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의 월간지 현장에서 미래를

[제111호]내가 살아온 세월에 대해서, 가슴앓이에 대해서

연재/ 노동자가 쓰는 노동운동사 1

연재/ 노동자가 쓰는 노동운동사 1


내가 살아온 세월에 대해서, 가슴앓이에 대해서

정병모/ 조선소 노동자



이 글은 인터넷 신문 <울산노동뉴스>(http://nodongnews.or.kr)에 지난 6월23일부터 연재되고 있는 “정병모가 쓰는 노동운동 야사” 시리즈 글입니다. <현장에서 미래를>에 이 글을 흔쾌히 게재하도록 해 주신 <울산노동뉴스>와 정병모 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 편집자 주


현장에서 미래를 편집진과 독자 여러분께

모두 건강하게 잘 계신지요.
참 시간이 많이 지났네요.
한노정연에서 연 토론회에 다녀온 후 인사를 드리게 되었으니 그렇네요.
한 오년 되었네요.
 
울산노동뉴스에서 지난 일을 적어보는 것이 어떠냐고 하더군요.
생각없이 그러자 해놓고 많이 망설였습니다.
현대중공업노동조합의 처지가 그렇고, 글 솜씨도 없는데 쓰레기 같은 글을 만들어 내는 것 아니가 하는 생각에 주저했습니다.
하지만 지난 시절에 대한 못난 기록도, 현재를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못난 글을 '현장에서 미래를'에서도  싣겠다하니 책임감이 더 커지는군요.
 
거창하게 노동운동이 아닌, 제가 노동조합활동을 하면서 느꼈던 일을 기록한다는 생각으로 적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보기에 적합하지도 않을 수 있고, 견해도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더하거나 빼지도 않고 현대중공업노동조합과 함께 살아온 제 얘기를 적을 생각입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재미삼아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동지들의 건승을 빕니다.
 
2005년 8월20일 조선소노동자 정병모



1. 시작하면서

살다보니 별일이 다 있다.
울산노동뉴스에서 연락이 왔다.
인터넷 울산노동뉴스를 창립한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요즘 들어 몸이 영 무거워져서(마음이) 그저 먼발치에서 구경하고 있는 내게 뜻밖의 제의가 온 것이다.
“노동운동사를 쓰면 어떠냐….”
‘허 참나….’ 많이 망설였다. 글 솜씨도 솜씨지만 난해한 노동운동에 대해 글을 쓰라니, 그것도 수십 년 지난, 정신없이 살아온 일에 대한 얘기를 쓰라니 눈앞이 캄캄해진다.
왜 아니겠는가?
한번쯤은 지난 시절 열정으로 달려온 세월을 정리하고 싶을 때가 있었다.
누구에게 보여주기보다 내가 살아온 세월에 대해서, 가슴앓이에 대해 남기고 싶었다.

하지만 어줍쟎은 글 솜씨는 문제가 아니었다.
자격은 그렇다 치고 무엇보다 자신이 없는 것은 쓰레기 문제였다.
온갖 자료와 글들이 넘치다 못해 공해더미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쓰레기 하나를 더 만들어 낼 것 같아 용기가 없었다.
망설이는 나를 보고 주변에서 용기를 주는 말을 한다.
‘편하게, 정병모가 겪은 노동운동에 대해 쓰면 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시작할 용기를 얻어 힘닿는 데까지 써볼 생각이다.

앞으로 적을 ‘정병모의 노동운동사’는 순전히 정병모라는 개인이 겪은 경험을 중심으로 쓸 생각이다.
세상을 보는 시각이 모두 같을 수는 없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내 생각과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다.
내 의견에 동의하는 것도 읽는 사람들의 몫이고 부정하는 것도, 동지들의 몫으로 남겨두고 싶다.
부끄러운 과거는 부끄러운 대로 보여주고, 더하지도 빼지도 않은 글을 쓰리라 다짐해 본다.


2. 내 고향은 탄광촌

내 고향 강원도 태백
탄광에서 막일을 하시던 아버님 사형제분이 정착한 곳이 강원도 태백, 장성이다. 그래서 장성이 고향이 되었다.
지금은 태백이라 하지만 옛날에는 삼척군 장성읍이 더 큰 도시(?)였다.
조그만 도시에 인구 10만 가까이 보글보글 모여 살았다.
개도 백 원짜리 돈을 물고 다닐 만큼 돈이 흔했다는 탄광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철들어 알았지만 아버님은 탄광에서 일을 하다가 폐가 안 좋다고 그만두고 나왔다.
구멍가게를 거쳐 사업을 하셨는데, 서툰 솜씨라 형제들의 돈만 까먹고 말았다고 한다.

우리 집에는 내가 장남인데 내가 12살 되던 해에 아버님이 갑자기 돌아가셨다.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있던 나는 아버님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는데 큰 아버님이 중학교를 다니게 해주었다.
아버님이 셋째였고 밑으로 작은 아버님이 한분 계셨는데, 고등학교는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에 합격만 하면 보내준다고 하여 서울에 올라가 시험을 봤는데 떨어졌다.
공부할 조건이 안돼서 포기한 시험이었지만 막상 떨어지니 실망도 컸다. 어린 맘이지만 낙담하여 숨어서 매일 막걸리 마시며 지냈다.

그때 작은아버지가 서울 경동시장에서 야채도매상을 하셨는데, 일을 거들라 해 한 일년을 지내다 주변의 권유로 노동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섬유공장이 취직하기 쉬웠는데 오래 있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떠돌며 생활했다.
나이가 들어 군대를 가야 해서 방위병으로 14개월을 지내야 했는데, 나에게는 그때가 내 인생에 가장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가난한 집에 아버님마저 일찍 돌아가시고 나니 사는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가족 전체가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었는데, 어머님 소원은 온 식구가 한 데 모여 사는 것이었다. 방위병 생활을 마칠 때 쯤, 내 밑엣 동생이 공고를 졸업하고 울산에 취직을 하게 되었는데, 어머님 성화가 말이 아니었다.
서울에서 혼자 고생하지 말고 죽더라도 울산에 내려오라고 해서 1981년 초에 울산에 내려왔다.

논산보다 더 힘든 직업훈련소
울산에 내려왔으나 딱히 배운 기술도 변변하지 못해 취직도 쉽지 않았다. 신문을 뒤지다 보니 현대중공업에서 직업훈련생을 모집한다고 광고가 나왔는데, 훈련원 6개월 과정을 마치면 취업을 시켜준다는 것이 눈에 띄었다.
이력서를 들고 찾아가 접수하고, 오라는 날짜에 면접을 보러 갔다.
수험번호가 4천 몇 번인가 였고 사람들이 많이 와, 합격은 생각도 못했는데 뒤 늦게 합격이라는 연락이 왔다. 면접을 8월에 봤는데 11월30일에 오라고 한다.

그동안 놀 형편도 안돼서 노동부 울산사무소를 찾아가니 진양화학을 소개해주어 다니게 되었다.
석 달 가량을 다니다 중공업 훈련원에 들어가 훈련원 생활을 시작했다.
솔직히 현대중공업이 뭐하는 곳인지도 몰랐는데 들어가 보니 조선소였다. 참 열심히 배웠던 시절이었다. 기술 한개도 변변치 못해 설움을 받던 것을 생각하면 열심히 배울 수밖에 없었다.

군대 생활보다 더 험악한 직업훈련소 합숙생활 3개월도 견딜 만 했다.
훈련원 3개월, 현장실습 3개월의 고된 과정을 거쳐 현대중공업에 취업했다.
같이 입사한 동기들은 다른 곳으로 내뺐지만 난 갈 수가 없었다.
지금과 다르게 그 당시에는 훈련원을 마치고 나면 당연히 1년 이상을 근무해야 한다고 알지도 못하던 규칙을 들먹였고, 훈련비 전액을 배상하라는 공갈에 대부분 갈 수가 없었다.
난 떨어져 살던 가족과 헤어지기 싫어 갈 생각도 하지 않았다.

선실생산부를 거쳐 선체생산부 가공과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가공부서는 넘쳐나는 물량 때문에 주야 교대근무가 기본이다. 한 주는 주간 근무, 한 주는 야간 근무를 뺑뺑이 치듯 돌다보니 조선소 생활도 이골이 났지만 힘들었다.
지금도 집이 시내 신정동인데 시내에서 출퇴근하기가 무엇보다 힘들었다. 특히 야간근무를 마치고 버스를 타고 잠이 들면 장생포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졸음을 참지 못해 깜박 잠든 사이에 종점까지 온 것이다. 시치미 떼고 주변을 살피면서 천천히 내리는 것은 기본이다.


3. 고과와 상여금

결혼과 생활
조선소 생활을 한지 3년이 된 85년도에 결혼을 했다. 당연히 장남이라 어머님과 살았는데 사는 형편은 그리 나아지지 않았다.
주야근무를 하며 남들보다 잔업을 많이 해도 월급이 3~4십만 원이 채 안되었다.
월 평균 420시간을 했으니 꽤 열심히 일을 했는데도 (그래도 다른 사람보다는 잔업시간이 적었음) 겨우 생활을 꾸릴 수 있었으니 날이 갈수록 불만이 쌓여 갔다.
월급 인상시기만 되면 시급이 33원 오르거나, 재수 없으면 27원 올랐다. 어떤 사람은 동결된 사람도 있었다.
월급이 얼마나 많다고 동결을 했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어처구니없고 기가 막힌 일이었다.

연말이 되면 상여금이라고 300% 나왔는데 전체가 똑같이 나오지는 않았다. 고과에 따라 차등지급했는데 한 푼도 받지 못하는 사람, 150%, 200%, 250%, 기본인 300%를 받는 사람도 있었지만 330%를 받거나 350%를 받는 사람이 있었다.
연말이 되면 현장 사무실 유리창이 수난을 당했다.
현장을 담당하고 있는 반장과 직장에게 화살이 돌아갔다.
책상이 뒤집어지고 멱살잡이도 심심찮게 일어났다.
재빠른 직·반장은 상여금 나오는 날에는 꽁지를 뺐고, 분을 참지 못한 노동자들은 애꿎은 유리창만 깼다.

학자금에도 고과가 영향을 미치고…
연말에 매긴 고과점수는 다음해 임금인상에도 고스란히 반영되기 때문에 현장 분위기는 험악했다. 심지어 아이들 학자금에도 영향을 미쳤다.
여기에 더 보태어 아이들 성적이 나쁘면 학자금을 받지 못했다.
더 설명하면, 아이가 공부를 잘해도 아버지 고과점수가 낮으면 학자금을 받지 못했고, 아버지의 고과점수가 좋아도 아이가 성적이 좋지 않으면 학자금 혜택을 받을 수 없었다.
이런 사정이다 보니 연말 고과점수에 모두 예민해졌다.

고과를 낮게 받은 노동자들이 점수에 차등을 준 이유를 따져 물으면 돌아오는 대답은 대략 두세 가지로 구분되었다.
가장 편하게 변명하는 것이 ‘돌아가면서 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였다.
어차피 고과를 적용해야 하는데 이번엔 당신이 손해를 감수해라는 것으로 무마하려 했다. 젊은 당신은 학자금에도 지장 없으니 다행이 아니냐 하면서.
두 번째는 ‘우리 반에 온지 얼마 안 되었으니’또는‘입사한지 얼마 안 되니까’였다.
그 즈음에는 조선산업이 외형을 확장하던 시기라 신입사원을 자주 뽑았다. 또 현재처럼 생산 공정도 자리를 잡지 못했던 때라 부서간의 전출과 반별로 이동이 잦았는데 수시로 소속이 바뀌는 경우가 많았다.
세 번째는 ‘당신이 지적받은 것 있지 않으냐’였다.
여기서 지적받은 것이란, 아침 조회나 점심 중회 때 머리 검사를 비롯한 복장검사를 했는데 머리카락이 귀를 살짝만 덮어도 바리깡으로 머리를 밀어버렸다.
그밖에도 제안서를 정해진 숫자만큼 내지 않은 것, 조회나 중회에 지각을 한 것 등, 회사가 일방으로 정한 규칙을 어기면 시말서를 써야 했다.
어쩌다 사소한 오작(誤作)을 내도 시말서를 들먹였다.
씨발이란 말이 절로 나왔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참는 수밖에 없었다.


4. 동료는 경쟁 상대

어쩌다 회식 자리가 있을 때도 꼭 주먹다짐을 하고나서야 끝났다.
끼리끼리 잘 어울려 지내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상대를 경쟁상대로 인식하고 지냈다.
서로 상대를 깔보거나 흉보는 것도 자연스러웠다.
저놈은 아부해서 진급한 놈이라거나, 저놈은 직장 집에 양주 주고 상 받았다고 흉봤다.
대부분 근거는 없었지만 하는 짓을 보면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자기 일만 열심히 하는 사람은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고, 아부꾼들만 진급했고 고과를 잘 받았다.

기술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막 들어온 사람과 오랫동안 경험을 쌓은 선배노동자들의 기량 차이는 실지로 컸는데 제대로 가르쳐 주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어깨높이에서 흘낏흘낏 쳐다보면서 배우는 수밖에 없었다.
도면을 들고 있는 고참노동자들이 시키는 대로 일을 하다 보니 한참이 지나도 조공의 기량이 늘 그 자리였다.
자세한 설명 없이 “이렇게 빨리 일하라”고 하니 늘 턱이 없었다.

사실 고참노동자들의 마음고생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몸뚱이 하나로 기술 하나로 가방끈 짧은 자기가 버티고 있는데, 젊은 아이들에게 다 가르쳐주고 나면 자기 자신이 설 자리가 없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누가 가르쳐 주지는 않았지만 노동자로 살아오면서 몸으로 체득한 보호본능이라 생각했다.
이용가치가 없어지면 산업 폐기물처럼 단물만 쭉 빨아먹고 뱉어 버리는 자본의 속성을, 노동자 짬밥으로 알고 있었던 선배들 아니던가?

떠나고 싶던 도시 울산
정붙여 살려고 왔던 도시는 아니었다.
먹고 살려고 오거나, 기술 배워 해외 나가 한밑천 모아 장사나 하려고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한 발은 울산에, 한 발은 고향이나 다른 곳을 딛고 있는 불완전한 형태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늘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다.
울산에서 뿌리를 내린다고 생각했던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늘 까치발로 먼 곳만 바라보며 살았다.

몇년만 고생해 돈을 모으겠다고 다짐했지만 달라질 수 없는 노동자 생활이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흘러 온 곳이 울산이었고, 조선소 노동자였다.
쎄 빠지게 힘든 일을 했지만, 늘 그 푼수 그대로였다.
허탈했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인생막장 조선소에서 흘러가는 청춘이 아까웠다.

정둘 곳도 없고, 마땅히 갈 곳 없던 노동자들은 퇴근하면 술집 순회공연에 빠져들었다.
늦은 저녁 시간이 되면 길거리에 널브러져 있는 사람이 부지기 수였다.
출근 시간에도 전봇대 옆, 쓰레기 통 옆에는 조선소 잠바를 입은 노동자를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하루하루 힘든 일에 대한 보상을 술로 풀거나 유흥가를 전전하는 것으로 풀어갔다.
힘든 노동의 대가로 받은 월급봉투는 조선소 정문을 나서는 순간 이슬처럼 사라졌다.
내 고향 태백 탄광촌에 가면 이런 말이 있었다.
‘하늘 둘 덮어 쓰고 번 돈은 햇빛 아래선 맥 못 춘다.’
탄광촌이나 조선소나 하나도 다를 게 없어 난 정말 싫었다.

조선소 잠바
지금처럼 카드는 없었지만 외상이 안 되는 곳이 없었다.
몇 번 익힌 안면과 조선소 잠바만 입고 가면 어디든 무사통과였고, 월급날 외상값을 갚으면 그날은 얼마간의 공짜 술을 줬다.
그놈의 공짜 때문에 외상값 갚으러 갔다가 다시 또 외상을 긋고 오는 경우가 많았다.
노동자들은 장사치들의 손아귀조차 벗어나지 못해 악순환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들고나는 사람이 많았다.
안면보고 외상 술 줬던 선술집에서도 떼이는 돈도 많았겠지만 돈 버는 놈은 장사치밖에 없었다.
노동자들 때문에 떼돈을 버는 장사치도 조선소 사람을 우습게 여겼다.
우리 스스로도 ‘조지나 공장 공돌이’라 했지만, 장사치들은 아예 우릴 날품팔이 취급했다.
울산시내 어디를 가도 조선소 잠바를 입고가면 한 단계 낮춰봤다.

지금으로 치면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차별 대우하는 것과 흡사했다.
어느 곳은 드러내 놓고 차별하는 곳도 있었다.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돈을 내도 징그러운 벌레를 대하듯, 깔끔 떠는 재수 없는 음식점이 많았다.
마치 못 볼 것을 보거나 못 올 사람이 찾아온 마냥, 말투조차 퉁명했다.
세상을 움직이고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 우리들인데, 공돌이라 차별받는 것이 싫었지만 열등감도 갈수록 커졌다.
하는 수 없이 난 퇴근만 하면 집으로 부리나케 와서 양복으로 갈아입고 볼일을 보는 것으로 문제를 피해나갔다.
어딜 가더라도 최소한 조선소 잠바는 입지 않았다.(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