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새로운 우파의 탄생 - 자유주의적 파시즘

혁명적 사파티스트의 메시지 / 마르코스

마르코스(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부사령관)
번역: 최형록

차  례

1. 세계화 "유료 시청제"(Pay per view)
2. 기억할 수 있는 망각
3. 지적 실용주의
4. 통찰력 있는 맹인들
5. 과거가 되어버린 미래
6. 파시스트적 자유주의
7. 회의적인 희망


이른바 해방 55주년을 맞이하면서 이동휘라는 인물을 과연 몇 사람이나 알고 있을까? 그는 김구가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기 이전에 상해 임시정부를 수립한 지도자이며 이승만과 불화 끝에 안창호처럼 그와 결별한 사회주의적 성향을 지닌 독립투사였다. 그와 김구가 조선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간난신고(艱難辛苦)를 겪는 동안 박정희는 일본 제국주의의 괴뢰 만주국 장교로서 '천황폐하를 위해서 벚꽃처럼 지고자' 독립투사들 사냥에 분주했다.

'어떤 양심', 김대중 대통령은 국민의 세금으로 매국노의 기념관 건립을 지원하는 '행동' 에 나섰다. 이런 망동에 대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적극적  '교정행위' 가 이 사회에서는 일어나지 않고 있다. 수년 전 고려대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역사적 인물 가운데 인간복제를 하고 싶은 인물을 선택하라는 설문을 했을 때 이동휘는 거론조차 되지 않았으나 박정희는 다수의 지지를 받았다.

'역사적 치매 (Alzheimer)'. 오늘날 세대 차이를 말할 때 그 핵심은 젊은이들과 컴맹 탈출에 공을 들여야 하는 세대 사이의 역사적 '느낌'의 차이, 나아가서는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역사 '의식'의 차이이다. 역사의식의 토대를 이루는 역사적 느낌은 시장의 DDR에 놀아나는 소비주의, 이기주의와 가족주의, 지배적 부르주아 가치관에의 굴종에 최면 걸려있다. 이러한 세대 차는 남한만의 사정은 아닌 것 같다.

마르크스주의 인텔리겐챠인 에릭 홉스보옴은 「극단의 시대」(빈티지 북스, 1994년)에서 20세기 후반을 특징짓는 것들 가운데 한가지로서 공적인 과거와 당대의 유기적 관계에 대한 인식의 결여, 역사의식의 결여를 우려 속에 지적하고 있다.

불의에 대한 역사적 '느낌'을 지닌 판단을 하면서 삶을 성찰하는 젊은이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우리사회는 편협한 인간성의 껍데기가 아니라 끊임없이 성장하고 혁신하는 인간성으로 충만한 사회가 될 것이다.

아래에 소개하고자 하는 글은 멕시코 치아파스 주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무장투쟁을 지도하고 있는 마르코스의 글이다. 그의 글은 자신의 사회의 역사적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하여 오늘날 인류전체가 진정한 인간성을 창조해 나가려고 절실하게 노력할 때 취해야 할 근본적 관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멕시코의 상황에 대한 그의 판단은 유명한 좌파소설가인 푸엔테스의 그것보다 '과격'하다. '과격함'의 진정한 의미는 사물의 근원을 탐구해서 그것을 바탕으로 과감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그의 글은 기본관점은 물론 많은 점에서 필자의 관점과 일맥상통하므로 번역과 함께 필자의 간략한 논평을 동시에 표현하고자 한다.[역자]



새로운 우파의 탄생-자유주의적 파시즘


멕시코에서 7월 2일 실시된 대통령선거는 71년간 권좌에 있던 제도혁명당의 후보를 패배시킴으로써 멕시코를 뒤흔들었다. 국민행동당의 빈센트 폭스의 승리는 진정으로 일종의 지진을 일으켰다. 제도혁명당의 몰락은 협잡과 부패에 바탕을 둔 권력양식의 종말을 표상한다. 그러나 어제 오스트리아에서 하이더 당의 성공, 혹은 내일 이탈리아에서 피니와 동맹을 맺은 베를루스코니의 성공처럼, 광신에 가까운 가톨릭 신앙과 친미적인 전통을 지닌 국민행동당의 성공은 국제적 규모로 새로운 우파, 극우세력과 신자유주의 모순된 잡종의 출현을 보여준다. 부사령관 마르코스는 어떤 맥락에서-"파편화된 세계화의 맥락"-이러한 새로운 극우세력이 탄생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부사령관 마르코스
이른바 형용모순어법(oxymoron) 이라는 수사법에 의하여 사람들은 일종의 별칭을 이해하는데 그것은 하나의 단어로 접속됨으로써 모순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불가지론자들이 어두운 광명을 말하고 연금술사들이 어두운 태양을 말하는 것이 그렇다.
-호르헤 보르헤스  
(역자: 보르헤스는 현대문학을 논할 때 T.S. 엘리어트. 제임스 조이스, 프란츠 카프카처럼 필수불가결한 노벨문학상 수상자이다. 그의 「불한당들의 역사」(민음사)를 읽어보라.)

주목! 당신이 비명을 읽지 않았다면 지금 그렇게 하는 것이 더 낫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반박할 수 없는 사실: 세계화가 저기에 있다. 나는 그것에 대해서 판단하지 않는다, 현실을 확인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형용모순에 대해서 말했기 때문에 그것이 "파편화된 세계화" 와 관계있음을 표현해야 한다.

(역자: 마르코스의 '형용모순어법'은 현실 자체의 역동적 모순성을 변증법적으로 표상하는 방식이다.)
  
세계화는 두 가지 혁명에 의해서 -기술혁명과 정보혁명-가능해 졌다. 그것은 금융 권력의 지도를 받고 있다. 손에 손을 맞잡고 기술과 정보학은 거리를 단축해왔고 국경을 무너뜨려왔다. 그 후 언제든 세계의 어떤 지역에 관한 정보획득이 가능해졌다. 현재 화폐는 무소 부재한 두목이다. 마치 동시에 모든 곳에 있는 것처럼 화폐는 현기증 나게 왔다 갔다 한다. 그리고는 세계에 새로운 모습을, 시장의 모습을 초대형시장의 모습을 부여한다.

"세계화"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것 때문에 동질성은 주요한 전 지구적 특징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 세계는 일종의 군도, 일종의 퍼즐이며 그 퍼즐의 조각 하나하나는 또 다른 퍼즐이 되며 마침내 진정으로 세계화된 유일한 것은 바로 이질성이다.

기술과 정보학이 세계를 통일시켰다면 금융 권력은 전쟁의 무기로서 그것들을 이용하여 세계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버렸다. 세계화는 일종의 세계대전, 제4차 세계대전(1)이며 파괴와 주민이산(離散) 그리고 구조재조정과 재정비의 기제는 전지구로 확대되고 있다. "새로운 세계질서" (이그나치오 라모네에 따르면 전 지구적, 영구적, 직접적이면서 비물질적인)의 건설을 위해서 금융 권력은 국경을 폐지하고 있다. 이런 목적을 품고 그것은 새로운 유형의 전쟁을 치루고 있다. 그것은 민족국가의 기초인 민족경제를 파괴하고 있다. 민족국가는 소멸하고 있는 중이다. 그것 대신에 통합된 시장, 세계적인 거대 쇼핑"몰(Mall)“의 지점들 즉 세계시장이 떠오르고 있다.

결과: 형용모순어법의 수사학. 갈수록 많은 노동자들이 갈수록 빈곤해짐으로써 갈수록 적은 사람들이 갈수록 부유해진다. 존 버거가 말하듯이 "우리시대의 빈곤은 다른 어떤 시대의 빈곤과도 비교될 수 없다. 빈곤은 다른 시대와 마찬가지로 희소성의 자연적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부자들이 세계의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 부과한 우선순위의 수렴의 결과다.(2)" 수백만 명에 이르는 이주자들이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는 한편, 전 세계는 소수의 유력자들을 환대하고 있다. 조직범죄는 사법체계와 정부체계의 척추를 구성하고 있으며(초법적인 것이 법 행세를 하고 있다) 전 세계적 "통합"이 국경선을 양산하고 있다.

가 시대의 진정한 특징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금융 권력의 패권, 기술적이고 정보학적인 혁명, 전쟁, 파괴와 주민의 이산, 그리고 재건과 재조정, 유엔에 대한 공격, 권력과 정치에 대한 재정의, 삶의 모든 측면에 걸쳐서 헤게모니를 휘두르는 지배자의 모습을 띤 시장, 소수의 사람들이 장악해가는 부의 집중도 증가, 빈곤의 거대한 분산, 착취의 강화와 실업의 증대, 수백만 명에 이르는 망명, 영토의 해체, 범죄자들로 구성된 정부. 두 단어: 파편화한 지구화.

지식인들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해야 한다.
그들은 파괴와 주민이산 그리고 재건과 재조정과 같은 현상들로 부터 고통을 받은 적이 있는가? 금융 권력은 그들에게 어떤 역할을 귀속시키고 있는가? 그들은 기술적 진보를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가(혹은 기술적 진보들에 의해서 그들은 어떻게 고용당하고 있는가)? 이 전쟁 통에 그들의 입장은 무엇인가? 그들은 유엔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그렇게 재 정의된 권력과 정치에 대한 그들의 관계는 무엇인가? 세계화의 결과에 대한 그들의 입장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서 그들은 파편화된 세계화에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

결과 글의 화두는 좌파 지식인들과 우파 지식인들 사이의 논쟁을 부추기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지식인들과 정치, 지식인들과 변화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보류한다.
좋습니다. 안전과 당신의 원격조정을 장악하고 있으시오. 곧 시작합시다.

(역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학습을 통한 민중의 자각.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민중의 일원으로서 자신을 자각하고 민중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일체화 시키는 지식인.)
고로 "손바닥이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


1. 세계화 "유료 시청제“(Pay per view)

달력의 접합 점에서 서기 2000년은 20세기와 21세기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다. 이것은 형용모순어법을 증식시키는 것을 조장하는 듯하다. 예를 들면 이 시대는 무엇인가의 종말의 시작 혹은 시작의 종말을 표시해준다고 말한다. 마치 사람들에게는 이미지가 다르고 등장배우들이 다르되 각본은 똑같은 옛날 영화를 되돌리고 있는 것처럼, 모든 일이 이미 일어났던 것처럼 보여 진다. 마치 세계화의 "근대성" (혹은 "탈근대성". 나는 상세하게 설명하는 정성을, 그런 노고를 기꺼이 바치고자 하는 사람에게 넘기고자 한다)은 그것의 형용모순어법을 꿈꾸고 있는 듯하며 우리에게 고풍스런 근대성으로서 나타나는 듯하다……

세계는 사각형이 아니다. 이것은 적어도 사람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다. 그러나 새천년으로 이행해가는 전야에 사람들은 그것이 이제 더 이상 둥글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세계의 실제 형태를 표상하기 위해서 무엇이 적절한 기하학적 상징이 될 수 있을는지를 무시한다. 그러나 우리가 디지털(numerique)적 의사소통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할 때 사람들은 이 세계를 일종의 거대한 스크린으로 정의하려고 시도할 수 있을 것 이다. 당신은 "텔레비전의 스크린"이라는 단어를 덧붙일 수 있는 한편, 나는 "영화 스크린"이라는 단어를 택하고자할 것이다. 내가 영화를 선호하는 것 때문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바로 우리 앞에서 (형용모순어법으로 계속 말하기 위해서) 옛날 영화, 근대적이며 낡은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에.

이것은 동시에 다수의 이미지를 상감(象嵌)시키는(이른바 "그림 속의 그림") 프로그램을 상영할 수 있는 스크린들 가운데 하나이다. 전 지구화된 세계의 경우에 있어서 그것은 지구의 방방곡곡에 대한 이미지들과 관계가 있다. 모든 이미지들이 있는 것은 아니다. 스크린 위에 공간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가 어떤 다른 이미지들보다도 오히려 특정한 이미지들을 선택해왔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우리들은 동시에 세계의 상이한 지역들에 대한 이미지들을 상영하는 다수의 틀을 갖춘 하나의 스크린을 보고 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전 세계가 상영되는 것은 아니다.

가 지점에 이르면 사람들이 "누가 이 스크린을 원격조정하고 있는가?", "누가 프로그램입력을 지도하는가?"라고 묻는 것은 불가피하다. 좋은 질문들 이지만 여러분은 여기에서 대답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의 정확성을 확신할 수 없으며 또한 그것이 주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연결고리 혹은 영화를 바꾸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에 전지구화의 초대형 스크린이 우리들에게 제시하는 상감된, 상이한 틀들 가운데 몇 가지를 관찰하도록 하자.

예를 들어 미 대륙의 틀. 준군사집단인 연방전경(La Police federale preventive)들에게 점거당한 멕시코 국립자치대학교(UNAM)의 이미지를 한 구석에서 여러분은 볼 수 있다. 회색정복을 입은 이 사나이들은 공부를 하려고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훨씬 멀리 떨어진 곳, 멕시코 남동부 산악지역에서는 일단의 장갑차들이 치아파스주의 토착공동체를  유린하고 있다. 또 다른 한쪽에서는 미국의 한 경찰관이 시애틀 혹은 워싱턴일 수 있는 어떤 곳에서 한 젊은이를 난폭하게 체포하는 회색빛 이미지가 상영되고 있다.
유럽의 틀 속에서도 역시 회색빛 이미지들이 양산되고 있다.

오스트리아에서 그것은 수상인 외르그 하이더의 광적인 친 나치 성향이다. 이탈리아에서 수상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넥타이 매무새를 가지런히 하고 있다. 스페인에서 필리프 곤잘레스는 아즈나르로 분장하고 있다. 프랑스에서 르 팡(극우 정당의 당수-옮긴이)은 미소 짓고 있다. 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오세아니아 주에서도 회색빛 이미지가 반복되어 상영되고있다.

음…… 그렇게 많은 회색빛이라…… 음…… 우리는 항거할 수 있어…… 결국 그런 이미지들은 우리들에게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약속해왔어…… 최소한 소리를 높여서 그것이 무엇에 관련된 것 인지를 이해하려고 시도해보자……

(역자: 최근의 사회통계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하루 평균 신문구독에 7분을 할애하고 있는 반면 TV시청에 2시간 수십 분을 "낭비"하고 있다. 우리 사회 역시 제국주의 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언론은 "제4의 권력"으로 군림하고 있다.

마르코스의 논지에 있어서 핵심개념인 "전지구의 초대형 스크린"은 이러한 현실을 표상하는 것이다. 그 스크린이 심각한 그리고 절박한 성찰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지배세력이 그들의 신자유주의적 세계관에 입각해서 "현실의 총체성" 가운데 선택된 조각조각을 마치 전체인양 스크린을 통해서 대중에게 "투사"하기 때문이다.

사랑 놀음과 돈 놀음이 주조를 이루는 일일 연속극, 주말 연속극 그리고 할리우드 풍 폭력으로 남녀사랑을 밀크 쉐이크한 반공영화 '쉬리'에 대한 폭발적 인기는 특히 젊은이들의 수동적 인식수준을 잘 보여준다.

결코 중립적이지 않은 "이미지에의 노예적 인식"과 대립적인 것이 계급 투쟁적 역사인식과 인텔리겐챠의 사회적 역할이다. 마르코스는 이 두 가지를 이어서 다루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영화가 하나의 성찰행위로서 역사학의 주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계급투쟁의 과정으로서 지배계급의 입장에서는 영화를 지배의 도구로 사용하는 반면, 민중의 입장에서는 저항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는 마르크 페로의 논지이다. / 파리: 에디숑 갈리마르, 1993.「영화와 역사」, 서문, '이미지의 제국' 참고).



2. 기억할 수 있는 망각

지식인들은 하나의 사회적 현실이다. 이것은 인류사회의 최초의 발자취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지식인과 관련한 고고학적 지식은 소량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의 시대에 한정하고자 한다. 우리가 밝히고자 하는 바, 이것은 오늘날 지식인들이 행사하는 기능이다.

움베르토 에코는 이렇게 쓰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하나의 범주로서 지식인들은 대단히 모호한 개념이다. 반면에 사람들은 무엇이 '지식인의 기능'인지 더 잘 규명할 수 있다. 지식인의 기능은 사람들이 진리라는 개념 그 자체의 만족할 만한 근사치로서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를 비판적으로 결정하는데 있다. 누구든 그 근사치를 발전시킬 수 있다. 즉 사회로부터 배제된 사람은 그에게 적합한 조건을 반성하여 일정한 방식으로 그것을 해명할 수 있는 한편, 작가는 성찰의 체를 강요하지 않으면서 열정적으로 제반사건에 대응함으로써 배제된 자의 조건을 드러낼 수 있다.

"(3) 그러므로 지식인의 노동은 분석적이며 비판적인 것이다. (하나의 분야에 한정하기 위해서)사회적 사실에 직면해서 지식인은 긍정적인 증거와 부정적인 증거를 분석하며 모호한 것, (설사 그것이 비슷한 것이더라도)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을 연구하며 분명하지 않은 것, 혹은 종종 증거와 정반대되는 것을 폭로한다(소통시키거나 비난한다).

노르베르트 보비오에 따르면 "지식인들이 할 일이란 일상적이고 의식적인 메시지의 전달이며……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그 일은 또한 대체로 그들의 생계를 획득하는 수단이다." 지식인의 이런 접근방식, 비판적 분석을 행하는 전문 직업인의 접근방식을 명심하자.

우리는 또한 지식인이 항상 지적인 기능을 행하고 있지 않음을 알고 있다. "지식인의 기능은 항상 (일어날 수도 있는 일에 대한) 예상을 하면서 혹은(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서) 한 발 물러난 방식으로 행해진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서, 리드미컬하게 그것이 수행되는 일은 드물다. 왜냐하면 사건에 관한 성찰에 비해서 항상 사건은 더욱 신속하며 더욱 절박하기 때문이다(4)."비판적 분석을 행하는 전문직업인은 사회에 적절하지 않은 종류의 의식이 될 수도 있다. 모든 것과 조화하지 않는 비 순응주의자 즉 정치권력과 사회권력들, 국가, 정부, 대중매체, 문화, 예술, 종교 그리고 독자가 원하는바 이 모든 것들과 불화하는 비 순응주의자. 사회적 행위자가 "충분해!"라고 말하면 회의적인 지식인은 "너무 많아", "충분하지 않아"라고 중얼거린다.

지식인은 수구주의를 비판하고 변화와 진보를 요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수의 정면대결이 가로지르는 사회 속에 관련되어 있으며 현상유지를 위해서 권력을 이용하는 자들 그리고 권력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투쟁하고 있는 자들 사이에 분열되어있다. 마누엘 바스케스 몬탈반은 이렇게 쓰고 있다. "지식인은 조롱당하지 않기 위해서 자신에게 정신의 마술사의 사명이 부여되어 있지 않지만 그는 이런저런 방식으로 현실감을 역사와 관련지울 수 있는…… 명백한 지식을 지니고 있음을 이해해야한다. 이런 지식은 현실감을 세상에 존재하는 불의를 규명하는 데 관련지울 수도 혹은 마비된 주변과 만연된 순응주의의 공범자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다(5)."

지식인의 기능 그리고 사회적 당사자가 그에게 제안하는 기능 사이에서 지식인이 선택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에서다. 그리고 진보적 지식인들과 반동적 지식인들 사이의 분열이 (그리고 투쟁이) 일어나는 것 역시 바로 이 지점에서다. 그들 각각은 비판적 분석 작업을 추구한다. 그러나 진보주의자들은 완강하게 수구성, 항구성, 패권과 동질성을 비판하는 반면에 반동적 지식인들은 변화, 운동, 반란과 다양성을 비판한다. 반동적 지식인은 지식인의 기능을 "망각하며", 비판적 성찰을 포기하고 더 이상 과거도 미래도 없기 때문에 기억력이 약화된다. 그에 따르면 오직 현재와 바로 눈앞의 것만 접근 가능한 것이며 더욱이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진보적 지신인들과 반동적 지식인들"을 말하는 것은 "좌파와 우파"의 지식인들에 관한 것이다. 덧붙이자면 좌파 지식인은 지식인의 기능을 즉 (사회 민주적, 파당적, 이데올로기적) 좌파에 대해서도 비판적 분석을 행한다. 그러나 우리시대의 비판은 근본적으로 헤게모니적 권력을, 화폐의 지배자들 그리고 그들에게 봉사하는 자들의 권력을 겨냥한다.
잠깐, 진보적인 좌파 지식인들을 논외로 하고 반동적 우파 지식인들에 주목하자.

(역자: 기억할 수 있는 망각이란 망각해서는 안 되는 기억해야 될 것의 형용모순어법이다. 앞서 마르코스가 표현한 배우만 달라졌을 뿐 각본은 여전히 동일한 것이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다. 그리고 적어도 동학 농민 전쟁기 이래 우리의 역사를 근본적으로 그리고 전면적으로 성찰할 절박성을 요구하고 있다.

민생을 외면하고 날치기로 밤을 지새는 국회, "초법적인 것이 법이 되는" 법치의식을 지닌 재벌(대한민국 헌법의 독아(毒牙), 제37조 2항에 바탕을 둔 국보법을 초월하는 방북(정주영의 소몰이), 불법적 내부자거래, 증권시장의 조작을 통한 개미군단의 도살과 그 악영향, 이런 범죄행위자들 가운데 징역형을 실제로 집행 받은 자들이 과연 몇 명이나 되는가!),

경제문제의 발생이 '희소성'에 있다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진리인양 죽은 지식을 입시를 위해서 주입해야 하며 오늘날 남한사회의 기본구조 틀을 짠 미군정 3년의 역사를 망각시키는 교육, '춘향뎐'은 보지 않아도 타이타닉은 서서라도 보는 젊은이들, 환경파괴적인 난개발에 풀뿌리 민주주의가 실종된 지방자치. 요컨대 "인간미"가 사라진 남한의 사회적 관계가 40년 전 박정희의 군부쿠데타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망각하고 있지 아니한가?

박정희 기념관 건립의 근거로서 주장되는 경제개발의 업적, '보릿고개의 극복'은 정말 정당한 것일까? 우선 그 경제개발이 1960년대 초 미국의 동북아 전략 그리고 일본의 야쯔키 플랜(동남해안 공업지역을 거점으로 남한 전체를 일본의 엔 경제권 안으로 '수직적'으로 통합시킨다는 계획)에 종속된 발전전략임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유신잔당을 비롯한 지배계급이 경제발전의 주역을 쿠데타세력이라고 주장하는 작태는 "전태일 열사"를 비롯한 다수 민중의 피착취와 눈물을 무자비하게 망각하려는 것이다.

현재 일본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자행된 일본 군국주의의 온갖 만행을 '자유주의 사관'이라는 파시스트적 관점에서 정당화하는 작업을 지배계급의 일부에서 추진하고 있다. 그것은 일본 제국주의 자본의 군국주의적 경향성을 드러내는 것이며, 이른바 '평화헌법'의 정신을 그런 경향성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개악하려는 작업과 한 쌍을 이루는 것이다.

부활하는 일본 군국주의 그리고 일본 육군 장교 박정희의 기념관 건립, 이것이야말로 "21세기 판 내선일체(內鮮一體)이며 일선동조(日鮮同祖)"가 아닌가?

위에서 적시한 몇 가지 예들 뿐 만이 아니라 오늘날 남한민중이 처한 상황은 "총체적 위기" 그 자체이다. 이런 상황인식은 국가정보원 역시 공유하고 있으나 그들이 출발한 문제인식 틀이 변혁 운동론적 문제인식 틀과 다름은 물론이다. 해방55주년을 맞이하면서, 남한의 민주주의를 "액자" 속에서가 아니라 "액자" 밖에서 총체적으로 성찰하는 것이 절박하지 않은가?)
(이어집니다)


※ 註
1) "제 4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르 몽드 디플로마티끄, 1997년 8월호를 읽어보라.
2) 존 버거,「Cada vez que decimos adios」, 플로르 판, 부에노스아이레스, 1997년.
3) 움베르토 에코, 「다섯 가지 도덕의 문제」, 그라쎄, 파리, 2000년.
4) 위의 책
5) 마누엘 바스케스 몬탈반, 「유인원의 행성으로부터 온 팜플랫」, 드라콘토스, 바르셀로나, 1995년.


번역 : 최형록(2000년 8월 15일)

본지는 재야 인문학자 최형록 선생의  철학, 역사, 과학, 정치에 관한 세계관을 접할 수 있는 에세이를 매주 토요일 시리즈로 싣는다. 최 선생은 서울대 인문대학원에서 수학했으며 민중당 국제협력국장, 사민청 지도위원, 진보평론 편집위원을 지낸 바 있다. ‘모든 노동자의 건강할 권리를 위하여’를 영역했다. [한국인권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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