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광수

[마광수 칼럼] 자학적 금욕주의 운동 벌이는 \’고상한\’ 지식인들

[마광수 칼럼] 자학적 금욕주의 운동 벌이는 \’고상한\’ 지식인들

마광수(연세대 교수, 국문학) 역사의 발전 역사학에서는 흔히 ‘고대, 중세, 근대, 현대’ 따위로 시대구분을 하곤 한다. 그리고 고대에서 현대로 내려올수록 정치, 경제, 문화 전반에 걸쳐 인간사회가 발전을 이룩해 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암흑시대’라고까지 부르며 경멸해 마지않는 서양 중세기의 미신적 신권주의(神權主義)나 ‘마녀사냥’ 식 도덕적 테러리즘이 현대에도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나는 쉽사리 역사발전론에 동의할 수 없다.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나라인 미국이나 한국의 일부 지배 엘리트 사회에서 종종 벌어지고 있는 ‘성에 대한 집단적 히스테리 현상’ 같은 것을 보면 특히 그렇다. 수구적 봉건윤리를 외치는 일부 사회단체나 매스컴은 ‘음란하다’는 막연한 감(感) 하나로, 성의 기쁨을 솔직하게 추구하는 사람들을 무조건 패륜아로 몰아 온갖 사회악의 주범인 양 몰매질을 한다. 그리고 ‘성에 대한 이중적 기만’ 심리가 몸에 밴 일부 지식인과 종교인들은 신이 나서 거기에 동조한다. 이런 몰상식한 선동 행위는 ‘나라 걱정’이나 ‘도덕성 확립’의 가면을 쓴 중세기적 마녀사냥에 다름 아니다. 성문제에 대한 편집증적 모럴 테러리즘 말고도 과거에 우리는 편집증적 매카시즘에 따른 마녀사냥을 겪은 바 있고, 지금도 자학적 금욕주의에 바탕한 ‘쾌락

[마광수 칼럼] 창작자 매장시키는 문화적 테러리즘 없어져야

[마광수 칼럼] 창작자 매장시키는 문화적 테러리즘 없어져야

마광수(연세대 교수, 국문학) 예술과 외설 지식인들 중 상당수는 애써 예술과 외설을 구분 지으려 한다. 그러다보니 인류의 예술사는 언제나 외설시비로 얼룩졌다. 이 글에서 나는 예술과 외설 문제를 다뤄보기로 한다. 결론부터 미리 얘기하자면 ‘외설은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예술이냐, 외설이냐’라는 문제를 놓고 따질 때 우리가 먼저 근본적으로 검토하고 넘어가야 할 일은 “외설이 왜 나쁘나, 또는 왜 죄가 되냐”라는 문제가 될 것이다. 소설과 영화, 연극, 미술 등에서의 외설(음란)이란 쉽게 말해서 그것을 읽거나 보는 사람들에게 성적 흥분을 일으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성적 흥분을 일으키는 것 자체를 과연 부도덕한 일, 또는 법적으로 규제해야 마땅한 죄라고 볼 수 있을까 하는 내용의 논의부터 예술과 외설의 변별성 문제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성적 흥분을 일으키는 것 자체가 죄가 될 수는 없다. 흔히 말하듯 성(性)이란 신이 인간에게 내린 축복 중의 하나요, 인간이 마땅히 쾌락으로 누릴 자유를 갖고 있는 행복추구의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약국에 가면 성적 흥분을 야기 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약품들이 정부의 허가 하에 제조되어 정력 강화제 등의

[마광수 칼럼] 도덕을 팔아먹고 사는 사람들

[마광수 칼럼] 도덕을 팔아먹고 사는 사람들

마광수(연세대 교수, 국문학) 나는 도덕을 팔아먹고 사는 사람들을 증오한다. 그런 자들은 정권의 추이와도 상관없이, 그리고 그들 스스로의 기회주의적 변신이나 어용적(御用的) 행태와도 상관없이, 늘 사회적 기득권과 권세, 그리고 부(富)까지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자들은 언제나 권력에 초연한 체하면서 오히려 권력의 주변에 포진한다. 이른바 관변교수로 불리는 이들중 상당수가 여기에 해당되는데,그들은 또한 매스컴의 구미에 맞는 양비론적 발언을 잘하는 재주를 지니고 있어 \’오피니언 리더\’ 로서의 역할까지 해낸다. 그들은 언제나 도덕을 팔아먹으며 스스로의 속악(俗惡)한 기회주의와 천박한 출세주의를 감춘다. 경제가 잘 돼도 도덕타령이요, 경제가 무너져도 도덕타령이다. 정치가 잘돼도 도덕타령이요, 정치가 흔들려도 도덕타령이다. 그들은 대개 자유주의적 문화나 예술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리고 옛날 조상타령을 해가며 전통윤리를 들먹이길 좋아하고, 애국애족으로 포장된 문화적 국수주의를 내세운다. 이들은 내가 보기에 우리 사회의 적(敵)이다. 그러나 이들은 \’군사독재\’ 나 \’부정부패\’ 같이 분명히 드러나는 악을 행하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악, 심지어는 선으로 보일 수도 있는 악을 행하고 있으니 문제다. 이처럼 적성(敵性)을 분명히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그들을 식별해내기도 어렵고 없애버리기도 어렵다. 말하자면

[마광수 칼럼] 성적 억압이 파시즘 부른다

[마광수 칼럼] 성적 억압이 파시즘 부른다

마광수(연세대 교수, 국문학) 사랑과 섹스와 아름다움 서양에 비하면 동양에서는 성(性)을 죄악시하지도 않았고, 그에 대한 논의도 개방되어 있었던 편이다. 특히 전통적 한방이론에서는 음(陰)을 양(陽)보다도 더 중요시한다. 생식을 주관하는 신(腎)의 기(氣)가 생명유지의 원동력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또 경락의 분포를 보아도 신(腎)의 지배를 받는 방광 경락이 전체 경락의 60 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고 있기에, 동양에서는 성을 중요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보다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동양철학의 기반에서 나는 지금까지 억압된 성의 해방을 주장했던 것이지, 단순한 프로이트주의자로서 무조건적 서양숭배 사조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현재 우리 사회의 성 개방 풍조는 진정한 의미의 개방이 아니라, ‘은폐된 개방’, 즉 이중구조를 가진 개방이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 이것은 미국 사회의 이중구조를 뒤쫓는 것으로서, 겉으로는 근엄한 도덕주의를 표방하면서 실제로는 음성적으로 온갖 매춘과 음란, 퇴폐 문화가 판을 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중구조의 해체가, 내가 진정 바라는 성 해방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 해방 이전에 ‘느낌으로서의 해방’ ‘관능적 상상력의 해방’이 더욱 절실히 필요하다. 상상력마저 비난의 대상이 된다면 우리의 정신은 완전한 질식상태에 빠져, 오래 굶다

[마광수 칼럼] 내가 『인간론』 에서 말한 유토피아의 실현

[마광수 칼럼] 내가 『인간론』 에서 말한 유토피아의 실현

마광수(연세대 교수, 국문학) 내가 쓴 책 『인간론』은 내가 생각해온 유토피아가 그려져 있는 책이다. 솔직히 말해서 그런 유토피아가 그대로 현실화 될 가능성은 매우 적은 것 같다. 다양성을 존중하고, 성적(性的) 죄의식으로부터 자유롭고, 청소년의 성(性)에도 관대하고, 권력다툼과 전쟁이 없고, 평화로운 그런 세상 말이다. 권력을 가진 소수의 지배층이 있는 한 불가능에 가까운 세상이다. 아니, 그들이 없어진다고 해도 역사에 따르면 항상 또 새로운 권력이 나타났고, 역사는 순환되어왔다. 따라서 이 책에 그려진 사상이 완벽히 실현될 가능성은 적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가능성이 아예 없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가 나의 『인간론』에서 그려진 이상적인 사회에 가까워 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조짐들을 찾아본다. 첫 번째로 우리 사회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추세이다. 현대 미술을 보면, 점점 이해하기 힘든 미술도 미술로 인정하고 있고, 다양성이 추구되어 가고 있다고 보인다. 뒤샹의 <샘> 같은 것이 대표적 예이다. 뒤샹이 전시회에 변기통에 자기 싸인을 해놓은 것을 출품하려 했지만 당시에 미술로 인정을 하지 않아 출품을 못하게 했다. 하지만 곧 인정을 해주었고 지금은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유명한 미술이 되었다.

[마광수 칼럼] 패륜범죄, 성폭행 사건 등의 원인은 따로 있다

[마광수 칼럼] 패륜범죄, 성폭행 사건 등의 원인은 따로 있다

마광수(연세대 교수, 국문학) 개인적 화풀이를 위한 우발적 살인행위나 성폭행, 그리고 존속살인 사건 같은 것은 인간의 본능적 야한 욕구와 관련지어 설명될 수 있다. 표면상 드러난 이유는 피폐된 가정환경과 변태적 성욕망, 또는 빈부격차 등이라고 하지만, 가정환경이 나쁘다거나 성적으로 굶주린다고 해서 누구나 다 그런 식의 일탈된 행동을 저지르지는 않는다.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다른 데 있다. 윤리기강의 해이나 상대적 박탈감, 변태적 성욕구 등 상투적으로 제시되는 요인들은 다 허구적 가면에 지나지 않는다. 진짜 원인은 민심의 향방이 ‘솔직한 본능’을 향해서 무의식적으로 달려가는 데 있고, 그러한 본능적 욕구의 중심은 식욕이 아니라 성욕과 놀이욕구인 것이다. 과거의 성수대교 붕괴사고나 삼풍백화점 붕괴참사 같은 대형사고 역시 이런 식의 추리가 가능하다. 부실공사나 부실관리가 돈을 떼어먹으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라면, 이 역시 ‘돈으로만 욕망의 대리배설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돈 말고도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떳떳한 대리배설 수단이 얼마든지 있다’를 눌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부실관리가 이른바 적당주의나 복지부동 심리에 기인한 것이라고 하면 문제가 더 복잡해진다. 적당주의나 복지부동의 자세가 무사안일주의적 보신주의(保身主義)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래도 괜찮은데, 최근

[마광수 칼럼] 한국은 \’합리적 지성\’ 부재(不在)하는 봉건사회

[마광수 칼럼] 한국은 \’합리적 지성\’ 부재(不在)하는 봉건사회

마광수(연세대 교수, 국문학) 한국의 현실과 위선적 권위주의 \’다원주의 문화의 인정\’과 \’성적 자유의 인정\’이 한 해결책 대다수의 지식인들은 \’도덕성 회복\’ \’의식 개혁\’ 투의 막연한 처방만 기이하기 짝이 없는 나라 21세기를 맞이한 지금에 있어,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내가 가장 뼈아프게 절망하고 있는 것은 한국 사회가 여지껏 끌어안고 있는 \’문화적 촌티\’이다. 이러한 \’문화적 촌티\’는 문화독재적 사고방식과 수구적 봉건윤리로부터 기인하는데, 이 \’문화적 촌티\’가 뻔뻔스러울 정도로 당당하고 극명하게 드러나는 현상이 바로 \’표현의 자유 억압\’과 \’변화의 거부\’, 그리고 \’성의식(性意識)의 이중성\’인 것이다. 한국인들은 지금껏 목이 터져라 \’자유\’와 \’민주\’를 외쳐왔다. 그리고 상당히 많은 숫자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독재 타도\’와 \’인권 신장\’을 부르짖으며 여러 이데올로기를 동원해 처방을 제시하고 온몸으로 싸워왔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한국 사회는 여지껏 전근대적 사고방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극단적으로 말해 조선조식 사고방식, 즉 문화적 쇄국주의와 획일적 유교 독재로 한국을 망하게 했던 19세기 말의 사고방식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 그리고 또한 조선조식 사대주의도 그대로 남아 있어서, 서구에 대한 사대주의에 편승한 \’탈(脫) 근대\’와 \’탈합리(脫合理)\’를 외치는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이 상당수 지배엘리트의 담론

[마광수 칼럼]기득권 지배층에 의해 선전된 금욕주의가 엘리트 독재 부른다

[마광수 칼럼]기득권 지배층에 의해 선전된 금욕주의가 엘리트 독재 부른다

마광수(연세대 교수, 국문학) [마광수 칼럼] 솔직한 성애의 추구는 운명극복의 지름길 인간의 운명과 행복을 창조해나가는 데 있어 성과 사랑은 핵심적인 요소가 된다. 인간의 행복을 세속적으로 결정짓는 세 가지 요소가 돈과 명예 그리고 성이라면, 나는 서슴지 않고 성을 첫 번째로 꼽고 싶다. 어찌보면 우리가 열심히 일해 돈을 버는 것도 배부르게 먹고 살고 사랑을 즐기면서 살고자 하는 목적에서 나온 것인데, 이제는 어쨌든 잘먹는 일보다 잘 사랑하는 일이 더 중심과제가 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래서 대중적 명예를 얻는 일 역시 사랑의 쾌감을 남보다 많이 선취(先取)하고자하는 욕구 때문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성적 욕구를 도덕적 명예욕이나 신앙욕(信仰慾) 등으로 대체시켜야만 하는 사회는 오히려 병든 사회고 왜곡된 사회다. 또한 개인으로 봐도 성적 욕구를 무의식적으로 은폐시켜 억누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결국 중세기의 종교재판관과 같은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들은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물론 스스로도 결국 성격파탄자가 되어버린다 (아나톨 프랑스의 소설 <무희(舞姬) 타이스>는, 당대의 명기(名妓) 타이스를 회개시키러 갔던 수도승이 오히려 타이스의 관능미에 반해 스스로 정신분열을 일으키는

매카시즘·자학적 금욕주의 기반한 고학력 지도층 정신질환자들

매카시즘·자학적 금욕주의 기반한 고학력 지도층 정신질환자들

[마광수 칼럼] 역사의 발전 역사학에서는 흔히 ‘고대, 중세, 근대, 현대’ 따위로 시대구분을 하곤 한다. 그리고 고대에서 현대로 내려올수록 정치, 경제, 문화 전반에 걸쳐 인간사회가 발전을 이룩해 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암흑시대’라고까지 부르며 경멸해 마지않는 서양 중세기의 미신적 신권주의(神權主義)나 ‘마녀사냥’ 식 도덕적 테러리즘이 현대에도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나는 쉽사리 역사발전론에 동의할 수 없다.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나라인 미국이나 한국의 일부 지배 엘리트 사회에서 종종 벌어지고 있는 ‘성에 대한 집단적 히스테리 현상’ 같은 것을 보면 특히 그렇다. 수구적 봉건윤리를 외치는 일부 사회단체나 매스컴은 ‘음란하다’는 막연한 감(感) 하나로, 성의 기쁨을 솔직하게 추구하는 사람들을 무조건 패륜아로 몰아 온갖 사회악의 주범인 양 몰매질을 한다. 그리고 ‘성에 대한 이중적 기만’ 심리가 몸에 밴 일부 지식인과 종교인들은 신이 나서 거기에 동조한다. 이런 몰상식한 선동 행위는 ‘나라 걱정’이나 ‘도덕성 확립’의 가면을 쓴 중세기적 마녀사냥에 다름 아니다. 성문제에 대한 편집증적 모럴 테러리즘 말고도 과거에 우리는 편집증적 매카시즘에 따른 마녀사냥을 겪은 바 있고, 지금도 자학적 금욕주의에 바탕한 ‘쾌락 박멸운동’

마광수 \”로마 멸망은 성윤리 타락 아닌 기독교적 정신우월주의에서 비롯\”

마광수 \”로마 멸망은 성윤리 타락 아닌 기독교적 정신우월주의에서 비롯\”

마광수(연세대 교수, 국문학) [성性인권] 모든 병의 원인은 정신과 육체의 괴리이다 역사의 변화는 알 수가 없고, 자연의 변화도 알 수가 없다. 모든 것은 급작스럽게 찾아온다. 그토록 강대했던 로마제국이 하루아침에 망한 것도 그렇고, 폼페이의 베수비오스 화산이 갑자기 터진 것도 그렇다. 그러나 거기에 지구의 운명에 대한 신의 예정(豫定)이나 섭리, 또는 인간이 저지른 죄업이 개입됐는지는 확인할 도리가 없다. 로마의 멸망을 성윤리의 타락 때문이라고 보는 도덕주의자들이 많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로마가 멸망한 것은 육체중심적 사고 또는 현세중심적 사고가 기독교의 국교화(國敎化)에 따른 내세중심주의 또는 정신우월주의로 뒤바뀌었기 때문이다. 쾌락을 당당하게 구가하던 제국 초기의 로마는 오히려 강대하였다. 굳이 도덕이나 윤리 문제를 끌어들인다면, ‘도덕의 타락’보다는 ‘이중적 도덕의 극성’이라고 하면 오히려 더 정답에 가까울 것 같다. 로마에서 기독교가 정치세력화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중세 암흑기가 시작됐으니까 말이다. 마찬가지로 정신과 육체가 상반된 방향타를 가질 때 한 개인의 육체는 급격히 허물어진다. 거듭 설명하자면 정신은 금욕주의적인데 육체는 쾌락주의적 방향타를 가지고 있을 때, 그러한 양가감정(兩價感情, Ambivalence)은 그 사람의 심신을 이원적으로 분리시켜 황폐화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한 나라의 경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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