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기념비 앞에 전시된 에이즈 퀼트. 출처: National Institute of Health
미국은 수많은 에이즈 관련 사망자를 외면해왔지만, 라이언 화이트(Ryan White)의 장례식만큼은 외면하지 못했다. 1990년 4월 11일, 인디애나폴리스 북쪽의 부유한 지역인 메리디안 힐스, 고딕 양식의 제2장로교회에서 열린 그의 장례식은 침울하면서도 장엄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인디애나 코코모 출신인 이 청년은 13세에 오염된 혈액 제제를 통해 HIV에 감염된 후 HIV/AIDS 유행의 대표적인 얼굴이 되었다. 의사들의 예상을 넘어서 오래 살았던 라이언의 죽음은 국가적 비극으로 받아들여졌다.
약 1,500명의 조문객이 라이언 화이트의 장례식에 참석했고, 영안실에 자리를 확보하지 못한 수백 명의 조문객은 추위와 비를 맞으며 야외에 머물렀다. 라이언의 유명세에 맞게 여러 스타와 고위 인사도 함께 참석했다. 영부인 바바라 부시는 화이트 가족 바로 뒤에 앉았고, 당시 세계적으로 유명한 가수 마이클 잭슨은 라이언의 어머니 진 화이트 옆에 자리했다. 또한, 로스앤젤레스 레이더스의 수비수 하위 롱, 가수 엘튼 존, 그리고 토크쇼 진행자 필 도나휴가 장례식 운구 역할을 맡았다. CNN은 장례식 45분 동안 생중계 방송을 진행했으며, 주요 방송 네트워크 세 곳 모두 저녁 뉴스 시간에 장례식 장면을 내보냈다.
영안실 앞에는 열린 관이 놓였고, 라이언의 시신은 그가 좋아했던 브루스 스프링스틴 스타일의 옷과 액세서리로 장식되었다. 그의 연약한 몸은 빨간 티셔츠와 빛바랜 청재킷으로 감싸였고, 얼굴 위에는 반사되는 오클리 선글라스가 놓여 있었다.
라이언 화이트의 성대한 장례식은 다른 많은 에이즈 감염자(PWA)의 조용하고 저조한 참석률의 장례식과는 매우 달랐다. 당시 일부 에이즈 사망자는 장례식에서조차 전혀 조명이 되지 않았다. 많은 장례식장 직원은 에이즈로 사망한 사람의 시신을 다루는 것을 거부했다. 에이즈 감염자들의 시신에 생전과 마찬가지로 큰 낙인이 찍히자, 1990년대 초 예술가이자 활동가인 데이비드 보이나로비츠의 영향을 받아 에이즈 단체인 ACT UP 연합이 "정치적 장례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 장례식은 에이즈 감염자들이 겪었던 절망과 분노를 담아냈다.
라이언 화이트의 장례식은 교회, 국가, 언론 등 강력한 사회 기관을 통해 사회적으로 정당성을 인정받은 공식 장례식이었다. 반면에 에이즈 단체들이 주관한 정치적 장례식은 에이즈 위기를 심화시킨 바로 그 사회 기관들을 고발하고 저항하는 행사로 자리 잡았다.
수천 명의 동성애자 남성(MSM)과 정맥주사 약물 사용자가 에이즈로 사망할 때, 연방 정부는 대부분 이를 무시했지만 라이언 화이트의 유명한 죽음과 장례식은 그의 이름을 딴 CARE 법이 통과되는 계기가 되었다. CARE 법은 HIV/AIDS 예방과 치료를 위해 긴급히 필요한 연방 자금을 지원했지만, 이 법이 "정치적으로 안전한 상징"에 초점을 맞춘 나머지 1980년대와 1990년대 HIV/AIDS 위기에서 피해자를 계층화하는 구조를 강화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종교학자 앤서니 페트로(Anthony Petro)는 “처음부터 에이즈는 도덕적 전염병으로 여겨졌으며, 무고한 어린이를 죄가 있는 동성애자보다 위에 두는 희생자 위계 구조를 고착화했다”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 라이언 화이트의 ‘무죄’는 이미 낙인 찍힌 사람들, 특히 동성애자와 정맥주사 약물 사용자들의 ‘죄’를 더욱 강조하게 만들었다.
이 차별은 상징적인 것에 그치지 않았다. 라이언의 결백함은 연방 정부가 에이즈 문제에 대응하도록 만드는 반면, 소외된 계층의 ‘죄책감’은 “도덕적 순결성이 결여된 감염자를 처벌해야 한다”는 여론을 불러일으켰다고 <필라델피아 데일리 뉴스>는 지적했다. 특히 CARE 법은 징벌적 HIV 범죄화 및 신고 규정을 포함하고, 주사바늘 교환 프로그램에 대한 연방 자금 지원을 금지했다.
또한, 노스캐롤라이나주 상원의원 제시 헬름스가 발의했다가 부결된 라이언 화이트 수정안(상원 수정안 1626호)은 과거 정맥주사 약물 사용자와 성 노동자의 헌혈을 범죄화할 수 있었다. CARE 법의 유죄 개념은 예산 문제에도 영향을 미쳤다. 법은 1990년에 제정되었지만, 보조금 프로그램이 완전한 자금 지원을 받은 것은 1994년에 이르러서였다. 라이언 화이트 CARE 법의 이야기는 1980년대와 1990년대 HIV/AIDS 유행 시기와 그 이후에도 존엄성 정치의 한계와 결백의 정치가 갖는 문제를 드러냈다.
라이언은 언제나 병약한 아이였다. 1971년 12월에 태어난 그는 혈액 응고를 방해하는 중증 혈우병, 이른바 고전적 혈우병 진단을 받았다. 라이언은 5세부터 출혈을 막고 혈액 응고를 촉진하기 위해 8인자 응고인자 주사를 맞기 시작했다.
자가 투여 방식의 8인자 치료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의학 연구의 산물로 혈우병 환자에게 큰 희망을 주었다. 그러나 이 치료법은 수천 명의 기증자로부터 모은 혈액과 혈장을 사용했기에 높은 감염 위험도 동반했다. 주사를 맞을 때마다 수천 명의 기증자의 혈액이 그의 몸에 들어갔고, 그 결과 1983년까지 농축액 치료를 받은 중증 혈우병 환자의 80% 이상이 B형 간염에 노출되었다는 혈청학적 증거가 있었다. 당시 많은 사람은 간염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AHF 농축액의 혜택을 받아들이려 했다. 1984년 11월, 라이언 화이트 자신도 B형 간염 양성 판정을 받았다. HIV 감염 예방을 위해 혈액 공급에 열처리를 사용하는 방식이 널리 퍼지기 전이던 1980년대 초 HIV/AIDS가 확산되면서, 8인자는 혈우병 환자에게 생명줄이자 잠재적 사형 선고와도 같았다.
1984년, 라이언 화이트는 대부분의 시간을 고통과 불편함 속에서 보냈지만,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당시 12살이었던 라이언은 "전형적인 성가신 십대가 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식은땀, 설사, 무기력증, 위경련은 그의 성장기를 방해하는 장애물이 되었다. 열이 40도까지 오르자 어머니 진은 라이언을 코코모의 병원으로 데려갔고, 엑스레이 결과 그의 양쪽 폐에서 폐렴이 발견되었다. 항생제로도 폐렴이 나아지지 않아 라이언은 인디애나폴리스의 라일리 어린이 병원으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희귀 감염 질환인 뉴모시스티스 카리니 폐렴 진단을 받았다. 이는 면역 체계가 심각하게 손상된 상태에서 나타나는 질환이었다.
당시 HIV 감염을 확인할 수 있는 신뢰할 만한 검사가 개발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라이언의 혈우병과 8인자 의존도, 그리고 폐렴 진단은 그가 에이즈에 감염되었음을 의미했다.
미국 사람들은 1985년 7월, 인디애나주 러시아빌에 있는 서부 학교 공사(Western School Corporation)가 라이언 화이트의 서부 중학교(WMS) 등교를 금지하면서 그를 알게 되었다. 배우 록 허드슨이 에이즈에 걸렸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면, 라이언의 등교 금지 결정은 지역적인 논란으로만 끝났을지도 모른다. 허드슨은 1984년에 에이즈 진단을 받았으나 1985년 7월 말에야 병에 걸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인디애나폴리스 스타는 허드슨을 "자신이 에이즈에 걸렸다고 밝힌 첫 국제적 인지도 있는 인물"로 소개했다.
허드슨의 명성은 그의 병을 세간의 주목을 받게 했고, 이성애의 아이콘으로서의 위치 또한 그 사실에 기여했다. 실제로 허드슨은 할리우드 황금기 시절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함께 영화 거인(1956)에 출연하고, 도리스 데이와 함께 필로우 토크(1959)를 포함한 여러 로맨틱 코미디 영화에 출연하며 대형 스크린 속 전형적인 남성상을 상징해왔다.
허드슨의 에이즈 진단 소식은 전염병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고조시키며, 기존의 '위험군'(소위 4H: 동성애자, 혈우병 환자, 헤로인 사용자, 아이티인)을 넘어선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라이언 화이트가 WMS에서 수업을 듣지 못하게 된 며칠 후, 인디애나폴리스 스타는 1면에 "에이즈, 이제는 '일반인' 세계에 침투하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하며, 에이즈에 대한 대중의 우려가 커지고 있음을 강조했다. 곧 러시아빌, 코코모(라이언과 그의 가족이 살던 곳), 그리고 주변의 소규모 지역 사회들이 국내외적인 관심의 중심이 되었다. 에이즈가 이제 일상적인 단어가 되자, 라이언 화이트는 곧바로 유명 인사가 되었고, 그의 학교 복귀를 지지하는 작지만 열정적인 지지자들이 생겨났다.
법정 공방이 이어지며 새해까지 논란이 계속되었다. 마침내 1986년 봄, 라이언은 WMS에서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권리를 얻었고, 이 사건은 언론의 큰 관심을 받으며 라이언을 국내외적으로 잘 알려진 HIV/AIDS 인식의 대표 얼굴로 만들었다.
공개적인 법적 승리를 거둔 이후, 라이언과 그의 가족은 전국적인 홍보 투어에 나섰다. 라이언은 ABC의 굿모닝 아메리카에 출연해 인터뷰를 하고, 최근 설립된 미국 에이즈 연구재단(amfAR)의 자선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뉴욕으로 갔다. 라이언은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패션 디자이너 캘빈 클라인이 공동 주최하고 제이콥 재비츠 센터에서 열린 amfAR 행사에 초대받아 참석했다. 이 행사에서 턱시도를 입은 라이언과 그의 어머니는 오노 요코, 뉴욕 시장 에드 코흐와 나란히 자리했고, 그들의 사진은 앤디 워홀이 찍었다.
이듬해 2월, 인디애나 보건부 장관인 우드로 마이어스 주니어는 라이언이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에이즈 환자일 뿐만 아니라, 에이즈 문제 해결을 위해 움직이는 공직자에게 있어 정치적 위험이 가장 적은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마이어스의 발언은 라이언의 인기가 상승함에 따라 그가 결백의 상징으로 자리잡아 CARE 법안 통과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
1990년 4월, 라이언의 죽음과 장례식은 오랫동안 예고된 사건처럼 여겨졌다. 1985년 중반, 라이언이 대중의 인식에 등장한 순간부터 그의 삶은 죽음에 가까워 보였다. 1985년 8월, 라이언이 학교 복귀 문제로 연방법원 판결을 기다리게 되었을 때 NBC 나이트리 뉴스의 기자 메리 니센슨은 "라이언의 의사들은 그가 2년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기에 몇 달이란 시간도 매우 긴 것으로 보인다"라고 보도했다. 인디애나폴리스 라일리 어린이 병원에서 오랜 입원 생활을 하던 라이언의 자주 악화되는 건강은 대중에게 그의 연약함과, 더 나아가 그의 결백을 지속적으로 각인시켰다. 2011년 구술 역사 인터뷰에서 서부 학교 공사의 한 간호사는 "라이언은 너무 자주 아팠기에 학교에 잘 오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국내외적으로 관심을 받는 동안에도 라이언의 죽음은 임박해 보였지만, 그는 예상보다 오래 살았고, 이는 그의 전설적 이미지를 더욱 강화시켰다. 그러나 1990년 3월 말, 남부 캘리포니아를 방문 중이던 라이언은 마지막으로 중대한 병에 걸렸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급히 인디애나로 돌아왔고, 다시 인디애나폴리스 라일리 병원에 입원했다. 결국, 그는 1990년 4월 8일 세상을 떠났다.
라이언의 죽음과 장례식은 연방 정부가 라이언 화이트 CARE 법안을 통해 시급히 필요한 HIV/AIDS 자금을 지원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라이언이 라일리 아동병원에서 임종을 맞이하자, 상원 노동 및 인적자원위원회는 그를 기리기 위해 CARE 법안을 발의했다. 라이언이 사망한 지 몇 주 뒤에 발표된 법안 2240에 대한 상원 위원회의 공식 보고서는 “젊은 라이언 화이트가 세상을 바꿨다”고 선언하며 “그는 존엄성과 인내, 그리고 변함없는 선의로 미국과 전 세계 사람들에게 에이즈의 얼굴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했다. 상원 위원회는 라이언의 결백함과 헌신적인 희생정신을 높이 평가했다.
사실 CARE 법은 라이언의 이름이 붙기 전에도 의원들 사이에서 상당한 지지를 얻고 있었다.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에는 에이즈 운동이 가시화되며 연방 차원에서 에이즈에 대한 정부의 대응이 점차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1990년 3월 초 발의 당시 라이언의 이름이 붙기 전인 S. 2240 법안은 이미 발의자 1명과 공동 발의자 25명을 보유하고 있었고, 4월 초까지 6명의 공동 발의자가 추가되었다.
하지만 라이언의 이름이 법안에 붙으면서 법안 통과 가능성은 더욱 높아졌다. CARE 법안에 그의 이름이 붙으면서 HIV/AIDS 문제를 ‘위생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고, 반동성애 및 반마약 세력의 반발 없이 에이즈 기금을 승인받을 수 있었다. 실제로 상원 법안에 라이언의 이름을 넣음으로써 추가 공동 발의자를 확보해 극심한 동성애 혐오를 드러낸 제시 헬름스의 필리버스터를 막을 수 있는 과반수를 마련했다.
라이언 화이트가 대중적으로 강력하고 존경받는 상징이었던 만큼, 연방 의원들이 그의 이름과 이미지를 사용하는 데에는 논란도 있었다. 테드 케네디 상원의원(D-매사추세츠)을 비롯한 CARE 법안 지지자들은 '정치적으로 안전한 상징'을 사용하는 것에 개인적으로는 반대했지만, 법안 통과를 위해 라이언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판단했다. 반면 제시 헬름스와 그의 동료들에게 이는 동성애자, 정맥주사 약물 사용자, 할리우드 엘리트로부터 무고한 피해자를 보호하는 법안이었다. 헬름스는 CARE 법 지지자들로부터 라이언의 이름과 이미지를 빼앗으려는 시도를 하며 필리버스터를 시도했다.
1990년 5월 중순, 헬름스는 상원에서 CARE 법안에 대해 발언하며 "할리우드와 미디어 군중", "에이즈 로비의 동성애자 부문"이 라이언을 "착취"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헬름스는 "미국의 동성애 로비는 라이언 화이트의 이야기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의 투쟁과 죽음을 에이즈가 모든 사람에게 발생할 수 있다고 믿게 하는 데 사용했다"라고 말했다. 헬름스는 "라이언 화이트는 난잡한 동성애자나 정맥주사 약물 사용자는 아니었지만, 그를 전형적인 희생자로 묘사하여 에이즈 전염병의 주범들에게 동정을 구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라고 비난했다. 결국 CARE 법안은 존경과 결백의 정치적 한계를 드러내면서도 통과되었다.
헬름스는 자신의 노력이 헛된 것임을 알았을 것이다. 라이언 화이트의 이름을 단 이 법안은 상하 양원을 쉽게 통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안전하고 결백한 상징을 강조하면서 CARE 법안은 통과되었지만, 법안의 범위와 지원 규모는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CARE 법과 그에 대한 논의는 에이즈 유행의 구조적 원인인 동성애 혐오와 인종차별을 다루지 않았다. 또한 불평등한 상업 의료 시스템과 제약 산업 등으로 인해 유색인종, 성소수자, 그리고 정맥주사 약물 사용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가 감염에 더 취약해지는 구조적 문제도 충분히 반영하지 않았다.
CARE 법은 오히려 라이언과 같은 동정 어린 피해자에게만 초점을 맞추어 반동성애, 반약물, 인종적 낙인을 강화했다. 이러한 피해자 위계질서는 결국 에이즈 감염자(PWA)의 범죄화와 소외를 유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CARE 법의 이 암묵적 피해자 위계질서는 1995-96년 재승인 과정에서 징벌적 개정안을 채택하는 데 기여했다. 1990년, 헬름스 상원의원이 제안한 주사기 교환 프로그램과 표백제에 대한 자금 지원 금지 수정안(상원 수정안 1624호)은 통과되지 않았지만, 케네디 상원의원이 주사기 교환 프로그램에 대한 연방 자금 지원만을 금지하는 관련 수정안(상원 수정안 1625호)은 통과되었다. 케네디의 수정안은 실제로 1988년에 헬름스가 발의했던 주사기 및 바늘 교환 프로그램에 대한 기존 연방 금지 조치를 강화한 것이었다. 이와 유사한 반마약 및 반동성애 배제 조항은 1990년대 중반 CARE 법 재승인 법안에도 포함되었다.
HIV 전파 가능성이 있는 행동을 범죄화하려는 노력은 198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라이언 화이트 CARE 법은 이러한 노력을 확대하고 공식화했다. 디니 하소노, 캐롤 L. 갈레틀리, 일레인 오키프, 그리고 지타 라자리니의 설명에 따르면 CARE 법은 “미국 HIV 노출 관련 법 발전의 중요한 이정표”로 여겨진다. 라이언 화이트 CARE 법을 통해 연방 자금을 받으려면, 각 주는 “타인에게 HIV를 의도적으로 노출한 감염자를 기소할 수 있는” 법적 장치를 구축하고 유지해야 했다.
이전의 주 및 지방 차원의 HIV 전파 범죄화 노력은 무차별적으로 “무고한 사람들”을 감염시키는 “HIV 괴물”이라는 개념에 기초해 있었다. 사회학자 트레버 호프는 1980년대에 많은 법 집행자와 정책 입안자들이 성 노동자를 질병의 매개체로 인식하며 이들이 ‘일반 인구’를 위협한다고 여겼다고 설명했다. 이들의 시각에 따르면 “성 노동자들은 단지 고객만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 아니라, 무고한 여성과 아이들의 생명까지 위협하고 있었다.” 라이언 화이트 CARE 법과 그 안의 범죄화 조항은 이러한 주장을 더욱 강화하고 정당화했다. 호프는 “HIV 범죄화 논리는 동성애 혐오에 의해 부분적으로 추진된 것”이며, CARE 법이 이 논리를 반영했다고 지적했다.
라이언 화이트 CARE 법은 여전히 기념비적인 성과로 평가된다. 라이언 화이트의 이름, 이미지, 삶과 죽음에 영감을 받은 하원과 상원은 각 법안을 큰 표차로 통과시켰다. 신속한 조정 과정을 거쳐, 부시 대통령은 하원 법안(HR 4785)의 입안자들이 취한 ‘질병별 접근 방식’에 대한 행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90년 8월 18일 CARE 법에 서명했다. 법안의 최종 버전은 1991회계연도에 8억 8,200만 달러의 에이즈 자금과 1995년까지 45억 달러의 연방 보조금을 승인했다.
그러나 1990년대까지 자금 지원을 둘러싼 논쟁은 계속되었고, CARE 법의 엄격한 반마약 및 반동성애 조항의 전체적 영향은 앞으로 몇 년이 지나서야 분명해졌다. HIV 관련 범죄로 인한 기소와 유죄 판결은 미국에서 상대적으로 드물지만, 소외된 인구는 이러한 범죄화 조치의 주요 피해자가 되고 있다. 예를 들어, UCLA 로스쿨 윌리엄스 연구소에 따르면, 미주리주에서 흑인 남성은 HIV 관련 유죄 판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며, 흑인 여성은 성 노동을 대상으로 한 HIV 범죄화 법의 영향을 불균형적으로 받고 있다.
1993년 <플레이보이> 인터뷰에서 극작가이자 활동가이며 ACT UP 공동 창립자인 래리 크레이머는 라이언 화이트에 대한 존경을 표했다. 인터뷰어는 크레이머에게 “대부분의 미국인이 에이즈와 연관해 생각하는 인물은 1990년에 에이즈로 사망한 인디애나 소년 라이언 화이트”라며 크레이머에게 라이언이 에이즈 지도자, 영웅, 혹은 악당 명단에서 어디에 위치한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이에 크레이머는 “아마도 라이언 화이트는 이 병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데 누구보다 많은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용기에 반응하기 마련이다. 라이언은 문제를 직시하며 ‘나는 여기 있고, 에이즈도 여기 있다. 나는 에이즈의 얼굴이다’라고 말하며 용기를 보여주었다”고 답했다. 그러나 그해 초 크레이머는 코네티컷 주 하트포드에서 라이언의 어머니와 함께 한 패널에서 “라이언 화이트에 대한 이야기는 지겹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어머니 진 화이트는 회상했다.
라이언 화이트의 이야기에 대한 이러한 상반된 반응은 그의 삶과 유산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반영한다. 라이언 화이트는 1980~1990년대 에이즈 유행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재조명하는 데 기여했지만, 그의 이야기는 무고한 피해자와 유죄의 가해자를 인위적이고 자의적으로 구분하며 인종차별, 동성애 혐오, 반마약 낙인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1990년대 중반에 프로테아제 억제제와 고활성 항레트로바이러스 요법(HAART)이 등장하고 2010년대에는 PrEP 및 PEP가 도입되었지만, 이러한 낙인은 여전히 소외된 집단이 HIV 감염에 특히 취약하도록 만드는 정책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고 있다. 라이언 화이트의 놀라운 삶을 기리기 위해서는 그의 이야기를 재구성하여 이러한 낙인과 이로 인해 생겨난 파괴적인 정책을 해체하는 데 활용해야 한다.
[출처] “I Am the Face of AIDS”: Ryan White and the Politics of Innocence in the History of HIV/AIDS
[번역] 이꽃맘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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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M. 렌프로(Paul M. Renfro)는 플로리다 주립대학교 역사학과 조교수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