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열린칼럼] 과거청산은 낡은 현재와의 싸움

국가범죄에 대한 법적 책임추궁과 대중의식 고양이 필요하다

민주화 이후 5월은 어떤 느낌으로 오는가? 국가범죄에 대한 투쟁에 관해 말하자면 지지부진함, 심지어 낭패감이다.


이 땅 민중은 나치의 홀로코스트나 일제의 남경대학살을 방불케 하는 집단학살을 한국전쟁 전후에 무수히 겪었으며, 이후에도 체제보호를 이유로 저질러진 수많은 고문, 암살, 의문사를 목격하였다. 국가 폭력을 청산하기 위한 시도들이 해방 이후, 4.19혁명 이후, 해빙기마다 피맺힌 절규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지만, 그때마다 반동세력들은 이를 무참히 짓밟았다. 심지어 한국전쟁 중 민간인 학살에 대해 진상조사를 요구했던 유족회원까지도 사형에 처할 정도였다.


90년대 중반 민주주의로 완만하게 이행하면서 과거청산운동도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2005년 말 기준으로 과거청산을 목표로 제정된 법률은 이미 10여건을 넘어갔다. 그러나 이러한 법률은 과거청산의 기본원칙에서 보자면 대단히 미흡하다. 과거청산의 원칙으로서 진실규명, 책임자처벌, 피해배상, 재발방지, 정신계승을 거론한다. 한 두 사례를 제외하고는 이러한 원칙의 충족은커녕 진실의 언저리에도 이르지 못했다.


과거청산 논의의 핵심은 진실규명에 바탕을 둔 법적인 책임추궁이라 할 수 있다. 법적 책임을 우회하는 과거청산은 집단적 사기극이다. 우회하는 태도는 결국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범죄는 다층적이다. 반인권적 잔혹행위를 저지른 범죄자들과 이들의 잔혹행위를 그럴싸하게 법적으로 학술적으로 회칠하는 기능엘리트들, 그 주변에 소극적이고 무관심한 대중들이 쫙 깔려 있다. 대중들의 의식고양이야말로 과거청산의 진정한 목표다. 대중의 의식고양이 없을 때 국가범죄자들은 처벌받지 않고 희생자들은 배상받지 못하며 진실조차 규명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권은 법을 제정할 때마다 정치적 손익을 절대시한다. 그 중에서도 경이적인 것은 2005년에 제정된 진실화해법이다. 과거청산을 위한 법이 아니라 청산활동 자체를 청산하기 위한 법으로 ‘대연정’국면에서 터져 나온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급진적 화해법안이었다. 이러한 입법이야말로 개혁, 인권, 민주주의 심지어 정치 자체의 종말을 앞당기는 자멸적 시도이다.


국가범죄는 억압적 국가이데올로기의 필연적인 귀결이다. 한국현대사에서 저질러진 국가범죄의 배후는 언제나 극우반공이데올로기다. 이를 보존하는 것이 국가보안법이다. 따라서 국가보안법의 철폐는 과거청산작업의 핵심적인 과제이다. 물론 과거청산은 제도정치권의 개혁적인 일부세력이 몇 개의 특별법을 통해 달성할 수 있는 차원의 것도 아니다. 과거청산을 전면에서 추진해 완성할 정도로 용기 있는 정부가 아직도 수립되지 않았다는 점이 쓰리지만 위안거리라고 할 수 있다.


과거청산은 너무나 생생하게 현재로 구축되어 있는 낡은 현재와의 싸움이다. 바로 이러한 현재성 때문에 정치세력의 우여곡절을 보기도 한다. 어느 경우에나 과거청산운동은 희생자를 위한 배상운동이나 인정투쟁으로 단순화될 수 없으며, 한국사회를 여전히 억누르는 지배세력과 지배이데올로기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급진적 운동으로서 가치를 보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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