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의 옷, 노동자의 옷
파리 올림픽이 막을 내렸다. 개막식 풍경이 떠오른다. 패션의 중심 프랑스답게 화려한 의상으로 단장한 연기자들의 공연과 무대가 세느강을 따라 펼쳐졌다. 길로틴에서 잘려나간 자신의 목을 든 왕비가 혁명 당시의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디오니소스와 축제를 상징하는 공연의 중심엔 LGBTQ를 상징하는 여러 연기자들의 현란하고 파격적인 의상들이 눈에 띄었다. 프랑스혁명의 나라, 최초의 노동자 코뮌의 도시 파리다웠다.
패션, 하면 프랑스 노동자들도 할 말이 많다. 원래 양복의 출발은 17세기 영국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양복이 대륙으로 넘어와 남성복의 대세가 되기까지에는 프랑스혁명의 중심에 섰던 상퀼로트를 빼놓을 수 없다. 당시 프랑스 귀족들은 반바지인 퀼로트를 입었는데, 파리의 민중들, 즉 수공업자, 장인, 소상인, 노동자 등은 ‘퀼로트를 입지 않은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상퀼로트(Sans-Culotte)로 불리었다. 이들은 혁명의 맨앞에 섰고 루이16세를 단두대에서 처형했다. 혁명이 승리하자 제3신분의 옷차림이 유행하면서 이른바 ‘헌법식 복장’이라 불리기도 했다.
특히 1793년 국민공회가 복장의 자유를 천명하는 칙령을 선포했는데, 그 이후 남성복은 귀족의 복장을 버리고 검소하고 수수한 양복이 유행했다. 프랑스에서의 혁명은 1830년 7월혁명, 1848년 2월혁명, 그리고 1871년 파리코뮌 등 거듭하면서 다시(re) 사회를 변화(evolution) 시켜갔고 그에 발맞춰 정장 수트는 남성복의 대세로 정착했다.
민중의 옷, 노동자의 옷이 그 시대를 대표하는 옷이 되는 것이 문화사의 일부라면, 지금 일하는 사람들이 어떤 옷을 입는지를 살펴보는 건 문화인류학적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한국 노동자들은 어떤 옷을 입고서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노동자의 작업복, 안전과 능률 사이
이 책은 경향신문 작업복 기획팀이 2023년 6~7월 연재한 기획 시리즈를 엮은 책으로 노동자가 입는 작업복을 살펴본다. 이 책에서 정의하는 ‘작업복’이라 함은 ‘일터에서 일할 때 입는 옷’ 모두를 포괄하는데 여기에는 ‘유니폼’도 들어가고 일의 특성상 필요한 장갑이나 신발 같이 ‘몸에 붙는 모든 것’도 포함된다. 그리고서 여러 노동의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로부터 일과 작업복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썼다.
이들이 만나서 얘기를 듣고 사진을 찍고 했던 노동자들은 각양각색이다. 하수처리 노동자, 소각처리 노동자, 폐기물연료 노동자, 재활용품 선별원, 환경미화원, 여성 형틀목수, 여성 용접사, 호텔, 은행, 패스트푸드점 여성 직원, 여객기, 열차 여성 승무원, 산불재난특수진화대원, 급식 노동자 등이다.
작업복은 우선 하는 일에 맞게끔 입어야 한다. 농부가 양복을 입고 모내기를 할 수는 없고 급식노동자가 방염복을 입고 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일을 잘 처리할 수 있도록 돕는 작업복이어야 하고 주머니 갯수, 위치라든가 재질, 기능, 보호구의 종류와 요구되는 성능도 다 다르다. 해당 일을 능률적으로 하기 위해 고안되고 진화되어 온 차림새다.
그런데 어떤 일을 하는 데 잘 들어맞는, 말그대로 ‘착붙’이어야 할 작업복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걸리적거리고 오히려 업무에 방해되고 구체적 현장과 아무런 상관 없이 지급된 작업복과 신발, 장갑들이다. 소방호스로 물을 뿌리는 산불진화대원의 장갑이 방수 기능이 없다면 한겨울 산불 현장에서 동상이 걸리기가 일쑤일 것이다. 어떤 환경미화원은 왼손에는 비닐장갑 위에 목장갑, 오른손에는 방수 기능이 있는 PVC 장갑을 끼는데 이는 음식물 쓰레기를 주로 만지기 때문에 작업자 스스로 고안해낸 것이라 한다.
일의 성격과 업무 특성에 맞지 않는 작업복과 보호용구는 역으로 노동자들의 안전을 심대하게 위협하고 급기야 생명까지 빼앗을 수 있다. 소각처리 노동자들처럼 불을 가까이 하는 노동자들은 폴리에스터와 폴리우레탄 같은 옷에 불티가 튀면 섬유가 조용히 녹아서 뚝 떨어지는데 그게 맨살을 파고 들면 심각한 화상으로 이어진다. 모든 기준이 남성의 신체 사이즈인 건설 현장과 조선소의 여성 노동자들은 몸에 맞지 않는 작업화와 안전대를 고쳐 입거나 하는데 이 역시 위험도를 증대시킨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자기 돈으로 이것도 사고 저것도 입어보면서 제대로 된 작업복, 장갑, 보호구를 찾아 나선다.
거의 모든 현장, 노동자들이 작업복과 관련해 품질과 지급 횟수 등의 쟁점을 둘러싸고 사측과 갈등을 빚는다. 이 같은 일이 다반사로 벌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김종진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작업복은 권력관계”라면서 “권력이 높을수록 재질이 좋고, 선택권도 주어지고… 권력이 낮을수록 퀄리티는 물론이고 지급 횟수 같은 것들도 전혀 고려되지 않아요”라고 말한다. 산불진화대원 신현훈은 이렇게 되묻는다. “제복 입는 사람들은 사실상 어느 조직에서나 하위직이란 말이에요. 고위직들이 입는 옷이면 그렇게 만들겠어요?”
노동자들은 그런 작업복을 바꾸기 위해서 노력해 왔다. 개선이 이루어지면 해당 노동자들의 안전에 도움이 되겠지만 시민과도 무관한 것은 아니다. 재난과 참사는 많은 경우 시민들의 위험도 증대시키기 때문이다. 예컨대 항공사 승무원이 비상시에 승객을 구조하거나 대피시키는 데에 타이트한 치마 유니폼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더구나 “승무원 유니폼은 승무원을 ‘직원’이 아니라 ‘여직원’으로 보이게 한다.” 노동조합은 여성 승무원에게 지급되는 바지 유니폼을 도입하는 데에 2년을 싸워야 했다.
신분의 표식, 노동자의 작업복
옷이 차별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차별이 있기에 그 옷이 차별되는 것이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전 시기를 보자. 울산이나 창원 같은 남성들로 이루어진 중화학공업 대공장에서조차 퇴근 시간에 악착같이 옷을 갈아 입던 사람들이 있었다. 작업복은 ‘공돌이’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노동자대투쟁 이후 시기에는 당당히 입고 다니는 옷이 되었다. 현대중공업 앞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나오는 회색 작업복을 입은 노동자 행렬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작업복은 ‘노동자의 자부심’처럼 여겨졌다. 물론 용접 불티 때문에 구멍이 숭숭 나고 그라인딩 작업에서 생긴 검은 쇳가루로 더러워진 작업복은 캐비닛에 벗어놓고 A급 작업복이 출퇴근복이었다.
그러다가 2000년대 초가 되면 현대자동차나 현대중공업의 20대 새 조합원들은 다시 출퇴근하면서 작업복을 벗기 시작했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여전히 가끔 곱씹게 되기는 하지만 ‘개성의 발로’ 뭐 이런 표현이 조금 오글거리긴 해도 그와 연관된 어떤 주체성의 변화를 표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 또 그로부터 20여 년이 넘게 지났다. 작업복에 관한 노동자의 시선은 세 시기 사이 어딘가에서 섞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현장에서 일하던 작업복 차림 그대로 퇴근할 때가 많다. 작업할 때 입었던 조끼를 그대로 입은 채 동네를 돌아다니면 남편은 그에게 ‘그렇게 하고 다니지 말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건설현장에서 일한다는 것을 숨기고 싶지 않다”고 했다. … 저는 작업복, 노조 조끼, 모자까지 다 써요. 부끄러운 일이 아니잖아요?”
2000년대 초반, 노조원과 간부들이 입던 ‘빨간 조끼’를 두고 극심한 사회적 혐오 선동이 일삼아졌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집회 갈 때 조끼를 벗고 오라는 우스꽝스러운 지침이 내려오기도 했었다.
<송곳>의 작가 최규석은 어느 자리에서 이렇게 반문했다. “노조 조끼를 벗을 게 아니라 그 조끼가 20대나 많은 사람들에게도 유행하는 매력적인 옷으로 여겨지도록 하면 되지 않겠냐”고 말했었다. 그렇다. 옷이 문제가 아니라 노동조합이 보호하는 범위를 확장하고 조직을 확대하며 권리를 나누어야 할 일이었다. 그런 선동이 먹혔던 것은 어쩌면 더 많은 연대의 범위 확장을 요청하는 바람의 크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운동은 우리가 입는 옷을 바꾸어 갈 것임에는 분명하다.
21세기 노동자의 청바지
그런 것을 보면 앞으로 100년 후, 아니 당장 30년 후 거리에서 목도할 사람들의 옷차림이 어떨지 자못 궁금해진다. 노동자의 작업복, 노동자의 안전 보호구가 특정 작업 조건에서가 아니라 대중들이 선호하는 옷차림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도 아주 ‘핫’하게 말이다.
예컨대 19세기, 미국의 광부나 공장노동자, 그리고 대륙횡단 철도를 건설하던 노동자들은 거친 노동 환경에 찢겨나가는 기존 옷을 대신할 다른 옷을 찾아냈다. 두꺼운 면직물인 데님 원단으로 만든 옷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청바지다. 공장 노동자들은 이 데님 원단으로 아래 위 작업복을 입혔다. 우리가 노동자계급을 흔히 ‘블루 칼라’라고 지칭하는 이유다. 그러던 것이 제임스 딘이 입고 젊은이들이 열광하면서 따라 입자 이는 핫한 패션이 되었다. 미국을 넘어 유럽으로 퍼져나가면서 청바지는 1960~70년대 영 파워를 상징하는 아이템이 되었다.
한편, 이 위험이 넘쳐나는 기후위기의 시대, 특히 코로나19를 거치면서 안전을 위한 ‘보호구’도 흔히 보는 옷차림의 일부가 되었다. 따가운 햇살을 가리는 양산, 팔토시, 얼굴 햇볕 가리개, 냉감티셔츠, 아이스 조끼, 발열조끼 등이 그렇다. 많은 경우 일반 사람들이 착용하게 되는 보호장구 같은 것들은 특정 업무, 특정 노동 직군에서 사용하던 것이 대중화된 경우가 많다.
이제 SF 작품들에서 먼 미래 사람들의 의상이 달탐사를 떠난 우주인의 그것을 닮은 것처럼 묘사되는 것은 단순히 상상력의 소산인 것만은 아니다. 심지어는 산불감시대원의 복장도 일상복은 아니더라도 집집마다 갖춰놓아야 할 필수품이 될지도 모른다. 기후위기와 산불의 밀접한 연관성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노동자의 옷이 차별과 편견을 깨고 패션의 아이콘으로, 핫한 아이템이 된다는 것이 중요한 건 아니다. 그보다는 지금 이 작업복이 우리를 노동의 위험으로부터 잘 보호하고 있는지, 그렇지 못하다면 어떤 조건이 이를 가로막고 있는지 살필 일이다. 그리고 그같은 현실을 바꾸어내기 위한 ‘운동의 과정’,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노동조합과 노동 중심 사회의 보호를 받고 권리가 보장받는 가운데서 삶을 영위하게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다시(re) 사회를 변화(evolution)시키는 것이고 그 결과로 새로운 노동자의 주체성은 새로운 패션과 연결될 것이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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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돌규는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