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열린칼럼] 피해자보호를 넘어 권리보장을

우리사회에서 성폭력은 오히려 피해자가 비난받는 범죄로 인식되어왔다. “뭔가 당할 만했겠지.”라는 따가운 시선 속에서 피해여성들은 피해 사실을 드러내지도 못하고 후유증에 시달려오곤 했다. 1994년 성폭력에 관한 특별법이 마련되고, 성폭력수사전담제, 진술녹화제, 아동성폭력전담센터, 원스톱(One-stop)지원센터, 그리고 전국 200여 곳의 성폭력상담소 등 많은 제도들이 마련되었다. 그럼에도 아직도 연일 신문, 방송에서는 성폭력 사건이 보도되고 있고, 성폭력 신고율 6.1%(한국형사정책연구원, 1998), 기소율 43%(법무부, 2004)에 머물고 있다. 무엇보다 많은 여성들에게 성폭력은 여전히 일상의 삶을 위협하는 범죄로 체감되고 있다.


또한 폭행, 협박과 저항의 정도를 엄격하게 따지는 ‘최협의설’은 강간의 판단기준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수사.재판 담당자들의 인권감수성과 성폭력 피해생존자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인한 2차 피해가 늘고 있다. 성폭력 상담현장에서는 성폭력에 관한 수사.재판과정이 가해자를 처벌하고 피해생존자들의 치유를 격려하기보다는, 오히려 피해자를 비난하거나 주눅 들고 분노케 하는 사례를 일상적으로 접한다.


이로 인해 상담소 활동가들 사이에는 성폭력 피해생존자를 상담.지원할 때, 더 이상 법에 기대지 말고 차라리 가해자의 실명을 공개하거나 주변 사람들이 함께 몰려가 가해자를 혼내주는 등 생존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대응을 하게하고, 이로 인해 생존자가 명예훼손이나 폭행죄 등으로 역고소 되면 단체들이 그의 구명운동이나 기금모금 등의 활동을 하는 것이 더 실제적이지 않겠느냐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이는 수사.재판 권력을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는데 활용할 수 있다거나 성폭력 문제를 타협할 수 있는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과 회의이기도 하다. 이러한 움직임은 법에 더 이상 기대할 바가 없다는 포기를 선언한 것이기 보다는, 법조인들의 성찰과 변화를 촉구하는 강력한 요구와 바람의 표명이기도 하다.


더불어 기존의 법.정책이 성폭력 피해생존자의 보호와 지원 중심이었다면, 이제는 그들의 권리보장에 초점을 맞추고, 생존자들의 역량강화와 사회문화적 인식변화로 그 초점이 이동해야 할 시점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범죄피해자로서 침해당한 인권을 회복할 권리가 있으며, 치유를 향한 강한 힘과 용기,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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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경 |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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