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그날은 내가 독일에 유학 온 것을 처음으로, 가장 후회하는 날이었을 것이다.
독일 시각으로 오후 세 시를 조금 넘겼을 무렵. 여느 날과 같이 적당히 학교에 가기 싫어, 5분 남은 기차 시간을 기다리며 침대에 누워있었을 때 트위터에 계엄령이라는 단어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뒤를 이어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는 냥, 뉴스와 유튜브를 통해 계엄 소식이 쏟아져나왔다. 비상계엄령을 내리고 국회를 장악한 군사 쿠데타 독재자 전두환을 주제로 한 영화 ”서울의 봄“이 천만 관객을 동원했던 그해 말이다. 유튜브를 통해 송출되던 뉴스에선 윤석열이 말도 안 되는 말을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실감이 나지 않았던 것은 대통령이 국민을 상대로 “척결”이라는 낡아빠진 단어를 남발했던 부분이었다. 그의 연설을 보며 여러 가지가 떠올랐다.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것은 가족이었고, 그 와중에 바로 다음으로 떠올랐던 것은 이런 일에 기꺼이 길거리로 나갈 한국에 있는 나의 동료들, 나의 친구들이었다.
2024년 12월 3일 계엄령은 한국의 일상을 멈추게 했다. 동시에, 해외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나의 일상을 무너트리고 있었다. 부모님은 지금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힘을 키워 돌아오라고 하셨다. 수업 한 시간 전에 일어난 일이라, 나는 울면서 학교에 갔는데, 강의실에 앉아 수업을 듣는 내내,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죄책감이 들었다. 나는 수업 시간 내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분노와 슬픔을 다스리려고 애썼으나, 나의 무가치함과 위선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했다. 내가 여기에 앉아서 뭐 하고 있는 거지? 왜 힘 있는 사람이 바꿀 수 있는 거지? 무엇을 위한 힘이지? 세상을 바꾸는 건 늘 힘없는 시민들이었고 그걸 증명하고 싶었는데…. 나는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안경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는 것도 학교 가는 기차에 타고 나서야 깨달았다. 말 그대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길을 걷고 있었다.
시대의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지식인이 이 시대에 왜 존재해야 하는가? 우리는 우리의 존재 가치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만드는 이 질문에 답해야 했다. 베를린에서 공부하고 있는 한 친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처음 베를린 자유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교수들은 신입생들을 카를 마르크스 동상 앞에 데려가 말했다고 한다. “우리가 공부하는 이유는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바꿔야 하는 시민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독일 교육은 자신의 이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지라고 학생들을 가르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으나,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해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독일 내 한인들도 같은 마음이었다. 독일 내 가장 큰 온라인 한인 커뮤니티인 베를린 리포트와 페이스북 페이지에 계엄 직후 큰 도시들에서 시위한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나는 작은 도시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도시에선 예정된 시위가 없었다. 그러나 우리 도시에서 시위할 사람을 찾는다는 글이 올라와 있었고, 나는 그 사람에게 연락을 넣었다. 그러나 모인 사람은 그와 나, 단둘이었다. 인원수가 적어서 포기하려던 찰나, 나는 온라인 시국 선언을 제안했다. 학생이었던 그와 나는 정기적인 형태의 한인 공동체에 소속되기 힘든 학생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또한 우리는 물리적인 국경선을 넘어, 우리가 함께 연대함을 보여줄 방법으로 소셜미디어를 선택했다. 그렇게, 독일 유학생 / 연구자 시국 선언 인스타그램 페이지인 “@yoonentsetzen”을 개설했다. 함께 할 사람을 몇 명 더 모아, 6일 밤 시국 선언문을 작성하고 게시글을 올렸다. 그 뒤로 우리는 탄핵소추안 가결 전까지 독일에 있는 학생, 연구자 신분의 한인들에게 대자보를 받았고 동시에 오프라인 시위를 홍보했다. 우리는 대자보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져 오는 타국 학생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그들이 자기 생각을 이야기할 안전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12월 15일을 기준으로, 600여 명의 사람들이 서명에 참여하였다.
베를린에선 12월 5일쯤부터 바로 시위가 있었고, 대부분의 도시는 12월 7일인 토요일부터 시위를 시작했다. 나는 근교인 프랑크푸르트 집회에 주로 참여했었다. 한국의 시위 소식은 뉴스 채널뿐만 아니라 유튜브, 인스타그램, 트위터, 틱톡 같은 소셜 미디어 플랫폼을 통해 계속 해서 퍼져나갔고, 이런 영향으로 독일에선 한국 시위의 밈화 된 트렌드를 적극 활용했다. 내가 갔던 프랑크푸르트 시위에도 응원봉을 든 젊은 여성들이 많이 참여했고 괴테 광장엔 로제의 아파트, 탄핵이다비다가 울려 퍼졌다. 프랑크푸르트 집회에선 오징어 게임 2가 독일 넷플릭스에서도 1위를 달성했던 그 주에, “둥글게 둥글게”를 틀고 게임을 했다. 독일인들도 관심을 가졌고 실제로 둥글게 둥글게 게임을 하는 영상은 독일의 틱톡커 계정에 올라갔다. 그리고 그 영상을 외국인 친구가 자기도 봤다며 내게 연락해 오기도 했다.
이 글을 쓰는 중인 2월 15일에도 프랑크푸르트에선 시위가 계속되고 있고, 나는 그 시위에 참여했다. 그리고 한 한인 부부로부터 “빨갱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부끄러운 줄 알라며 소리쳤다. 시간이 지나며, 우리를 하나로 모았던 베를린 리포트 같은 온라인 커뮤니티에도 “빨갱이들 부끄러운 줄 알아라."라는 글이 올라오곤 한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은 그럴싸한 침묵이다. 중립을 지켜야 하니까, 객관적인 태도로 사회를 봐야 하니까, 힘없는 개인이 바꿀 수 있는 것은 없으니까. 이렇게 쌓여온 그럴싸한 침묵은 지금, 이 순간, 가장 중요한 시대의 질문 앞에서도 대답하지 말기를, 생각을 멈추기를 요구하고 있다. 고리타분한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시기에 우리는 독일의 정치 이론가 한나 아렌트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
“악은 대단하지 않다. 악인은 사유의 부재를 통해 만들어진다. 무비판적 복종과 생각하지 않는 태도만으로도 악인은 만들어질 수 있다.“ - 한나 아렌트
우리의 역할은 격변하는 역사 속에서 인간의 존엄을 잃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질문하고, 대답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지난한 침묵의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 민주주의 국가의 시민으로서 시대의 질문에, 시대의 요청에 응답해야 할 때이다.
마지막으로, 독일 내 한인 시위를 하러 간다는 말에 교수가 했던 질문과 그에 대한 나의 답으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교수는 독일 내, 한인 시위를 통해서 우리가 달성하고자 하는 목적이나 목표가 있냐고 물었다. 그리고 그 시위에 참여하는 것이 개인적인 측면에서 어떤 가치를 가지는지 물었다. 사실 독일 내에서 하는 이 시위는 특정 목적성을 가지기 힘들다. 독일 내의 변화를 촉구하는 시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시위를 열고 참여하는 이유는, 첫 번째로 우리의 연대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한국에 있는 한국인들에게 우리 모두가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두 번째, 이 시대의 운동은 이토록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되고 기록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한국을 틀어막는다고 끝나지 않는다. 세계는 다양한 플랫폼과 미디어 콘텐츠를 통해 연결되어 있고 그렇게 연결된 우리는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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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희. 스러지는 존재들을 애정하고, 응원한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