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열린칼럼] 산다는 것의 의미

얼마 전 재일조선인 소년의 성장기를 담은 ‘산다는 것의 의미’를 읽었다. 학교에 들어가 재일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자각하면서 느끼는 외로움과 쓸쓸함을 극복하는 김천삼의 성장기를 그려낸 소설인데, 그 아이의 외로움과 쓸쓸함이 낯설지가 않았다. 사회적 약자(또는 소수자)로 살아가야 하는 조건들 속에서 느꼈던, 또는 느끼고 있는 그런 익숙한 감정이기 때문이었으리라. 행복한 사회가 어떤 사회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나다!’라고 외칠 수 있는 사회라고 답하고 싶다. 내가 어느 계급에 속하든, 어떤 종교를 갖든, 어떤 민족이든, 어떤 피부색을 가지든, 성별과 출신 배경이 어떠하든 내가 나라는 사실로 인해 억압받지 않고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 없는 자유로운 사회 말이다.


마닐라 근처 수출 자유 지역인 까비테 내 한국기업에서 일하던 멜리와 플로리가 한국기업들의 부당 노동행위를 알리고 도움을 호소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 멜리가 일하던 필스전이나 플로리가 일하던 청원패션 모두 노조를 무시하며 강제해산을 위해 폭력을 서슴지 않고 있다.


필리핀에서는 2001년 아로요 집권 이후, 군부의 적극적 개입과 아로요 정부의 묵인 하에 노동·농민운동가, 인권활동가, 좌파활동가들 약 1,000여 명이 실종 또는 살해되었고, 지금도 활동가들에 대한 위협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런 위협과 공포 속에서 필스전과 청원 패션의 노동자들은 노동권 쟁취를 위해 열심히 투쟁하고 있다. 실제 두 사업장에 복면을 한 무장괴한들이 침입하여 농성장을 부수고 파업 노동자들에게 살해위협을 하였다. 필스전 사업장에서는 지난 8월, 칼로 무장한 괴한들이 여성 노동자들을 납치하여 수출자유지구 밖으로 내던진 사건이 발생했다.


필리핀 정부나 법원이 노조의 합법성을 인정해도, 회사는 등록이 취소되었다는 말만 되풀이하며 단체협상을 거부하고 있다. 한국대사관에 찾아가 봐도 소용없다. 한국자본을 보호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라고 떠들어 댈 뿐이다.


멜리와 플로리가 현실을 고발하고 대책을 호소하기 위해 한국 땅을 밟았으나, 기업과 정부 모두 무책임한 답변뿐이다. 필스전의 모기업인 주식회사 일경은 필리핀 현지 법인으로부터 매일 매일 상황보고를 받는다고 하고서는, 멀쩡하게 존재하는 노조가 취소되었다는 말만 되풀이 한다. 노동부는 현행 제도 아래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이야기만 한다. 멜리의 눈시울이 빨개진다. “이런 말을 듣고자 여기까지 온 게 아닙니다.” 한국행이 그들의 절망감과 외로움을 오히려 더 깊게 만들지 않을지 걱정이 들었다.


그런데, 주식회사 일경과 면담하고 나오니 회사 마당에 이랜드, 기륭전자 등 장기투쟁 사업장 노조원들 약 100여 명이 빨간 조끼를 입고, 필리핀 노동자들의 문제에 함께 분노하며 회사 측에 단체 협상과 노조 인정을 요구하고 있었다. 더 이상 길은 없는가 싶었는데, 그들을 걱정해 주고 함께 싸워줄 동지가 있었다. 너무 빤한 반전인 거 같지만, 너무나도 감동스럽고 감사했다. 아, 이것이 연대구나! 필리핀 노동자들을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자본의 횡포에 고통 받는 그들을 걱정하고 함께 투쟁하는 거 말이다.


책 속의 김천삼은 걱정하는 마음을 ‘상냥함’으로 표현했는데, 상냥함을 통해 쓸쓸함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걱정만 하기에는 필리핀 상황이 절박하다. 그 걱정이 구호가 되고 실천이 되어야 비로소 ‘상냥함’이 제 의미를 가질 것이다. 필리핀으로 돌아간 멜리와 플로리가 그곳 노동자들에게 이야기했을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외롭지 않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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