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산불 장면. 출처: Noticias EstrellaTV 화면 캡처
애초에 로스앤젤레스는 통바(Tongva)족을 비롯한 선주민의 고향이다. 스페인에 이어 멕시코가 이곳을 자국 영토로 편입하면서 '천사의 도시(Ciudad de los Angeles)'라고 이름 지었고, 그 후에 미국 영토가 되면서 지금의 로스앤젤레스가 된 것이다. 그리고 현재, 그 천사의 도시가 지옥불에 불타는 중이다. 미국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산불이 LA를 집어삼키고 있다.
이 글을 쓰는 동안 팰리세이즈(Palisades)를 비롯해 40,000에이커 이상과 12,000개 이상의 건물이 불타고 여전히 화재가 다 진압되지 못한 채다. 그사이 사망자는 수십 명에 이르고 수만 명이 집을 잃었다. 현재까지 화재로 인한 손실 규모가 36조 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이 와중에 또 다른 강풍이 예고되어 있다.
도대체 이 재앙적 산불은 왜 일어났을까? 송전탑 불꽃 때문일까? 노숙자의 방화 때문일까? 새해맞이 폭죽 때문일까? 혹은 트럼프가 주장하는 것처럼 개빈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와 환경운동가들이 빙어를 보호하기 위해 물을 전용하는 바람에 소화전에 물이 말라서일까? 산불 원인을 놓고 여러 주장이 격렬하게 각축하는 가운데, 단연 눈에 띄는 학자가 존재한다. 3년 전 세상을 떠난 역사학자 마이크 데이비스.
"산타 아나의 이런 강풍에, 라이터를 들고 오토바이를 탄 단 한 명의 미치광이가 세상의 절반을 불태울 수 있다."
LA 산불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면서 여러 지면에서 마이크 데이비스의 에세이를 다급하게 호명하고 있다. ⟪공포의 생태학⟫에 수록된 '말리부가 불타도록 내버려두는 이유(The Case for Letting Malibu Burn)'라는 에세이가 그 주인공. 마이크 데이비스는 이 글을 쓴 이후에도 20년 넘게 여러 기고와 인터뷰들로 끊임없이 산불 재난을 경고해 왔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말을 귀담지 않았다. 영민한 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마저 그의 경고가 너무 종말론적이고 생태주의적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결국 마이크 데이비스가 옳았다.
1995년에 쓰여진 이 에세이는 도발적이게도 말리부를 불태워라, 그렇지 않으면 핵폭탄에 필적하는 산불 재난에 휩싸일 거라고 경고한다. LA가 거대 산불에 집어삼키지 않으려면 불을 지르라는 것이다.
말리부는 산타모니카 산맥을 따라 펼쳐진 LA 서쪽의 해변도시다. 주로 부촌이 형성되어 있다. 이번 산불에 전소된 패리스 힐튼의 집도, 조 바이든 차남의 61억 원짜리 호화 주택도 바로 말리부에 있다. 즐비하게 늘어선 할리우드 스타와 부자의 집들이 이번 산불로 속절없이 불타올랐다.
'2022년 World Press Photo 수상작 . 호주 선주민의 관행소각 장면
마이크 데이비스는 도대체 왜 말리부를 불태우자고 한 걸까? 결론부터 말하면, 캘리포니아가 바로 '화재 벨트'이기 때문이다. "말리부는 북미의 산불 수도이자 아마도 전 세계 산불 수도일 것이다." 이 건조 지역의 생태계가 애초에 불타도록 진화해 왔다는 것이다. 가을 무렵, 거칠디거친 산타 아나 계절풍이 몰아치면서 주기적으로 산불이 발생한다. 생태학자 제임스 에이지도 이 주장을 뒷받침한다. "캘리포니아는 북미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불의 환경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에 따르면 캘리포니아 생태계의 54%가 불과 함께 진화해 왔다. 요컨대, 산불이 캘리포니아 남부의 기본적인 환경 조건인 것이다.
1962년 LA 소방청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재난을 위한 설계(Design for Disaster)>도 이런 사실에 기초해 LA의 재앙적 산불을 경고한다. 산타모니카 산맥을 따라 늘어선 주택들, 가공할 계절풍, 바싹 마른 덤불, 좁은 도로 등이 바로 재난을 위한 설계나 마찬가지라는 진단을 내린다. 심지어 이 도시에 갖춰진 소화전도 개별 주택의 불을 끄기 위해 설계돼 있고 수압이 약한 까닭에 산불에 효율적으로 대응하지 못한다고 우려한다. 다시 말해, 항상적으로 산불이 일어나는 곳에 대책 없이 주택 지역을 조성한 것이 문제라는 것. 놀랍게도 이 다큐는 무려 63년 전에 LA 산불의 모든 경로를 예견하고 있다.
마이크 데이비스가 지적한 것처럼 산타모니카 산맥에 살던 선주민들은 오랜 세월 불을 질러왔다. 전체 삼림을 불태우는 것이 아니라 모자이크 모양으로 부분마다 불을 지른다. 이른바, 관행 소각(cultural burning)이다. 호주와 북미, 남미와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약 1만2천 년 전 홀로세가 시작될 무렵부터 전 세계에 걸쳐 관행 소각이 이루어졌다. 겨울과 이른 봄, 또는 늦가을에 지르는 '차가운 산불'은 삼림 전체를 위협하는 대형 산불을 예방한다. 산불 연료로 기능하는 마른 잡목들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또 관행 소각은 죽거나 메마른 바이오매스를 소각함으로써 숲의 생물다양성을 향상시킨다. 캘리포니아의 선주민들은 관행 소각을 통해 궤멸적인 대화재를 방지하고 생태계를 섬세하게 리셋하면서 다양한 생물종을 양육해 왔다. 즉, 불의 땅에서 자연과 함께 공진화했던 것이다.
관행 소각이 금지된 것은 유럽의 식민 지배 때문이다. 유럽에서 건너온 식민 지배자들은 그 이유를 도무지 헤아리지 못했다. 자연을 식민화하고 지배할 수 있다고 믿는 폭력적인 세계관 때문이다. 산불 역시 반드시 통제되어야 할 자연의 위협으로 여겼다. 그에 따라 선주민들의 관행 소각을 미개하다고 단죄하며 금지했다. 1793년 스페인령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미 서부 최초의 화재 규정을 작성하며 "목초지에 불을 지르는 이 해로운 관행을 근절"하고 "가장 엄중한 처벌"을 시행하라고 지시했다.
뒤이어 19세기 말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야생' 보존 명목으로 선주민을 그들의 고향에서 내쫓고 국립공원들을 차례로 지정하면서, 관련 부처에 산불 대응을 요청했다. 그러자 1900년 미국 임업부가 "북미 숲을 공격하는 모든 적 중에서 불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며 자연의 마지막 들짐승인 산불과의 전쟁을 선언했다. 이것이 바로 미국 소방 시스템의 기원이다. 이때부터 산불 대응은 '연료 관리'가 아니라 '점화 관리'에 철저히 편향된다. 즉, 조금이라도 산불이 나면 그 즉시 진화하고 점화를 야기한 개별적 원인들에 편집증적으로 집착해 왔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유럽 식민 지배자들을 따라 침입성 풀도 함께 이주해 온 터였다. 야생 귀리, 붉은 브롬, 여우꼬리풀이 대표적이다. 개발과 방목 같은 생태적 단절과 교란이 발생하면 침입성 식물이 그 공백을 메우게 되는데, 토착종에 비해 훨씬 가연성이 높다.
그 덕에 오늘날 대형 산불이 자주 일어나는 곳들, 호주, 미국, 캐나다 등의 숲은 마른 덤불로 가득한 폭발적인 가연성의 언덕이 되고 말았다. 이 지역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식민 지배를 받으며 기존의 토착경관이 바뀌었고, 관행 소각이 금지되었으며, 침입종 식물이 번성했다는 점이다. LA 산불은 이렇듯 식민주의와 그 역사적 기원을 상기해야만 비로소 그 맥락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관행 소각 금지, 점화 관리 위주의 소방 시스템, 침입종의 창궐 등으로 인해 가뜩이나 불의 지대였던 캘리포니아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가 되어버린 것이다.
당연하게도 LA 산간 지대에 집을 짓는 건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격이다. 마이크 데이비스는 말리부의 개발 붐이 미친 짓이라고 질타한다. 부자들은 아름다운 경관을 위해 산기슭에 집을 짓고 부동산 자본은 LA의 고질적인 주택난을 근절하겠다며 닥치는 대로 주택을 건설했다. 1993년 이후 캘리포니아 신규 주택의 절반 이상이 화재 위험 지역에 지어졌다. 또 캘리포니아 인구의 약 1/4에 해당하는 주민이 '야생-도시 경계지', 즉 산불 고위험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도화선 위의 삶, 언제 불이 나도 이상하지 않은 비상사태를 떠안고 있는 셈이다.
LA 산불 장면. 출처: instagram.com 화면 캡처
게다가 대형 산불이 일어나면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난다. 불탄 지역에 더 크고 비싼 고급 주택이 들어선다. 이번에도 산불이 휩쓸고 지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임대료가 2배 이상 껑충 뛰어올랐다. 또 산불이 휩쓸고 지나간 알타데나(Altadena)의 저소득층 주민들은 당장 쫓겨날지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재난 자체를 이윤을 축적할 기회로 전유하는 '재난 자본주의'가 어김없이 작동되는 것이다. LA 인근에서 지난 수십 년간 무분별한 개발에 저항하는 시민운동이 꾸준히 전개됐지만, 자본과 그에 기생하는 지배 엘리트가 여전히 압도하는 형국이다.
이처럼 캘리포니아 산불 재난은 필연적이다. 소화전에 물이 마른 것은 트럼프가 주장하듯 빙어와 환경운동가들 때문이 아니다. 또 민주당이 변명하는 것처럼 약한 수압 때문만도 아니다. 화염 지대에 도시를 건설하고도 산불 재난에 대응하는 소방 시스템을 설계하지 않은 어리석음 때문이다.
그동안 미 정부의 대응책이란 게 누가 과연 불씨를 댕겼냐와 같은 점화 관리에 머물러 있거나, LA 부자들이 시간당 2,000달러의 비용을 들여 개인 소방관을 고용하도록 방관하거나, 캘리포니아 전체 소방 인력의 30%를 교도소 수감자들로 할당한 채 시간당 5달러에서 10달러 수준의 낮은 임금으로 거의 노예처럼 착취하는 것들뿐이다. 말하자면 산불의 원인과 화재 진압의 책임을 민영화한 것이다. 당연히 대지를 불태우는 거대한 산불 재난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2019년 트럼프는 캘리포니아 산불 관리를 엉망으로 한다고 개빈 뉴섬 주지사를 트위터에서 맹공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일말의 진실을 누설하기는 했다. 무조건 야생을 보호해야 한다는 보존주의 환경운동가들에게 쩔쩔매지 말고 "숲 바닥을 청소"하고 숲의 연료 부화를 줄이라는 경고였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 주장은 결국 기후위기를 부정하기 위해 내놓은 교활한 알리바이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LA 산불을 야기한 또 하나의 결정적 원인이 바로 '기후위기'이기 때문이다. 보통 캘리포니아 산불 시즌은 여름에 바짝 마른 풀과 관목이 가을 무렵 산타 아나의 거친 계절풍과 만나 형성되는데, 이번 계절풍은 1월에 절정을 이루고 있다. 말 그대로 산불 시즌이라는 개념이 사라진 것이다.
또 '수문기후 채찍질(hydroclimate whiplash)'을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수문기후 채찍질이란 극심한 강우와 건조 조건이 번갈아 일어나는 현상을 의미한다. 2023년 캘리포니아는 홍수에 시달렸다. 어느 날에는 24시간 동안 약 12인치의 강우량을 기록하기도 했는데 이는 1년 치 양에 맞먹는다. 그 덕에 침입종 덤불이 사방에 우거졌다. 반면 2024년에는 8개월 동안 아예 비가 내리지 않았다. 이렇게 한꺼번에 웃자랐다가 바싹 말라버린 덤불이 산타 아나 계절풍에 휩쓸리며 산불을 키우는 맹렬한 땔감으로 사용된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수문기후 채찍질 현상은 20세기 중반에 비해 31~66% 증가했다. 지구온난화는 결국 물 순환의 왜곡인바, 온실가스가 감소하지 않으면 채찍질 현상은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고 캘리포니아는 보다 광폭해진 산불의 팬데믹에 잠식될 것이다. 여기에 더해, 기온이 올라감에 따라 딱정벌레와 같은 해충들이 번성하고 수억 그루의 나무를 고사시키면서 산불의 도화선으로 기능하는 재앙의 생태학이 장엄하게 펼쳐지고 있다.
며칠 전 산불 이재민 일부와 기후정의 조직 '선라이즈 무브먼트' 활동가들이 정유소 시설을 점거한 채 LA 재건 비용을 석유와 가스 기업들이 지불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 것도 화석연료 산업이 대형 산불을 일으킨 주요 방화범임을 선언하기 위해서였다. 사람들이 산불로 집을 잃는 동안 화석연료 기업들은 떼돈을 축적하는, 이 파괴적인 멸종 경제를 바꾸지 않는 한 지구는 계속 불타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화석연료 기업들은 트럼프 대선 캠프에 최소 7,800만 달러의 후원금을 쏟아낸 걸로 알려져 있다. 트럼프 당선이 유력해짐에 따라 지난 9개월 동안 그들의 재산은 15% 증가했고, '드릴, 베이비 드릴(drill, baby drill)' 정책이 그대로 관철되면 그들은 주체할 수 없을 지경의 돈방석에 앉아 쾌재를 부를 것이다.
트럼프가 취임식과 함께 '파리기후협정' 탈퇴에 사인한 날, 마치 여봐란 듯이 LA 인근에 두 개의 대형 산불이 또다시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텍사스에서 플로리다에 이르기까지 미국 역사에 기록될 초강력 겨울 폭풍이 들이닥쳤다. 루이지애나, 앨라배마, 플로리다의 모든 역대 적설량 기록이 깨졌다. 그러니까 한쪽은 불타오르고 다른 한쪽은 겨울 폭풍에 잠식된 기후붕괴, 즉 불과 얼음이 교차하는 가공할 기후 재난 속에서 트럼프와 화석연료 자본들이 흥겹게 이윤의 축배를 든 것이다.
자, LA 산불은 누가 일으켰는가? 자연과 선주민의 공생 관계를 파괴한 제국의 식민주의인가? 그렇다. 통제 불능의 교외 개발이 화재를 일으켰는가? 그렇다. 자연 한계를 무시한 채 이윤과 성장을 위해 폭주한 자본주의 때문인가? 그렇다. 기후위기 때문인가? 그렇다. LA 산불은 복합 재난이다. 끊임없이 생태적 불균형과 파국을 양산하는 자본주의 재난이다.
애초부터 캘리포니아와 LA 도시 설계는 자연의 흐름에 역행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애초에 물이 없는 건조 지대였던 캘리포니아 남부는 어쩌다 피스타치오 왕국이 된 걸까?
100년 동안 캘리포니아에서는 보이지 않는 물 전쟁이 벌어졌다. 캘리포니아 북부에서 남부로 수로를 놓아 물을 끌어오는 과정에서 과연 누가 물을 소유할 것인지를 놓고 각축과 쟁탈이 벌어졌고, 20세기 초반 결국 소수의 기업이 수로의 권리를 독점하게 된다. 90년대 중반에는 거대 농식품 기업인 원더풀 컴퍼니(Wonderful Company)가 캘리포니아 남부 물 은행의 지분 60%를 거머쥐었다. 정부 관계자들과 밀실 회의를 통해 7,500만 달러의 국가 재정으로 건설된 대수층 저장 시설을 단 하나의 기업 손아귀에 던져줌으로써 민영화의 정점을 찍은 것이다. 이를 통해 이 기업은 캘리포니아 전체 주민이 사용하는 것보다 더 많은 물을 전용한다. 이것이 피스타치오 왕국의 비밀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쓰지도 못할 물을 위해 세금을 낸다는 걸 알게 되면 화를 낼 거예요."
영화 <차이나타운>(1974)의 이 대사는 캘리포니아 남부에서 벌어지는 물 민영화의 폐해를 단번에 펼쳐보인다. 로만 폴란스키의 이 걸작 필름 누아르는 LA의 탄생 비화에 관한 20세기 최고의 보고서다. 상수도를 장악한 소수의 대농과 부자들이 LA에 물을 공급하고 자신의 농장에 물을 대느라 폭력적으로 소농들의 물과 토지를 빼앗고, 이 과정에서 추악한 자본가는 모든 이에게 물을 공평하게 나눠주려던 사위를 살해하고 자신의 딸을 강간한다는 내용이다.
충격적 설정이지만, LA 건설 시기 소수 자본가들이 상수도 공급권을 장악하며 부를 축적했던 역사적 사실을 철저히 고증한 작품으로 정평이 나 있다. LA 산불을 경유하며 많은 미국인이 <차이나타운>의 섬뜩한 엔딩 시퀀스를 떠올렸던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기후위기로 점점 건조해지는 캘리포니아에서 소수 자본에 물이 독점돼 있고, 사람들은 자신이 사용하지도 않는 물을 위해 세금을 내는데도 막상 불을 꺼야 하는 소화전에는 물이 말라버린 이 기막힌 역설에 어찌 당황하지 않겠는가.
영화 <차이나타운>(1974) 스틸
메마른 건조 지대로 물을 끌고 들어와 농업지대와 도시를 건설하는 것은 처음부터 생태 한계를 무시한 테라포밍 과정이었다. 이를 통해 부동산 자본은 말리부와 같은 화재 벨트 위에 끊임없이 주택 시장을 확장할 수 있었다. 자연 조건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서식지를 파괴하고 야생동물을 쫓아내며 개발 붐과 부동산 광풍을 부채질해 왔던 것이다. 곧이어 할리우드 스타들과 갑부들이 아름다운 해안 경관을 소유하기 위해 말리부에 몰려왔다.
애초에 캘리포니아는 불과 지진의 땅이다. 지진이 자주 발생하니 대부분의 주택이 목재로 지어져 있다. 그러니까 강풍이 부는 화약고에 덤불의 연료를 축적하고, 그 위에 버젓이 나무로 집을 지어놓은 채 불이 나지 않기를 바라는 건 일종의 주술적 사고나 마찬가지다.
할리우드, 꿈의 도시, 해안가 경관을 독점한 부촌, 노예처럼 저임금을 받고 산불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죄수들, 수문기후 채찍질과 숲을 잠식하는 딱정벌레들, 그리고 지독한 물의 독점…. LA 산불은 자본주의 욕망이 자연 한계를 무너뜨리며 폭주하면 어떻게 파괴적인 재난으로 드러나는지, 성장에 대한 무한한 욕망이 어떻게 막대한 상실의 고통과 슬픔을 야기하는지를 적나라하게 현시하는 악몽이다. 어리석은 도시화와 기후-생태 붕괴가 협연한 가장 완벽한 불 폭풍이 캘리포니아 남부에 형성된 것이다.
기후위기가 염려되는가? 통제되지 않는 자본이 염려되는가? 그러면 불타는 LA를 보라, 거기에 모든 게 담겨 있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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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송희일은 영화 연출이 주업이지만, 칼럼도 쓰고 책도 쓰고 강의도 나간다. 동분서주 오지랖을 떠는 것 같아도 결국엔 이야기꾼이 되고 싶은 백수 한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