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삶의 현장에서 인권을 꿈꾸다

인권이 내게로 왔다

너무도 어색한 이름, 인권


나는 ‘고운’출신이다. 곱디고운 사람이어서 고운이 아니고 고등학생 운동권 출신이라는 말이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이후 동아리 활동으로 신문반에 가입했고, 그것을 계기로 흥사단 고등학생 아카데미를 알게 되었다. 비교적 내성적이고 보수적이었던 내가 어느새 운동권 고등학생이 되었다. 고등학생 시절 동아리 담당교사가 두발단속에 항의하는 기사를 검열해 이에 항의하며 동아리를 그만두기도 했고, 친구들과 몰래 학교에 유인물을 뿌리기도 했다. 체벌에 반대하며 선생님께 항명하기도 했고, 강제적 아침조회가 싫어 기사를 쓴다는 핑계를 대고 카메라를 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노골적으로 농땡이를 부리기도 했다. 무조건 가야하는 수학여행은 무조건 거부했다.


돌이켜보면 그 당시 우리가 했던 활동이 지금으로 따지면 인권운동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우리들은 그것에 ‘인권’이라는 딱지를 선명하게 붙이지 않았다. 그저 ‘고등학생 운동’이라고 불렀을 뿐이다. 내가 고등학생 시절이었던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우리사회에서 인권이라는 개념은 무척 생소하고 어색한 개념이었다. 선생님이 학생을 때리는 것(체벌이 아닌 구타)은 당연한 일로 용인되었고, 머리카락은 우리의 것이기보다는 선생님의 것이었다. 청소년에게 선택권이란 존재하지 않았고 복종만이 살길이었다. 고 3이었던 1994년, 함께 활동하던 많은 친구들이 고등학생 운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퇴학, 정학을 당했었다. 저항의 결과는 처절했고 우리들은 또다시 절망을 경험했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인권’을 외치지 않았다. 이제는 너무 익숙하다 못해 싫증이 나기까지 한 단어인 ‘인권’은 그 당시까지는 생소하고 어색하기만 한 단어였다.



치열한 대학생활……, 인권은 사치다!


고등학생 운동을 거쳐 나는 자연스럽게 대학에서도 학생운동을 하게 됐다. 아니 어쩌면 거꾸로 학생운동을 하기 위해 대학을 갔다는 것이 올바른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점점 학교에 대한 불만이 커지던 나는 고3에 올라가며 직업반을 선택했고, 대학이 아닌 노동현장을 선택하려 했다. 그러나 10대 후반의 고민이란 얼마나 진지하면서도 또 얼마나 가벼운가? WTO 농산물 개방 반대시위가 한창이던 고3 여름방학 즈음에 만난, (대)학생운동을 하던 선배의 유창한 언변에 현혹되어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며 노동현장을 외쳤던 나는 다시 목표를 바꿨다. 그 선배와 같은 정치외교학과를 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가서 학생운동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진로를 결정하는 과정이 너무 유치했던 것 같아 웃음이 절로 나온다.


운이 좋게 대학에 들어갔고 숭실대 통일문제연구소 흥사단아카데미에 가입했다. 동아리에 가입한 나는 진심으로 뜨거운 대학생활을 했다. 논문을 쓰지 않아 졸업장은 못 받았지만 졸업 평점이 2점대 초반이니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조국은 식민지”라는 말로 모든 난관과 고통은 무마되었고, 인권이라는 단어는 가진 자들에게 저항할 때만 유효한 단어였다. 스스로에게 인권은 사치였고 허영이었다. 조금 더 헌신하고 조금 더 기여하는 것이 미덕이었다. 나의 요구, 나의 생각, 나의 입장은 운동의 논리 아래 늘 부차적인 요소였다. 그렇게 나의 20대가 흘러갔다.



인권,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다


그렇게 통일운동을 했던 나에게 가장 큰 모순은 ‘군대’였다. 아무리 의무라지만 같은 민족에게 총부리를 겨누면서 통일을 외친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도저히 용납되지 않았다. 시간은 흘렀고 고민은 깊어갔다. 병역특례를 받기위해 정보처리 기사 자격증을 취득했고 방위산업체 취업도 잠정적으로 약속받았다. 그러나 풀리지 않는 무언가가 나의 발목을 잡았다. 그 과정에서 2000년대 초반 한국사회에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병역거부…….’


몇 날 며칠을 관련뉴스를 찾아봤다. 그렇게 나는 병역거부에 이끌렸고 많은 불이익을 감수하고서라도 병역거부를 기꺼이 선택했다. 그게 20대 후반의 일이다. 아마도 고등학생 시절 이후 나의 요구, 내면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천착한 결정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결정에 대해 아직까지 일말의 후회도 없다.


그러나 나에게 병역거부는 인권이라는 단어보다는 정의, 평화, 민주주의와 같은 거대담론으로 설명하는 것이 훨씬 수월했다. “내가 병역을 거부하는 것은 개인적인 이해 때문이 아니라 부당한 권력에 항거하고 전쟁을 반대하며 통일을 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도 병역거부운동에 참여하는 이들의 상당수는 인권활동가들이었다. 당시의 나는 바로 이런 기로에서 매우 헷갈렸던 것 같다. 한때는 심지어 ‘당사자로서의 병역거부자와 지지자로서의 인권활동가’라는 도식마저 그리며 서로의 영역이 다르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나는 수차례 ‘인권운동가(?)’들과 의견충돌이 있었는데 지금에서 돌이켜보면 상당히 미안한 부분이다. 예를 들면 한 활동가가 “운동의 대의도 중요하지만 개개인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는 요지의 이야기를 하면 “개개인의 목소리는 서로 달라서 힘을 모으기 힘들다. 하나의 조직, 하나의 목소리로 사업을 해야 효율적이다.”라고 반박하는 식이었는데 돌이켜보면 그다지 다툴 문제도 아니었던 듯싶다. 당시 나를 보며 한심해했을 분들께 그저 무지의 소치였다고 이해해주길 부탁드린다.


아무튼 나에게 있어 인권이란 여전히 ‘몸에 맞지 않는 옷’이었는데 내가 그 옷을 입고 말았다. 그것도 아주 두껍게 말이다. 당시 나를 전혀 모르던 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인권운동가라는 호칭을 주기도 했다. 처음에는 “인권운동가보다는 반전운동가로 불러 달라.”고 말했지만 어느샌가 그냥 침묵하게 됐다. ‘인권운동가’임을 자처해서라기보다는 똑같은 답을 하기가 귀찮아서였던 것 같다.



삶의 현장에서 인권을 꿈꾸다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던가. 인권운동이라는 몸에 맞지 않는 옷도 몇 년이라는 시간 동안 입고 지내다보니 어느새 나의 옷이 되어 있었다. 내 안의 편견도 벗어버리고, 무식함도 어느 정도 나아졌으며, 무엇보다 나 스스로 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힘이 생겼다. 무척이나 감사한 일이다. 인권이라는 것은 ‘전체를 망가뜨리는 부분’이 아니라 ‘전체와 맞먹는 또 하나의 우주인 개인의 삶을 존중하고자 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전체의 이익에도 부합한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개별적 존재의 소중함은 전체를 이루는 가치에 비해 부족하지 않다는 깨달음은 나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정의’와 ‘당위’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강요하는 일이 줄어들었고 다른 사람을 기다릴 수 있게 됐다. 무엇보다 ‘정의’와 ‘당위’를 버리고 나니 내 스스로 즐거운 일을 찾을 수 있었다. (물론 그럼에도 나의 활동 영역이 여전히 정의와 당위의 영역 안에 있기는 하지만…….) 그 깨달음을 운동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을 했고 지역사회 안에서 구체화하고자 노력했다.


나는 인권이라는 추상적인 단어를 보다 생활 안에서 구체화하기 위해 다양한 사업을 펼쳤다. 겨울철 연탄을 지급하고, 장애인의 치과진료 사업을 전개했으며, 방과 후 공부방을 열어 취약계층 아동을 지원했다. 지역사회 안에서 언제나 사회적 약자를 고민했고 더불어 행복한 세상을 꿈꿨다. 그렇게 7년을 지내니 사회적 약자라고 불리는 동작구의 철거민, 장애인, 여성, 아동들은 어느새 나의 친구가 되었다. 지난 7년의 활동은 고등학교 때 그랬듯 굳이 인권운동이라 부르지 않아도 그것 자체가 지역사회 인권운동이 되고 있다. 다만 달라진 점이라면 내 안에 인권이라는 가치가 나의 것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고 점차 성장하고 있다는 것뿐…….



지역사회를 밝히는 인권


그러던 중 지난 5월부터 내가 일하고 있는 단체인 희망동네에서 새로운 사업을 우연히 시작하게 됐다. 사무실 인근 국사봉 중학교 3학년 ‘일진’ 여학생들이 동료 학생을 집단 구타한 사건으로 처벌을 받게 되었는데 그 가해 학부모 중 한 명이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학생을 처벌하는 과정에서 학교 측의 과실이 발견됐고 기자회견을 준비했다. 다양한 방식으로 손을 써서 전학을 보내려던 학교의 계획도 중지시켜놓았다. 그런데 양측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이건 가해자도 피해자도 없는 사건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필요한 것은 아이들에 대한 처벌도 학교에 대한 항의도 아니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모호한 상황에 직면하자 한동안 혼란스러웠다. 우리들이 맡은 아이들은 상대 학생을 폭행한 가해자이면서 그 위 선배들로부터 협박을 받고 있는 피해자였으며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일상적인 모욕과 성적 모독까지 당하고 있었다. 집에서도 매일 혼나기만 하던 아이들은 더욱 삐뚤어졌고 그 스트레스를 동료 학생들에게 풀고 있었다.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아이들의 마음, 가정상황, 학교의 무기력, 졸업생 선배와의 유착, 지역사회의 무관심…… 이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작용한 결과였고, 그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나아가 그 해결책은 아이들을 치유하고, 부모를 교육하고, 학교를 변화시키는 데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들은 학교 측에 학생들에 대한 처벌을 유예할 것을 요청했고 바로 집단 상담에 들어갔다. 다행히도 아이들은 명성(?)에 비해 순수했고 우리들의 프로그램을 잘 따라줬다. 한편 “문제아는 없다. 문제부모와 문제 교사가 있을 뿐이다.”라는 말처럼 아이들에 대한 상담이 아무리 잘 되어도 가정환경, 학교환경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판단하고 학부모 상담도 병행했다. 그렇게 5개월이 경과되었고 우리들은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아이들은 “이제는 부모님과 대화가 된다.”고 말하고 실제로 부모들은 많은 변화가 있었다. 부모의 변화는 아이들의 변화로 이어지고 있다. 여섯 명의 아이들 중 세 명의 아이들이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매일 우리 사무실로 나와 공부를 하고 있다. 나머지 세 명 중 한 명이 추가로 스터디 그룹에 들어오기를 원하고 있고 나머지 두 명도 공부가 아닌 자신의 꿈을 찾아 작가와 피아니스트의 꿈을 키우고 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스스로 우리 단체에서 하는 활동에 자원봉사를 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절대로 변할 것 같지 않던, 부모도 학교도 포기했던 아이들이 불과 5개월 사이에 많은 변화를 한 것이다. 물론 이 아이들이 이제 모범생이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아이들은 스스로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변하고 싶다”고 이야기를 한다. 단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해주는 것만으로도 그 아이들은 스스로 변화하고 있다.


인간으로서의 권리, 그것은 다른 말로하면 사회가 당연히 지켜주어야 할 의무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들은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이분법적 논리로 모든 것을 보고 있지는 않는가? 곱씹어보아야 할 일이다. 사회가 모순되고 불합리할 때 우리 모두는 가해자이고 우리 모두는 피해자일 수밖에 없다. 처벌이나 응징보다 치유와 보살핌이 필요하다. 물론 이러한 논리가 긴급하게 구제를 필요로 하는 피해자에 대한 보호를 게을리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가해자와 피해자를 모두 치유의 대상으로 보고 적극적으로 다가설 때 우리 사회의 변화와 성장은 가능할 것이다.


나 역시 아이들과 함께 상담을 진행하며 많은 교훈을 얻었고 함께 성장했으며 지역사회의 자그마한 한 부분이 밝아졌다는데 매우 큰 기쁨을 느낀다. 그렇게 우리들의 지역운동은 시나브로 지역사회를 변화시키고 있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내일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