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누구의 기억을 기억할 것인가

소수자의 기억과 국민의 기억

세계 여성의 날이던 2009년 3월 8일 오전, 서울 서대문 독립공원 안에는 많은 할머니들을 포함해서 200여 명이 모여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 착공식이 열렸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주최로 열린 이 행사에는 일본 시민단체 관계자 40여 명도 참석했다. 이 박물관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오랜 소원이었는데, 서대문독립공원 안 매점 부지에 박물관을 짓기로 서울시와 2005년에 합의가 되었고 지난해 도시계획실시인가도 났다. 그러나 할머니들의 소원과는 달리 박물관이 들어설 부지에는 여전히 매점들이 헐리지 않은 채 남아 있었고, 따라서 이날 터파기 공사는 실제로 이뤄지지 못했다. 광복회와 순국선열유족회 등 독립운동 관련 단체들이 반대한다는 이유로 서울시가 매점 건물에 대한 철거허가를 유보하고 있어서다.



기억의 주도권을 둘러싼 싸움


혼돈스럽지 않은가. 일본의 식민지배에 저항하며 목숨을 바쳐가면서 싸워 오신 분들이 일본 식민지배의 가장 큰 피해자인 ‘위안부’ 피해 여성들을 보듬어 가기는커녕 전쟁 중에 자행되는 여성의 인권유린 재발을 막고 여성인권의 소중함과 올바른 역사를 가르치기 위한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의 건설을 반대하다니. 이날 독립유공단체 회원 10여 명은 무대 진입을 시도하기도 했고, “독립의 성지인 독립공원에 어울리지 않는 정신대 할머니들을 위한 박물관이 웬 말이냐!”며 항의했다.


사실 이런 반응은 작년에 서울시가 박물관 건립을 허가한 직후에 이미 나온 것이었다. 광복회를 비롯한 32개 독립운동 관련 단체들은 작년 11월 3일에 ‘서대문독립공원 내 일본위안부 박물관 건축허가 철회를 위한 기자회견’에서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을 일본군위안부 박물관으로 폄하하면서, “독립공원 내에 일본군위안부 박물관 건축을 허가한 것은 몰역사적인 행위로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과 독립운동을 폄하시키는 ‘순국선열에 대한 명예훼손’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단체들은 또 같은 기자회견문에서 “미래의 주역인 우리 청소년들에게 올바른 역사인식보다는 ‘우리민족은 적극적인 항일투쟁보다 일제에 의해 수난만 당한 민족’이라는 왜곡된 역사인식을 심어 미래 세대들에게 역사적 진실에 대한 혼동을 줄 수 있음”을 경고했다. 말로는 서대문독립공원 안에 건설하는 것은 반대하고 다른 곳에 만드는 것은 ‘적극 지지’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위안부 존재 자체를 민족의 수치로 여기고 차라리 없었기를 바라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국민의 기억과 비국민의 기억


도대체 청소년들에게 심어줘야 할 ‘올바른 역사인식’은 무엇이고 미래 세대들에게 전해줘야 할 ‘역사적 진실’이란 무엇일까? 기억을 하고 기념을 하기 위한 공간에 누구는 들어올 수 있고 누구는 그렇지 못하다는 기준은 무엇일까? 기억을 얘기하면서 왜 국가와 민족이 거론될까? 기억으로부터 소외되는 사람은 누굴까?


근대국가가 성립된 이후 국가는 성원들을 국민으로 재규정했다. 그 전까지는 동네에서 농사짓는 평범한 농민으로, 봉건영주에게 복종하는 농노(農奴)로, 또는 왕에게 충성하는 백성으로 살아왔지만, 이제부터는 국가에 충성을 하고 ‘조국과 민족의 영광을 위하여’ 목숨조차 바칠 수 있는 국민으로 살아가야만 한다. 과거의 역사도 국가를 중심으로 재구성되었다. 우리가 했던 모든 행위는 국가에 도움이 되었는가, 국가의 영광을 드높였는가를 기준으로 평가되었고, 그것에 따라 역사의 일부로 채택되느냐 마느냐 여부가 결정되었다.


역사는 선택된 기억들의 총합이다. 국립박물관들을 보라. 어느 나라에나 있는 국립박물관의 입구는 언제나 선사시대의 유물들부터 전시되어있다. 선사시대 유물이 훌륭한 것은 지금의 국가가 위대한 간접 증거로 선전되고 있으며, 심지어는 다른 나라보다 더 오래된 유물이 나올수록 ‘유구한 역사’를 입증해주는 것으로 활용된다. 일본의 어느 역사학자가 구석기 유물을 조작해서라도 한반도보다 일본역사가 길다고 주장한 것을 보면 기억할 역사가 길다는 것이 꽤나 중요한 것임에 틀림없다.


선택된 기억들이 역사가 된다면 선택되지 않은 기억들은 잊혀져간다. 그런데 문제는 잊혀져가는 기억들이 특정한 사람들의 기억이라는 점이다. 국민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 군국주의 시대 일본식 표현에 의하면 ‘비국민’들의 기억들이다. 그렇다면 국민은 누구고 비국민은 누구일까? 어느 나라의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국민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비국민일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2차 세계대전 중 일본에서 ‘비국민’은 사람을 멸시하는 가장 무서운 호칭이었는데, 여기에는 일본 국적을 갖지 않은 외국인뿐만 아니라 빨갱이, 적국의 언어를 말하는 사람, 연애를 하는 사람, 그리고 병자와 허약자조차 포함되었다. 전쟁 중인 조국에 도움이 되는 강한 군인과 그 관련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비국민’이 된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재일조선인들의 목소리는 존재할 수 없었고, 아이누 부족이나 오키나와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는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국민에 속할 기회를 원천적으로 봉쇄당한 사람들은 비국민이라는 낙인을 찍히게 되며, 그들에 대해서 부각되는 것은 소수자라는 정체성뿐이다.


소수자의 기억과 역사는 왜곡되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재구성된다. ‘우리’에게 남아있지 않은 소수자의 기억과 역사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국사 교과서에 농민과 노비에 대한 언급은 놀라울 정도로 적은 반면 대부분의 서술은 왕조와 양반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여성도 찾아보기 어렵다. 드물게 나타나는 여성 ‘위인’들도 가부장제의 틀을 받쳐주는 역할에 충실한 경우에 등장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근대사에서 사회주의자의 이름은 여전히 금기의 대상으로 남아있다. ‘빨갱이’라는 이념적 소수자는 일제시대와 해방 이후의 역사에서 나름대로 명백한 ‘기억거리’를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주변화되고 있다. 영웅사관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국가와 민족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기록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면서 국사책은 우리가 저질렀던 가해의 역사를 실종시켰고, 결과적으로 해방 직후와 전쟁 중의 이념대립 속에서 국군, 경찰, 미군에 의해서 벌어진 수많은 양민학살은 제대로 다뤄지지 않은 채 지나갔다. 학살당한 사람들은 대부분 입이 있어도 말할만한 지위에 있지 못하던 사람들이었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죽은 사람들과 관련된 사람들이라는 이유로 침묵하는 소수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소수자들의 기억을 회복하기 위한 사회운동이 비집고 들어갈 틈도 당연히 없었다.



홀로코스트와 기억의 왜곡된 복원


물론 이런 현상은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며, 다른 나라에서도 소수자들의 기억은 대개 국가의 ‘공식 기억’에서 빠져있다. 그러다가 점차 인권의식이 성장하면서 많은 나라에서는 잊혀져간 소수자들의 기억을 회복해내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수자의 기억을 복원할 때 또 다른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 과정에서 기억의 새로운 왜곡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나치 시대에 6백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한 홀로코스트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 학살은 아리아 족 가운데에서 ‘우리’가 아닌 자들의 기억을 솎아내는 작업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사람들은 인류가 저지른 참사를 반성하며 잊혀져간 자들의 기억을 복원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부끄러운 과거를 복원해내는 과정에는 두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었다.


첫째, 홀로코스트 기억의 복원은 선택적이었다. 힘을 가진 자들의 기억은 훌륭하게 복원된데 비해서 그렇지 못한 자들의 기억은 계속해서 묻혀버렸다. 예를 들어보자. 유대인들은 전쟁이 끝난 후 자신들에게 유리해진 국제정세를 이용해서 기억 복원의 주체로 나섰고 거의 모든 분야에서 확실하게 복원을 이뤘다. 그러나 다른 학살피해자들은 기억의 복원은커녕 아예 아무런 관심조차 받지 못했다. 나치 집권기간 동안에 50만 명의 집시들이 학살당했고, 30만 명의 장애인들이 강제로 불임수술을 당했으며, ‘안락사 작전’으로 20만 명 이상의 장애인, 여호와의 증인 신자, 매춘부, 알코올중독자들이 살해당했다. 유대인보다 학살당한 숫자가 적어서 무시된 것이 아니다. 복원의 주체여야 할 사람들이 철저하게 주변화된 존재였기 때문에, 그리고 동원할 수 있는 정치적 힘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기억은 제대로 복원되지 못했다.


선택적 복원에서 가장 소외당한 경우는 동성애자 학살이었다. 나치 집권기간 동안에 5만 명의 남성들이 동성애 범죄혐의로 기소를 당했고, 이들 중에서 1만 명에서 1만5천 명이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었으며, 그중에서 최소 5천 명 정도가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동성애에 대한 혐오는 전후 독일 사회에서도 지속되어 그들의 복권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들에 대한 차별은 손가락질을 받는 정도의 사회적 차별에 그치지 않았다. 독일 법원은 동성애자들이 살해당한 것은 당시 법에 따라 범죄자로서 처벌을 받은 것이었기 때문에 다른 희생자들과는 달리 경제적 배상을 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더욱이 유엔의 인종학살(제노사이드) 협약도 성별을 제노사이드 판별 기준으로 삼지 않았기 때문에 동성애자들은 국제법에 호소할 수도 없었다. 그들에 대한 기억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으로 머물 수밖에 없었다.


둘째, 홀로코스트 기억의 복원은 기억의 새로운 왜곡과 연결되었다. 유대인들 중에서도 19세기 후반부터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 건설을 집요하게 추진해온 시온주의자들은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단순히 복원하는데 그치지 않고 중동 패권을 위한 침략 정당화의 근거로 탈바꿈시켰다. 학살당한 6백만 유대인의 피로 스스로를 재무장함으로써 자신들이 홀로코스트의 도덕적 계승자임을 주장했고, 그 피의 대가로 팔레스타인 땅을 차지할 권리를 천명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기억 복원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한 것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왜곡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시온주의운동은 유럽에서 벌어진 유대인에 대한 박해와 학살을 방조하거나 아예 ‘적극적으로 무시’했다. 박해와 학살이 있어야 유럽을 떠나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난다는 이유에서다. 물론 이런 기억은 복원되지 않았다. 게다가 도덕적 정당성으로 무장한 이스라엘의 기억은 이제 ‘자기 땅에서 유배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기억을 지워가고 있다. 홀로코스트 기억이 복원되는 만큼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미개성과 야만성은 심화되고, 테러리스트로서의 기억은 선명해져간다.



양심의 기억


소수자의 기억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국가가 각본을 짜고 자본이 비용을 대며 국민이 관객으로 동원되는 박물관의 시선이다. 이 시선에서는 보는 주체와 보이는 객체 사이에 분리가 일어나고, 전시하는 사람과 전시당하는 대상 사이에 대립이 발생한다. 객체가 되고 대상이 된 소수자의 기억은 보는 주체, 전시하는 주체의 기준에 적합할 때에만 전시될 뿐, 그렇지 않을 때에는 창고에 들어가거나 폐기된다. 또 박물관의 시선은 ‘우리’의 동질성을 강화하려는 시나리오로 구성된다. 지리적으로 같은 공간에 산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공통점이 별로 없는 사장과 종업원, 자본가와 노동자, 재벌과 극빈층을 하나의 국민으로 묶기 위해서 박물관은 ‘우리’가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 시선에서는 하나임을 보여주는 큰 줄기가 아닌, 다양성을 보여주는 잔가지에 해당하는 소수자의 기억이 설 자리는 없다.


최근 들어 소수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그들의 권리와 문화를 존중하자는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다문화사회 담론이 한국사회를 휩쓸면서 그동안 무시당해온 그들의 기억을 ‘복원해주자’는 얘기다. 왜 갑자기 이런 일이 생길까? 소수자가 힘을 축적해서 다수자에 도전할 정도에 이를 때에 다수자가 채용하는 전략 중의 하나는 체제 내로 포섭하는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여태까지 단일민족의 위대함을 자랑하던 국립박물관 전시물이 앞으로는 우리가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로 이뤄졌는가를 자랑하는 것들로 바뀔 수도 있다.


그러나 국가에 의해 선택된 일부 소수자들의 기억이 복원된다고 할지라도 그들을 포함하는 ‘우리’가 동질적이기 위해서는 여전히 다른 소수자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할 일은 소수자의 기억을 온전하게 복원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다수자의 기억에 포함시키는 것이 목표여서는 안 된다. 소수자의 기억이 소중한 이유는 언젠가 국민의 기억으로 포섭될 가능성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국민의 기억을 비추는 양심의 기억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