적 접근으로 이어지는 것은 사회를 생태계로 파악하게 되면 전통문화, 문화적 정체성, 사회적 창조성 등을 파괴하는 각종 개발을 제동을 걸고 발전을 삶의 의미와 가치, 모습을 존중하고 가꾸는 문제와 연관짓는 태도와 노력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런 접근은 이윤 창출만을 노리며 사회생태계와 그 자원의 보살핌을 외면하는 경제적 접근과는 당연히 구분된다. 경제적 접근이 폴라니가 <거대한 변환>에서 지적한 대로 사회적 안전망을 파괴하여 삶의 질서를 무너뜨려 버린다면, 문화적 접근은 삶의 질에 대한 배려를 강조함으로써 사회생태계의 보존을 주요한 목표로 삼는다고 할 수 있다.

사회적 권리로서의 문화적 권리

문화적 권리는 왜 사회적 권리인가? 문화적 권리는 1960년대에 채택된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에 명시적으로 포함됨으로써 보편적 권리의 일환으로 국제적인 공인을 받았다. 그런데 이때 문화적 권리가 국제규약 A에 포함되었다는 것은 국제규약 B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 즉 B 규약에 포함된 정치적 시민적 권리와는 다른 함의를 지닌 권리로 인식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A 규약과 B 규약에 담긴 권리들은 서로 어떤 차이가 있는가? A 규약의 권리가 사회적 권리라면 B 규약의 권리는 정치적 권리라는 점이다. 그런데 사회적 권리와 정치적 권리의 차이는 무엇인가? 후자의 경우 권리가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형태로 정의되는 반면, 전자의 경우에는 긍정적, 적극적 형태를 띤다. 정치적, 시민적 권리에서 강조되는 것은 주로 전근대적 권력이 행사하는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정치적, 시민적 권리가 자유시민의 권력을 만들어낸 (정치적) 자유주의의 부상에서 나온 인권의 개념이라면, A 규약에서 언급하는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자유는 자유주의가 지배적 세력으로 부상한 뒤 노동자계급, 여성, 소수자 등이 사회적 불평등을 극복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인권 개념에 해당한다. 경제적 권리는 주로 노동을 할 권리와 관련되어 있으며, 사회적 권리는 복지를 누릴 권리, 그리고 문화적 권리는 인간들이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자신들의 원하는 방식으로 살 수 있는 권리를 의미했던 것이다.

언뜻 보면 A 규약이 문화적 권리와 경제적 권리, 사회적 권리와 구분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가 통상 사용하는 ‘사회적’이라는 말은 꼭 복지 등의 구체적인 분야만을 포괄하지 않고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기술적 차원 등 사회 안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을 포괄한다고 봐야 하며, 이런 점에서 사회적 권리는 한편으로는 경제적, 문화적 권리와 구분되는 인권의 한 범주를 구성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A 규약에서 말하는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는 물론이고 정치적, 시민적 권리도 모두 포괄하는 총칭적 권리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다만 한편으로 정치적, 시민적 권리와 다른 한편으로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는 그 역사와 지향에 있어서 구분될 필요가 있기 때문에 B 규약에 포함된 권리들을 정치적 권리로, A 규약에 포함된 권리들을 사회적 권리로 규정하는 것은 여전히 유효하고 편리해 보인다.

문화적 권리 쟁취의 필요성

문화적 권리는 따라서 사회적 권리의 중요한 일원이다. 하지만 다른 사회적 권리들과 문화적 권리의 차이는 무엇인가? 위에서 이해한 바로 문화는 삶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형태를 만들어내는 어떤 것이다. 이것은 경제적 가치나 복지와는 다른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따라서 사회적 권리로서의 문화적 권리는 삶의 의미와 가치를 높이거나 삶의 모습을 가꾸는 사회적 권리일 것이며, 이에 따라서 문화적 권리를 누리기 위해서는 삶을 가꿀 수 있는 사회적 공공성, 기반, 사회적 자유 등이 제공되고 보장되어야 한다. 오늘 한국에서 이와 같은 사회적 권리로서의 문화적 권리는 과연 얼마나 보장되고 있는 것일까?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여성, 외국인노동자, 청소년, 노인, 장애자, 동성애자 등 우리 사회의 주체들은 어떤 문화적 권리를 보장받고 있는 것일까? 대부분의 노동자와 농민, 도시빈민과 외국인노동자, 청소년과 노인에게 문화적 권리는 그 존재조차 알려져 있지 않은 상태라고 해야 정확한 진단이 아닐까?

혹자는 먹고사는 것이 급해서, 혹자는 국가보안법 철폐와 과거사 진상 규명이 급해서, 혹자는 생태환경 파괴 저지가 급해서 문화적 권리에 대해서는 신경 쓸 여유가 없다고 할 것이다. 모두 ‘금강산식후경’의 태도로 문화와 문화적 권리를 바라보는 태도다. 그러나 이제 이런 태도는 지양할 때가 되었다. 삶의 의미와 가치를 되찾지 못하고, 삶의 거친 결을 다듬는 노력을 하지 않을 때 한국인의 삶의 질은 결코 나아질 수 없다. 그뿐이겠는가. 우리가 문화적 권리 쟁취의 시급함을 잊고 있는 동안 도서관, 박물관, 미술관, 미디어센터, 노동자문화센터, 문화원, 문화회관, 향교 등 문화적 활동을 할 수 있는 수없이 많은 공공문화기반시설이 우리의 삶과는 유리된 채 모두 다른 이익과 권력과 욕망을 지닌 사람들의 손안에 놀아날 것이다. 이들 시설이 방치되고 있는 사이에 노동자, 농민, 빈민, 여성, 청소년, 노인 등은 모두 시장에서 문화를 구입해야 하는 문화소비자로 전락해야 하며, 가뜩이나 얇은 주머니 속으로 더 깊숙이 손을 집어넣을 능력이 없으면 이들에게 문화는 ‘나의 삶’과는 관계없는 것이 되고 만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문화적 권리 쟁취를 외면할 경우 사회운동은 실로 중대한 과제 하나를 방기하는 꼴이 된다. 사회운동이 문화적 권리를 쟁취하는 데 나서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화적 권리를 쟁취하려면 문화적 권리가 중요한 사회적 권리임을 인식, 인정하고, 그 중요성만큼 거기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겠다.


강내희, 중앙대 교수/ 문화연대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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