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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회권 영역을 다루는 일은 여전히 자유권에 비해 훨씬 어렵다. 단적인 예로, 필자가 소속한 <한겨레>에 보도됐던 여성 재소자 성폭력 피해 사건은 많은 이들의 공분과 신속한 정부 반응을 이끌어낸 반면, 어린이 무상의료 기획기사에 대한 반응은 공분보다는 연민이었고 정부 반응도 없었다. 어떻게 하면 사회권 문제를 효과적으로 제기하고 성과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 <사람>을 비롯한 인권매체와 인권단체들이 함께 고민해보자는 제언을 겸해, 지난해 미국 연수 때 해본 생각들을 풀어 놓을까 한다.
사회권 보도의 어려움들
어려움은 우선 사회권의 성격 자체에서 온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142개 나라가 ‘경제적, 사회적 및 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에 가입해 있지만,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시민들이 이를 ‘권리’로 인식하기보다는, 자선의 차원이나 기껏해야 정책 문제로 보고 있다. 정부가 이들 권리를 충분히 보장하지 못해도 자유권을 침해당한 때와 달리 정부에 책임을 묻지 않는다. 또 사회권의 실현은 대개 ‘한정된 재원을 어느 곳에 얼마나 투입할 것이냐’라는 문제로 인식되기 때문에, 예산의 쓰임에 대한 총체적이고도 정확한 분석이 뒷받침되지 않고는 특정 사회권의 실현을 설득력 있게 요구하기 힘든 게 사실이다.
또 다른 어려움은 사회권 침해가 자유권 침해보다 대중의 주목을 덜 끈다는 점이다. 자유권 침해 사건은 주로 특정 소수에게 격렬한 고통을 주지만, 사회권 침해는 불특정 다수에게 일상화한 고통을 주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새로운 ‘사건’이기보다는 늘 존재해온 ‘현상’인 경우가 많다. 그만큼 언론의 주목도는 떨어진다. 미국의 한 빈민운동가는 이렇게 비꼰다. “언론은 빈곤층을 하나의 계층으로 다루지 않고, 개인사에 초점을 맞춘다. 그래야 신문이 팔리기 때문이다. 어떤 비극이 빚어지면 카메라를 들고 나타나지만, 그날만 지나면 그들은 가버린다.” 우리도 난치병에 걸린 가난한 어린이의 가슴 아픈 사연을 소개하며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는 신문 기사나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종종 접한다. 그러나 이런 처지의 어린이들 모두에게 치료받을 ‘권리’가 있다는 사실은 언급되지 않는다.
한가지 난점을 더 꼽자면, 자유권 침해 사건에서는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 쉽게 가려지는 반면 사회권 침해에서는 뚜렷한 인과관계로 책임자를 들춰내기 힘들고, 들춰내더라도 그에게 법적 책임을 지우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그만큼 문제제기의 동력이 떨어지게 된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휴먼 라이츠 워치’의 케네스 로스 사무총장은 사회권 침해 가운데서도 정부의 독단적인 처분이나 차별 행위가 두드러진 사안들에 초점을 맞출 것은 제안한다. 그러면 자유권 침해를 고발하는 전통적인 전략인, 이른바 ‘찍어서 창피주기’(naming and shaming)가 잘 통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로스는 미국의 농장에서 일하는 어린이들의 노동조건 문제를 예로 든다. 휴먼 라이츠 워치는 이들의 하루 노동시간이나 살충제에 노출되는 정도 등이 적절한 수준인 지를 따지기보다, 일반적으로 어린이 노동조건을 규율하는 법이 유독 이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지적했다. 전자를 거론하는 건 어느 정도의 노동조건이면 사회권 침해에 해당하느냐는 논쟁의 여지를 남기지만, 후자는 정부를 명쾌하게 비난할 근거가 됐고 언론의 관심도 더 끌게 됐다는 것이다.
통계수치에 사람의 얼굴을 입히고 독자와 눈높이를 맞춰라
그러나 ‘인권을 위한 의사회’의 레오나르드 루벤스타인 사무총장은 이런 접근법이 인권단체 스스로 문제제기 범위를 제한하는 우를 범한다고 비판한다. 이를 테면 전반적인 의료 체계의 부족으로 사람들이 건강과 생명을 잃는 일처럼 많은 사회권 침해 문제는 특정 집단에 대한 차별 행위로 연결짓기 힘들다는 것이다. 대신 그는 우선적인 관심을 가장 취약한 계층으로 돌리자고 제안한다. 정책 결정자들은 사회적 재원의 분배에서 정치적 저항이 가장 적은 길을 원하고, 그러다보면 정치적 영향력이 적은 도시빈민이나 어린이 등이 먼저 희생되기 때문이다. 그들이야말로 인권단체와 인권매체가 먼저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이란 얘기다.
로스의 발상도 되새겨볼 만하지만, 필자에게는 루벤스타인의 태도가 더 옳아 보인다. 문제는 사회권 침해 문제를 어떻게 하면 더 효과적으로 알려내느냐다. 치열한 상상력이 필요한 대목이다.
우선은 사회권도 진정한 법적 권리라는 인식을 끌어올려야 하고, 이를 위해선 많은 매체에 ‘경제적, 사회적 및 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등에 대한 정보를 자주 담아내어 이런 국제 인권규범이 법적으로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뿌리내리게 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미국의 인권단체들이 ‘경제적 권리를 알리는 버스 투어’ 등을 조직하는 사례도 눈여겨볼 만하다. 자유권에 대한 인식이 상대적으로 높은 점을 감안해 자유권과 사회권의 불가분성을 강조할 필요도 있다. “궁핍한 사람은 자유로울 수 없다. 직장을 잃은 사람들은 바로 독재의 토양이 된다.”는 프랭클린 루즈벨트 전 미국 대통령의 말이 바로 그런 맥락일 것이다.
자유권 침해 사건에서 피해자의 고통을 구체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듯, 사회권 침해 문제에서도 가능한 한 추상의 정도를 낮춰 피해자들의 생생한 모습을 그려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미국의 한 노숙자 출신 인권활동가는 말한다. “사람들은 통계수치에 반응하지 않아요. 바로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는, 생생한 사람들의 모습에 반응하는 거죠.” 통계수치에 사람의 얼굴을 입히고, 그들과 독자가 서로 눈을 맞출 수 있게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한가지. 외국의 사례를 연구해 적극 소개하는 것도 인권매체의 중요한 구실이라고 본다. 특히 사회권은 사회적 재원의 배분과 관련된 문제인 만큼 우리와 비슷한 경제 규모를 지닌 나라들과 비교·연구가 활발하면 좋을 텐데, 그런 다양한 연구 결과를 접할 수 없어 아쉽다.
어쨌든 사회권을 옹호하는 일은 쉽지 않은 과제인 것 같다. 미국의 한 활동가가 한 말처럼, “이는 사람들의 심장과 머리를 동시에 쟁취하는 문제다. 그것은 아이디어의 전쟁이요, 이미지의 전쟁이요, 이야기의 전쟁이다.”
<사람>이 첨예한 인권 현안을 알리는 장인 동시에 효과적인 인권운동 전략을 토론하는 장이 됐으면 하는 바람에서 설익은 생각을 늘어놓았다. <사람> 독자들과 많은 의견을 나눴으면 좋겠고, 특히 좋은 제보를 받을 수 있다면 기자로서 더없이 행복하겠다.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