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가 없다는 거짓말

* 이 글은 영화 <어쩔 수가 없다>의 주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어쩔 수가 없다' 스틸컷

어쩔 수가 없다

만수는 가장(家長, leader)이라는 정체성을 자기최면처럼 되새기며 사는 중산층 남성이다그의 아내는 테니스를 치고아들은 산악자전거를 타며딸은 첼로를 켠다만수는 정원이 있는 집과 자동차 두 대를 소유하고분재와 사교댄스를 취미로 즐기며 목가적인 삶을 지향한다그야말로 착시적인 중산층 욕망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만수는 마당에서 고기를 굽고 가족들과 단란한 한때를 보낸다그리고는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말한다다음날 만수는 해고통지를 받는다관리직이었던 그는 해고 명단을 추천하라는 제안을 받지만차마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었는지 해고를 수용하고 재취업을 모색한다.

무엇보다도 만수는 자신이 이룬 것들을 (개인적 성취라고 착각하지만 실제로는 사회적 성취에 가까운포기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이룬 것들인데...’ 결국 만수는 재취업을 위해 경쟁자들을 살해하기로 결심하고사람을 죽일 때마다 어쩔 수가 없다는 혼잣말을 시작한다.

미국에서는 정리해고를 도끼질(axe)라고 한다지요한국에서는 모가지(murder)라고 부릅니다.”

정리해고는 <어쩔 수가 없다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메타포이다정리해고가 살인에 가까운 행위라는 전제 속에서만 극의 서사가 성립하기 때문이다따라서 만수가 선택한 살인은 그 전의 살인(정리해고)’에 대한 서사적 반작용이라고 볼 수 있다.

특정한 사회나 공동체를 뒤흔드는 역동적 사건이라는 것은 반드시 예측할 수 없는 반작용을 불러오고그 작용들은 최초의 행위가 위반하고 있는 윤리적 파괴를 연쇄한다이것은 비극의 가장 기본적인 요건에 속하는데문제는 이것이 영화가 아닌 현실의 문제라는 점이다그런 면에서 2025년 9월에 개봉한 <어쩔 수가 없다>는 참으로 공교롭다.

모든 학살이 그러하듯이

2025년 9월 30일 KG모빌리티(구 쌍용자동차)는 2009년 쌍용자동차 파업에 대한 손해배상 채권 집행을 철회했다당연한 일이고사필귀정이라는 반응이 이어졌지만바꾸어 생각해보면 자그마치 16년이라는 시간 동안 국가와 자본은 쌍용차 노동자들에 대한 족쇄를 걸어두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처럼 정리해고는 그 후과(後果)까지를 종합해봐도 현대사에서 가장 잔인하고 비윤리적인 제도라고 할 수 있다경영의 성과와 사정은 자본과 사용자가 대부분 소유하면서경영의 주요주체인 노동자들은 언제든지 위기의 불쏘시개처럼 부품화할 수 있는 데다가인간과 가계를 특정한 권력(국가나 자본·사용자)의 판단만으로 폭력적으로 재구성할 수도 있다더욱이 이와 같은 초법적 권력은 노사관계를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모체(matrix)를 형성한다.

더욱 기괴한 일은 사회가 정리해고를 어쩔 수 없는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이다정리해고는 강자의 논리를 내면화하는 파시즘의 가능성마저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모든 학살(genocide)이 그러하듯이.

만수가 살인을 저지른다는 사실을 깨달은 아내는 만수의 살인을 숨겨주고그 아들은 강도질을 시작하며만수일가는 일종의 정치·경제적 공모상태에 돌입한다이들의 공모에 동원되는 논리 또한 어쩔 수 가없다는 주문이다본래는 의 죄를 사함받기 위해 외우던 주문이 가계 전체로 확장하는 것이다.

역사의 윤리책임의 윤리

책임은 윤리적인 단어다법적인 책임이라는 말은 그런 면에서 태생 자체로 구차하다윤리는 법적인 영역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요컨대 한국적 신자유주의의 원죄를 형성한 1997년도의 정리해고법그러니까 국가적 살인면허를 통과시킨 주체들과 당사자 집단에서 단 한 차례도 그 일의 영향력과 역사에 대한 책임있는 발언을 들어본 예가 없다더욱이 2009년의 쌍용자동차 사태는 말할 것도 없다. ‘노무현류도 이명박류도 하나같이 어쩔 수가 없었다는 수준의 연주만을 반복했을 뿐이다.

결국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은 한국의 현대사를 떠도는 가장 거대한 주문이자 자기기만과도 같다인간과 사회는 큰 죄를 저지를수록 어쩔 수가 없다고 말하며또 다음의 세대에게 불편한 진실을 설명해야만 할 때도 어쩔 수가 없다는 거짓 해명을 반복해야만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럼에도 2009년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77일간의 옥쇄파업 이후 서른 명의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그리고 거기로부터 연쇄한 학살시도와 정리해고와 노동자들의 고공행진과 지난한 농성들은결국 지난 역사에서 한국 사회가 공모한 가장 잔혹하고 비열한 연쇄살인에 대한 기억이자 애도의 시간이었다는 점은 결코 잊을 수가 없다.

그 사이에 해고는 살인이다는 노동자들의 절실한 투쟁을 상징하는 구호가 되었지만, ‘더이상 죽이지 마라는 절규가 어떻게 여전히 사회적 연대와 정의를 촉구하는 말이어야 하는지그러한 구호를 전환해야만 하는 것은 아닌지역사적 성찰을 시작해야만 할 것이다애도는 타인의 죽음을 함께 책임지기 위해 인류가 고안한 최선의 연대이기에.

어쩔 수가 없는 노래

정리해고를 겪으며 내가 사는 세상을 봤다.” 쌍용자동차의 서른 번째 사망자는 죽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그는 시간이 갈수록 이 세상은 빠듯해질 것이고내 아이들이 불쌍하다고 했다그의 예측이 엇나가지 않은 것만 같아서그리고 그를 이런 방식으로 다시 호명해야만 해서 여전히 면구스럽고 고통스럽다.

첼로는 사람의 목소리를 가장 닮은 악기라고 한다극중 만수의 딸은 완성된 문장의 언어를 구사하지 못하고 메아리처럼 어른들의 말을 반복하는 존재로 등장하다가 종국에는 자신만의 연주를 완성한다가족들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딸의 연주를 듣게 되자안도하면서도 슬퍼하는데 그 이유는 딸의 노래가 자신들의 메아리라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성찰하지 못하는 역사는 반드시 반복되며모른 척 기도를 외운다고주문을 외운다고 사라지지 않는다비열하고 참혹하지만 어쩔 수 없이 연주되는 노래이 세계에는 그런 노래가 늘 흐르고 있다시월에 흐르는 가을의 정취가 어쩔 수 없이 참혹하다.

 
덧붙이는 말

왕의조는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참세상은 이 글을 한내와 공동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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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학살 살인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어쩔수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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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 영화를 보고 어떤 말이든 해얄듯 했는데 지극히 논리적으로 현실을 직관하게 하는 이야기 같아 답답함이 해소 되는듯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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