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해방실천연대의 기관지 사회주의정치신문 해방

[14호/나의삶,나의투쟁(4)] 전평의 2.7 구국 파업투쟁

- 열혈혁명가 이수갑의 삶과 투쟁의 기록 -

전평의 전국 총파업

1947년 3월 22일 전평(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은 전년 9월의 파업투쟁 이래 핵심들이 살해, 구속되는 등 상당한 희생을 감내했지만 노동자 대중에 대한 지도력을 상실치 않았다. 비록 공식적인 노조 간부들이 대한노총에서 임명한 어용간부들이었다 하더라도 대중의 분노와 정치의식은 날로 강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성장한 조직으로 전평은 50여 만 명의 노동자를 동원하여 24시간의 기한부 총파업을 하였다. 이 파업도 노동자의 생활권 옹호와 좌익에 대한 탄압에 대해 항의하는 투쟁이었다.

이 파업투쟁과 동시에 다수의 학생들이 반군정, 반미 데모에 참가하였다. 이어서 5월 1일 메이데이 행사에도 서울지역에서는 남녀 중고등학생 다수가 집회에 참가하고 시위를 하였다. 미군정 당국은 학교 당국에 학생들이 메이데이집회에 참가하지 말 것을 지시하기도 하였으나, 학생들은 학교당국의 지시를 아랑곳하지 않고 집회에 참가하였고 이 때문에 퇴학처분을 당하기도 하였다. 미군정의 학생 탄압사건에 분격한 학생들은 ‘경찰은 학원에 간섭하지 말라, 민주주의적 민족교육 실시하라, 학생들의 정치행사에 참가하는 자유를 쟁취하자’라는 구호를 외치며 투쟁에 참가하여 정치적 자각을 높여 나갔다.


1948년 2월 7일 구국 파업 투쟁

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인민항쟁, 47년의 파업투쟁 등 계속된 투쟁으로 많은 희생이 발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전평조직과 전농조직을 재건하여 2.7 구국 총파업투쟁을 전개하였다. 조직은 계속해서 타격을 입었어도 미군정하에서 노동자들의 생활고에 대한 불만과 제국주의자들에 대한 분노는 나날이 높아지고 있었다. 이것이 그토록 가혹한 탄압에도 노동자들이 전평을 중심으로 투쟁에 동참한 이유다.

미 제국주의자들은 남조선을 강점한 후 일본군을 무장 해제하여 조선의 독립을 위한다는 국제적 공약을 깨고 남조선 인민을 탄압하고, 남조선에서 미국의 침략에 동조하는 친일파 민족 반역자들을 앞장세워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계획을 세웠다. 결국 1947년 미국이 주도하는 유엔 소위원회에서 남조선만의 단독선거에 의한 정부수립안을 가결하여 이를 근거로 48년 5월 10일 남조선만의 선거를 하기로 확정하였다. 이로써 미 제국주의자들은 남조선에 대한 신식민지주의 지배가 목적임이 명백히 드러났다.

노동자계급은 이러한 미국의 침략야욕으로 인한 조국분단의 비극을 저지하기 위한 총력투쟁을 전개하였다. 2.7 구국투쟁은 단독정부 수립으로 조국과 민족이 영구분단되는 것은 절대로 막아야 한다는 역사적 사명으로 전평 노동자계급의 총파업을 선두로 민주주의 민족전선에 참가한 모든 정당 사회단체를 비롯한 전 인민이 총궐기한 투쟁이었다. ‘단독정부 수립 반대, 조국분단 절대 반대, 미군은 즉시 물러가라’는 등을 강력히 주장하며 전국 중요도시에서 구국투쟁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조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대한 투쟁에서도 테러단 대한노총은 미군정의 앞잡이가 되어 군경과 함께 노동자들을 닥치는 대로 폭력을 가하여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하고 대량 구속당하는 등 희생이 발생하였다.

1948년 2월 7일 노동자들의 전국적인 총파업투쟁에 이어서 전개된 3월1일의 3.1절 기념행사장에는 무장경찰과 데모대들 사이에 충돌이 도처에서 발생하여 수많은 민중들이 중상을 당하기도 하고 살해되었다. 이에 대해 민전(민주주의 민족전선, 민중들의 연합전선)에서는 3월 10일 [테러, 폭압 반대 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 항의투쟁을 전개하고, 전평은 (1947년에 이어) 또다시 남조선 총파업위원회를 조직하여 3월 22일에 24시간 동안 남조선 전역에 총파업을 단행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 [3.22 총파업]에는 50여 만 명의 조직노동자와 17만 농민, 8만여 시민 학생들이 참가하고, 각지에서 데모행진을 하며 단독 선거반대를 목이 터지도록 외치며 투쟁하였다. 이러한 투쟁으로 인해 점령군에 의해 전평 중앙간부를 비롯한 노동자 2,000여명이 검거 및 투옥되고, 파업에 참가하였다는 이유로 각 공장의 노동자들이 대량으로 해고되는 희생이 발생하였다.
노동자들의 단결 구국투쟁은 해방된 남조선의 정치 정세를 주도하였으며, 미국 점령군으로서는 전평 노동자들의 투쟁이 큰 위협이 되었을 뿐 아니라, 조선 인민의 자주통일 국가 건설의 정당한 주장이 세계만방에 널리 알려졌다.

전평은 1947년 8월부터 비합법적 지하 활동을 하면서도 남조선 노동자 계급에 대한 지도력은 강력하였으며 언제나 반제국주의 구국투쟁에 선봉적 역할을 하여왔다. 이와 같은 기풍을 이어간 2.7 구국 파업투쟁은 2월 7일부터 20일경까지 계속되었다. 이 시기에는 각 공장의 생산이 전면 중단되고, 교통, 운수, 전신 전화 등은 기능이 완전 마비되고, 선박노동자는 해상 데모를 하고, 각 광산도 완전 생산 중단이 되었다. 2.7 구국 파업투쟁은 남조선 인민의 외세 배격, 자주독립 국가 건설을 위한 역사적이고 가열찬 투쟁이었으며, 전평과 노동자 계급은 이후에도 지속적인 투쟁을 전개하여 모든 민중세력의 구심점으로서 투쟁의 선봉적 역할을 해왔다.

1948년 5월 1일 메이데이 행사 때에 미군정청은 진정한 민주노동 단체인 전평을 비롯한 좌익진영의 행사를 일체 금지하고 탄압을 가하는 등 반노동자적 범죄행위도 서슴없이 자행하였다. 미군정은 어용노조 대한노총 주최 행사만 허가했다. 그러나 전평은 관제 주최 메이데이 행사를 보이콧하고, 각지에서 불허된 메이데이 기념행사를 개최하며, ‘만국의 노동형제들은 단결하자, 우리들의 피흘리는 곳에 자유의 사회는 온다’라는 구호를 하늘높이 외치면서 거리를 누볐다. 메이데이 투쟁에서도 각지에서 노동자 민중과 군경 간에 충돌이 여기저기에서 발생하고 많은 사람들이 검거 투옥되기도 하는 등 치열한 투쟁을 하며 행사를 치루었다.
전평은 5월 1일 메이데이 행사 투쟁에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5월 10일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를 반대하기 위한 투쟁으로, 5월 8일에도 또다시 전국 각지에서 총파업을 하며 남조선만의 단독정부 수립 반대를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전평 노동자들은 끊임없는 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으며, 치열한 투쟁을 통해 수많은 노동자계급들은 조국의 자주독립 국가 건설을 위한 투쟁에서 언제나 선봉적 역할을 하였다. 노동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의식이 확고하며 제국주의를 반대하고 조선의 자주독립국가 건설에 대한 사명감이 누구보다 강하였다.
당시에 전평 노조원들은 투쟁노선을, 현 단계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며, 한편 부르주아적 민족혁명 단계라고 규정했다. 이 혁명적 과업을 수행함에 있어 조선민족의 완전한 독립국가 건설과 진보적 민주주의 공화국 건설의 역사적 사명을 다하여야 하며, 이 혁명과업 수행에 프롤레타리아트의 근본 의무는 이러한 변혁에 있어 부과된 제 임무를 완전히 수행함으로써 제 2단계의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신속한 전화 조건을 확보하는데 있다고 하였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일체의 투쟁 목표를 사회주의 혁명의 보다 신속한 실현을 가능케 하기 위한, 전략적 목표에 종속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궁극적 승리를 획득하기 위한 전제조건을 창출할 계급투쟁을 보다 자유스럽게 발전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으로 프롤레타리아트는 당면의 민주주의 혁명에 있어서 제 조건을 걸고 적극적인 투쟁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명에 충실하였다.


2006. 8. 2.

철도노동조합 명예조합원 이 수 갑



→ 열혈혁명가 이수갑의 삶과 투쟁의 기록 [나의 삶, 나의 투쟁]
→ [나의 삶, 나의 투쟁 (1)]
→ [나의 삶, 나의 투쟁 (2)] 테러집단 대한노총
→ [나의 삶, 나의 투쟁 (3)] 9월 총파업과 전평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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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노조 , 해방 , 이수갑 , 전평 , 2.7 구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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