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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당과 제1야당이 검찰의 통신 조회 문제를 가지고 한바탕 입씨름을 벌였다. 화천대유자산관리 대주주 김만배 씨와 신학림 전 언론노조 위원장이 지난 대선 당시 윤석열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하기 위해 허위 인터뷰를 했다는 혐의와 관련해 검찰이 수사를 진행하면서 다수 인사에 대한 통신자료 조회를 진행한 게 7개월이 지난 지금에서야 통보가 돼 화제가 되는 것이다.
일부 언론의 보도로는 검찰의 통신자료 조회 대상자는 3천 명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주로 야권의 정치인과 언론계 인사들이 대상이었던 걸로 보인다. 이 중에는 김만배, 신학림 두 사람은 물론 뉴스타파 기자와도 통화 등 연락을 한 일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상당수다. 포렌식 대상이 된 뉴스타파 기자 등 휴대전화의 메신저 채팅방에 접속한 인사를 대상으로 한 통신자료 조회가 진행된 게 아닌지 의심된다.
검찰은 정상적인 수사 절차에 따랐을 뿐이고 ‘사찰’과는 거리가 먼 일이라고 주장하지만, 과거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공수처가 당시 자신과 국민의힘 소속 국회의원들을 ‘고발사주’ 사건과 관련해 수사하면서 통신자료 조회를 실시한 걸 두고 “미친 사람들 아니냐”며 크게 반발했었다. “국회의원 보좌관만 사찰해도 원래 난리가 나는 것”, “심지어 우리 당 의원들 단톡방까지 털었다. 그러면 결국 다 열어본 것 아니냐. 이거 놔둬야 하겠나”, “(공수처장을) 당장 구속 수사해야 하는 것 아닌가”, “도대체 지금이 어느 때인데, 이게 40∼60년 전 일도 아니고 이런 짓거리를 하고 백주대낮에 거리를 활보하나”... 다 윤석열 당시 후보가 공개적으로 한 말이다.
더불어민주당이 윤석열 당시 후보의 말을 근거로 검찰 수사를 비판하는 것에 대해, 국민의힘은 당시 이재명 후보의 발언을 근거로 내세워 방어를 시도하고 있다. 이재명 당시 후보가 “법령에 의해 한 건데 사찰이라고 볼 수 없다”고 했다는 거다. 언론은 양당이 대선 때의 입장을 공수만 바꿔 되풀이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참 한심한 모습이다.
이런 기사 제목을 보며 고개를 젓고 혀를 차면서 눈을 다른 데로 돌린다면, 함정에 빠진 거다. 서로 반대하는 걸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는 양당 정치의 구도는, 그러한 구도에 현안을 욱여넣는 것만으로도 힘을 발휘한다.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정리해야 한다.
이재명 후보의 당시 발언은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토론회에서 나왔다. 그는 앞선 입장을 언급하면서 “지나친 것에 대해서는 경계해야 할 것”, “만약 야당에 대해서만 했다면 충분히 의심받을 만한 일이고 문제를 제기할 만하다. 여당만 빼고 했다면 문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 문제가 되는 수사는 ‘야당에 대한 수사’이다. 국민의힘은 이재명 당시 후보 발언을 체리피킹 하는 셈이다.
당시 이재명 후보가 이런 어정쩡한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 통신자료 조회를 수사기관이 거의 무제한으로 수집하는 것에 대해 시민사회는 오랫동안 문제를 제기해 왔다. 지난 대선 때도 마찬가지다. 시민사회를 포함해 대다수 상식을 가진 인사들은 두 가지를 지적했다. 첫째, 검찰총장 출신으로 수사 실무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윤석열 후보가 통신자료 조회를 마치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일처럼 주장하는 것은 여론을 호도하는 것이다. 둘째, 그러나 수사기관의 행태는 수사권을 남용하는 것이 분명하므로 이에 대해서는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 이런 주장이 있으니 이재명 후보 입장에서는 마냥 ‘사찰이 아니다’라고만 주장하기 어려웠던 거다.
제도적 보완, 가령 통신 자료 조회의 경우에도 영장을 청구하도록 하는 등의 절차가 필요하다는 지적은 정권을 막론하고 시민사회가 꾸준히 해왔다. 지금의 양당은 어느 쪽이 정권을 잡더라도 자신들이 수사권 남용의 대상이 될 때만 피해자 행세를 할 뿐, 제도적 대안을 만드는 일에는 무관심해 왔다. 그런 점에서 양당의 문제는 단지 공수만 바꿔 서로를 공격하는 ‘내로남불’에만 있는 게 아니다. 실제로는 제도를 바꾸는 일에 대해 침묵한다는 점을 짚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다.
그게 그거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 차이는 중요하다. ‘내로남불’의 담론에서 시민사회는 앞뒤 없이 더불어민주당과 한편으로 묶여 ‘내로남불’의 당사자로 취급받는다. 그러나 제도를 바꾸는 일에 대해 침묵한 것으로 문제를 풀면, 제도를 바꾸자고 주장한 주체가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만 하게 된다.
그러니까, 그게 중요한 거다. 이 문제에 있어서, 제도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을 이미 해온 사람들이 있다는 게 중요하다. 굳이 이 점을 보지 않는 사람들이야말로 양당이 만들어 내는, ‘서로 내로남불이라고 욕하는 내로남불’ 체제를 유지하는, 이를 통해 진보가 아닌 현행 유지의 동력을 만드는 데 일조하는 공범이라고 할 수 있다.
양당이 만들어 내는 현행 유지의 경쟁에 대한 납작한 시각은 다른 사안에서도 문제가 된다. 가령 대다수 언론이 이 사안을 다루는 프레임은 더불어민주당이 무리한 법안을 추진하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다는 거다.
그런데 사안을 단순하게 이렇게 설명하고 혀를 차면서 고개를 가로저으면 충분한 것일까?
더불어민주당의 주장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이 많은 게 사실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지금 시기에는 ‘25만 원’이라는 액수와 ‘보편지원’이라는 방법론, ‘현금성 지급(지역화폐 혹은 상품권이라 해도 마찬가지다)’이라는 수단에 모두 집착할 필요가 없다. 인플레이션과 경기침체를 동시에 우려해야 하는 지금과 같은 국면에서는 되도록 다양한 수단과 방법으로 소득 보장을 더한 사회안전망을 다층적으로 강화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한 종합적인 계획 또는 청사진이 부재한 상황에 ‘25만 원 지원’만 외치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이렇게, 방법론에 대한 비판은 제기될 수 있다. 그런데 어려운 민생 경제에 대응해야 한다는 명분은 거부할 수 없다. 어찌 됐든 ’25만 원 지원’에 관한 법률은 국회가 공식적으로 처리한 것이다. 정부가 요구하는 대로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려면 적어도 다른 방법론으로 명분을 충족시킬 수 있다는 전망을 같이 얘기해야 한다.
그래야 말이 되고 국민도 납득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정권은 국회가 처리한 법률에 위헌적 성격이 있다고만 주장할 뿐 대안을 말하지는 않는다.
이게 단지 능력이 부족해 생긴 문제라면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능력이 되는 사람을 찾아오면 되는 문제 아니겠는가. 그런데 윤석열 정권의 행태를 보면, 능력이 아닌 신념의 문제 아닌가 싶은 순간이 너무나 많다. 가령 올해 1분기 실질 국내총생산 속보치에 대한 정부의 자화자찬을 보자. 지난 4월 대통령실은 “재정 주도가 아니라, 민간이 전체 성장률에 온전히 기여했다”며 “민간 주도의 역동적인 성장 경로로 복귀했다”고 했다. 1분기 실질 GDP가 직전 분기 대비 1.3%, 전년 동기 대비 3.4% 성장한 가운데 구체적 지표를 살펴볼 때 정부의 성장률 기여도가 0.0%였다는 점이 고무적이라는 거였다. 쉽게 말하면 정부가 기여한 바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데도 경제 성장이 이뤄졌다는 게 희망적이라는 건데, 정부가 아무 일도 안 한 거나 다름이 없는 게 자랑거리인 정권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그나마 이 정권이 장담을 한 대로 ‘민간 주도 성장’이라는 공식이 확인된다면 그나마 다행일지 모른다. 그런데 2분기는 전 분기 대비 역성장이다. 물론 장기적으로 볼 경우엔 워낙 변수가 많으니 이후 상황 전개는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건 단기적 지표만으로 민간 주도 성장이니 뭐니 하는 것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는 선전 문구에 불과하다는 거고, 그 선전의 핵심이 ‘정부의 기여는 없어야 한다’는 당위를 증명하는 거였다면 앞으로도 뭔가를 기대할 일은 없을 거라는 거다.
정부 운영에 대한 총체적 철학 부족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런 사태는 최근의 상황을 놓고서도 계속된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글로벌 변수가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다. 한국 경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 대통령이 휴가를 갔다면 여당이 중심을 잡고 비상한 대응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는 ‘금융투자소득세 폐지를 위한 초당적 협의’를 주장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금투세까지 예정대로 도입하면 ‘퍼펙트스톰’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논리다. 한동훈 대표의 제안에 대통령실이 맞장구를 치면서 실로 오랜만에 당정이 협력하는 분위기다.
이게 보여주는 바는 무엇인가? 이 정권은 지금 상황의 핵심을 ‘주식투자자들의 민심을 잡을 기회’로 보는 거다. 금투세를 도입하면 ‘큰 손’이 떠날 거고, 주가 하락으로 이어져 개미들만 손해를 입을 거라는 건 일종의 신화이다. 이 ‘큰 손’ 신화는 공매도 재개와 대주주 기준 조정 등에서도 절대적 영향을 발휘하고 있다. 주가가 떨어질 테니 금투세를 아예 폐지하자는 건 통치 세력이 제도를 다루는 방식이 아니라 신화에 올라타려는 시도, 즉 포퓰리즘으로 볼 수 있다. 가령 이런 논리면 주가가 오를 경우 금투세를 다시 도입하자고 해야 할 것인데, 그게 말이 되겠는가?
경제가 어려울 때 혹은 불확실성이 커질 때 기댈 데가 없는 사람들이 먼저 피해를 본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거기엔 관심이 없고 ‘주식투자자들의 민심을 잡을 기회’라는 맥락의 어떤 정치적 역습을 떠올린다. 그런데 이 정권은 자기들은 빼고 다른 세력을 ‘포퓰리즘’이라며 비난하는 여론몰이를 한다. 이런 행태를 한 마디로 정의하면 ‘남을 포퓰리즘이라고 비판하는 포퓰리즘’이다.
여기에 대항하는 더불어민주당은 이중 전략을 펴고 있다. 최근 더불어민주당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상속세, 종부세 등에 대한 감세 논의가 이에 해당한다. ‘윤석열 탄핵’을 외치면서 감세를 주장하는 이러한 전략의 실체는 무엇인가? ‘이재명의 민주당’에 대한 여론의 불만을 탐지해보면 왜 이런 해법이 나오는지 알 수 있다.
지난 총선 당시 ‘지민비조’에 동조했던 유권자 그룹을 인터뷰한 언론 보도를 종합해보면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불만족은 크게 두 흐름으로 나뉜다는 걸 알 수 있다.
하나는 윤석열 정권과 더 분명하게 싸우지 못하고 있다는 취지인데 주로 호남을 중심으로 조국혁신당을 지지하는 흐름에서 확인된다. 최근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호남 지역에서만 저조한 투표율이 이어지는 가운데 다른 지역의 표심과 판이한 흐름이 나타나는 이유도 근본적으로는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정치고관여층이 상대적으로 관심을 쏟지 않는, 이른바 ‘민생 이슈’, 그중에서도 집값이나 이와 연동된 세금 부담과 관련된 중산층 이슈의 해결에 대한 요구다. 종부세와 상속세는 현안이라는 측면에서 집값과 직결된 문제로 이해되고 있다. 그런데 집값의 등락으로 종부세나 상속세 부담을 걱정하게 될 만한 처지의 중산층은 서울에 거주한다. 즉, 이 대목은 서울의 중도층 유권자 그룹이 더불어민주당에 요구하는 이슈인 셈이다.
따라서 ’이재명 체제’ 더불어민주당은 한편으로는 ‘윤석열 탄핵’ 등 구호를 앞세워 정권과 상층고공정치에서 각을 세우는 일에 몰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부동산과 관련한 감세에 손을 들어주는 접근으로 지지층 확장을 꾀하고 있는 셈이다. 정치공학으로만 보자면 합리적 선택일 수 있지만, 앞서 집권세력의 태도와 엮어 정책적 측면으로 보면 결국 양대 세력이 자산시장과 연관된 대목에서 감세와 관련한 대타협을 이뤄낼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볼 수 있다면, 여기서 문제의 본질이 뭔지 다시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정권이 수용 불가능한 법안을 더불어민주당이 완력으로 처리하고, 대통령이 이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민주주의’라는 규범 혹은 관행이 무너지고 있는 게 본질인가 아니면 그러한 갈등의 연출이 실제 한국 엘리트-기득권이 제도를 어느 방향으로 끌어나가려 하는지를 가리고 있다는 게 본질인가? 단적으로 말해 이 문제를 규범 혹은 관행의 차원으로 본다면 양대 세력이 자산시장에 대한 감세에 동의할 경우, 이를 협치의 한 방식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합의’한 것일 테니까. 그러나 그렇게 본다면 그건 하여간 ‘진보’의 시선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진보에게 있어서 ‘비토크라시’는 규칙의 문제인가, 정치 그 자체의 문제인가? 이를 직시하지 않고 진보의 재건이 가능하겠는가?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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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하는 정치·사회 평론가, 칼럼니스트다.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에서 일하며 한국의 진보정치가 현실적 대안으로 자리 잡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했으나 무엇이 잘못됐는지 기대만큼 잘되지 않았다. 지은 책으로는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 『냉소 사회』,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