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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호] 자유무역이 몰고 온 비극 아편전쟁

영국의 경제학자 리카도(David Ricardo, 1772~1823)는 “상대적으로 생산비가 싼 비교우위에 있는 상품을 각국이 특화하여 국가 간 무역을 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이른바 ‘비교생산비설’로, 국가 간 자유무역이 모든 국가에게 유리하다는 그의 주장은 이후 국제 분업과 근대무역이론의 기초가 되었다.

그런데 리카도가 죽은 직후인 19세기 중반. 영국의 동인도회사와 중국 사이에서는 기이한 형태의 무역이 전개되고 있었다. 당시 중국은 차(茶) 생산에서 절대적 우위였다. 동인도 회사는 중국에 은을 주고 홍차를 사들여 영국에 보급하였다. 영국인들은 점점 홍차 맛에 길들여졌다. 영국 내의 차 수요가 증대하자 많은 은이 중국으로 흘러들어갔다. 그럼으로써 일시적이지만 중국과 영국 사이에는 무역불균형 상태가 조성되고 있었다.

그래서 동인도회사는 본국에서 은을 유출하지 않고 그 대신 중국에 아편을 팔아 은을 회수하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즉, 인도 벵골 지방의 농민들에게 양귀비를 재배하게 하고 그것을 전매 형식으로 중국에 수출하는 것이었다. 동인도회사는 인도 농민에 대한 지배력을 이용하여 절대우위에 있는 새로운 상품을 개발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상품으로 중국과의 무역수지 개선에 나선다. 그 결과 얼마 지나지 않아서 중국에 대한 영국의 아편 수출량은 마구 늘어났다.

은을 주고 아편을 사들인 중국인들

하얀 양귀비 꽃잎이 지고 나면 그 자리에 동그란 열매가 맺히고, 그 열매에 칼로 상처를 내면 눈물처럼 수액이 흐른다. ‘양귀비의 눈물’이라고 하는 이 수액을 말리면 아편이 된다. 아편은 원래 마취약이나 수면제로 오래 전부터 유익하게 사용되어 왔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본래 용도를 벗어나 환각용으로 쓰이기 시작하면서 문제의 물건이 되었다.

아편은 이미 기원전 1,500년경에 약용으로 쓰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로 오래된 약물이고, 13세기경에 아라비아 상인들에 의해 약품용으로 중국에 처음 전래되었다. 그 무렵 중국의 아편 수입량은 연간 200상자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아편이 환각제로 쓰이기 시작한 17세기 이후, 아편 수입량은 꾸준히 늘어나고 있었다. 특히 영국의 동인도 회사가 1757년 이후 아편에 대한 전매권을 획득하면서 중국으로 반입되는 아편의 양은 급격히 증가하여, 1830년대에는 매년 수만 상자에 이르렀다.

아편을 상습적으로 흡연하면 육체와 정신이 마비된다. 뿐만 아니라 아편 하루치의 가격은 당시 중국인의 하루 임금과 맞먹었다. 게다가 아편은 습관성 중독을 일으키므로 일단 그것을 피우기 시작하면 점점 사용량이 늘어나고, 따라서 더 많은 돈이 들어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아편중독자는 결국 재산을 탕진하여 폐인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럼에도 왕족, 관리, 군인, 서민 등 중국의 아편 중독자들은 소굴에 모여 자욱한 연기를 피워 올리며 벌레처럼 뒹굴었다. 어림잡아 400~500만 중국인이 아편 때문에 정신과 육체가 병들고 있었던 것이다. 청나라 황제는 아편의 수입을 금지하는 법령을 몇 번이나 발표하였지만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관리들 자신이 아편에 중독되어 있었고, 수입을 단속하는 관리들이 상인에게 매수당하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마침내 아편이라는 마약은, 그것에 중독된 사람뿐만 아니라 중국의 경제적 근간까지도 뒤흔들어버렸다. 그리하여 1830년대에는 수입량의 7.5배에 달하는 은이 중국을 빠져나갔고, 따라서 중국의 은 가격은 크게 뛰었다. 문제는 농민들은 일상생활에서는 동전을 주로 사용했지만 세금은 은으로 내야 했다는 것, 따라서 일상통화는 그대로인데도 세금은 은의 가격만큼 올라가는 셈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조세 부담은 결국 소작인이나 영세 자작농이 져야 했고, 이는 곧 그들의 몰락을 부채질하는 원인이 되었다.

아편전쟁, 자유무역의 혹독한 대가

청조의 황제와 관리들은 그런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날마다 회의를 열었지만 뾰족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였다. 게다가 왕권으로 아편의 밀수입을 저지하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다. 영국의 상인들은 광저우(廣州) 앞바다의 여러 섬에 거래소를 두고 아편 무역을 계속하였다. 어떤 상인들은 장강 어귀의 연안에 무역 거점을 두고 광저우 시내에 버젓이 소매점을 내기도 하였다.

그러던 1839년 3월, 청나라 황실은 총독 임칙서(林則徐)를 특명대신으로 임명하여 광저우에 파견하였다. 임칙서는 단호한 조치를 취하여 영국의 상선에서 아편 2만여 상자를 몰수하였다. 그리고 몰수한 아편에 석회를 섞어 소금물에 담근 다음 바다로 모두 흘려보냈다. 그 작업을 하는 데 무려 20여 일이 걸렸다고 한다. 광저우 앞 바닷물은 쌀뜨물처럼 뿌옇게 변하였다.

그 사건의 진상은 반년이 지난 뒤에야 영국 정부에 보고되었다. 영국 정부는 중국에 대한 군사보복 조치를 취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1840년 3월, 군대가 출정한다. 이렇듯 영국의 함대가 몰려오는 것을 본 청 황제 도광제는 덜컥 겁이 났다. 그래서 임칙서를 파면하고 서역으로 보냄으로써 사건을 대충 얼버무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영국은 군사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아편전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전쟁은 2년에 걸쳐 계속되었고 사상자가 무려 2만 명에 달하였다. 영국 함대는 남경으로 밀어닥쳤다. 청은 마침내 항복을 하고 만다.

1842년 8월, 영국 군함 콘 윌리스 호 선상에서 난징조약이 체결되었다. 청은 홍콩을 영국에 이양하고 600만 달러의 보상금을 냈으며, 5개 항구를 개항하기로 약속하였다. 이어 1843년에는 외교통상관계의 세목이 정해져 영국은 영사재판권을 인정받았다. 즉, 영국은 청의 재판권에 따르지 않아도 되고 무역품에 관한 관세율 역시 청나라가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중국을 휘감은 어둠의 그림자는 더욱 짙어만 갔다.

한편 아편 무역상인 중에는 청교도도 있었는데 그들은 아편 밀매와 함께 기독교를 선전하는 전단을 뿌리기도 하였다. 그들은 ‘왼손에는 아편, 오른손에는 성경’을 들고 중국인을 탄압하였다. 영국의 선교사들이 전파한 기독교는 나중에 변질되어 ‘태평천국의 난’이라는, 중국의 역사상 가장 무섭고 참혹한 반란 사건의 도화선이 되기도 하였다. 이 모든 것이 ‘자유무역’ 때문에 치른 대가였다.

몇몇 초국적 자본의 이익 대변하는 FTA

자유무역(free trade)이란 국가 간에 상품의 자유로운 이동을 위해 모든 보호 장벽을 제거시켜버린 무역 형태를 말한다. 또 그처럼 국가와 국가 간에 일대일로 맺은 협정을 자유무역협정(FTA)이라고 한다. 자유무역협정은 그동안 대개 유럽연합이나 북미자유무역협정 등과 같이 인접국가나 일정한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흔히 지역무역협정(RTA: Regional Trade Agreement)이라고도 부른다.

자유무역협정은 국내에서 생산력이 낮은 분야의 희생을 전제로 한다. 국내의 다양한 산업에 대한 모든 보호 장치를 허물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자유무역은 몇몇 업자들의 이익만을 최대한 보장해주는 제도다. 따라서 자유무역 체제는 결코 공정하지 못하다. 결국 ‘센 놈’은 더욱 세게 만들고 ‘약한 놈’은 아예 밟아 버리는 냉혹한 질서를 말하는 것이다.

‘절대우위’에 의한 것이든, ‘비교우위’에 따른 것이든 나라 사이의 무역은 한 번 시작되면 되돌리기 어려운 성질, 즉 불가역성을 가진다. 예컨대 한국과 미국이 자유무역협정에 따라 식량과 쇠고기 시장을 완전히 개방하는 경우, 비교우위가 낮은 한국의 농업과 축산업계는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된다. 결국 한국의 농․축산업은 사양길로 접어들어 생산량이 급격히 감소하거나 아예 중단되는 사태에 이르러 식량안보에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비교우위는 의미가 없어지고, 절대우위를 확보한 미국의 농축산물 가격은 별다른 견제 없이 날개를 달게 될 것이다. 결국 양국에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라 경쟁력이 강한 한쪽에만 절대적인 이익이 되는 것이다. 자유무역은 결코 모두에게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오늘날 세계를 들썩이게 하는 자유무역협정. 그것은 새로운 ‘아편전쟁’의 서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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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일 (잡글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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