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권은 1975년 이리(현재 익산)를 수출자유지역으로 지정하고 외국자본 유치를 위해 각종 특혜를 줬다. 이리 주변 농촌지역의 저임금 노동자를 기반으로 한 노동집약적 업종이 주를 이뤘다.
1978년 이리수출자유지역에 입주한 독일 기업 후레아패션은 주로 코트, 자켓, 바지, 드레스 등을 생산하는 업체다. 독일 본사는 아스코 그룹으로 독일 내에 90여 개의 백화점과 외국 판매망을 가진 거대 종합상사로 후레아패션은 하청 생산공장이다. 후레아패션이 1986년 세무서에 신고한 순이익금만도 무려 67억 원이었다. 이는 설립자본금의 22배였다.
사무직을 제외한 생산직 노동자만 1,800여 명이었는데, 1986년 한해 815명이 입사해 743명이 퇴사했다고 하니, 후레아패션의 성장 뒤에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조건이 존재함을 짐작할 수 있다.(한국여성단체연합, <이리 후레아훼숀 여성노동자의 투쟁>, 민주여성 창간호, 1987년)
살인전표 제도
후레아패션에는 ‘PK’라는 전표제도가 있었다. 1일 작업기준을 인원수×생산량으로 책정해서 목표량을 채우도록 강제했다. 개인 목표량이 달성돼도 결근자가 있거나 하면 추가 작업이 실시되는 제도였다. 작업 목표량은 거의 모두가 ‘숙련’ 기능공을 기준으로 설정되어서 숙련도가 낮은 대다수 노동자는 작업 내내 ‘눈코 뜰 새 없이 죽자 사자’ 일할 수밖에 없었다. 점심시간도 작업, 공식적 작업시간 전후로 10~30분까지 임의로 연장 작업을 시키는 것은 일상이었다. (임영일, <이리 지방공업단지의 현황>, 현장 1집, 1984) 노동자 간, 부서 간 경쟁에 노동 강도는 더욱 높아졌다. 책임량이 달성되면 소위 생산보너스를 지급하고 목표량은 다시 더 높여 책정된다. 장시간 맞교대 노동에 목표량 경쟁에 시달린 노동자들은 독일 기업이 도입한 ‘PK’전표제도를 ‘살인 전표’ 제도라고 불렀다.
1987년 후레아패션 노동자 투쟁
1987년 4월 7일 후레아패션 노동자들은 ‘살인전표 철폐, 임금 16.5% 인상, 부당해고 철회, 노조 정상화’를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이 투쟁은 해고자 복직투쟁, 노조 민주화 투쟁으로 이어졌다.
후레아패션 노사는 3월부터 임금교섭을 해왔다. 여기서 사측의 9% 인상안과 노조 측의 16.5% 요구안이 팽팽히 맞섰다. 그런데 4월 1일 12.5%로 임금교섭이 타결되었다는 공고가 붙었다. 노조 위원장이 회사와 짜고 합의한 후 공고를 낸 후 잠적한 것이다. 이에 교섭위원들은 천여 명의 조합원 서명으로 교섭 결과가 무효임을 선언하고 4일 보고대회를 열었다. 700여 명의 노동자가 전표 거부, 잔업 거부를 하고 모였다.
사측은 7일 새벽 야간조를 강제 귀가시킨 후 12명을 해고하고 휴업공고를 냈다. 그리고 공장 후문을 용접해 봉쇄해 버렸다.
이에 노동자들이 후문 앞 아스팔트에서 농성을 시작하면서 투쟁이 시작되었다. 농성은 구사대 침탈로 하루 만에 해산되었고 농성 지도부 10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300여 명의 노동자가 창인동 성당에 모여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며 사흘간 농성을 했다. 연행된 노동자들이 석방돼 일단 투쟁을 중지하고 정상 출근하기로 했다.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조회시간 야유하기, 기관이나 연맹에서 나온 간부 거부하기, 화장실 낙서하기, 의류 제품에 ‘해고자 복직’ 박아대기, 유인물, 스티커 배포하기, 집회 참가하기 등 투쟁을 지속해 갔다.
소강상태에 있던 투쟁은 7월 2일 9명의 해고노동자가 서울 중구에 위치한 서독대사관 점거 농성을 시작하면서 다시 불붙었다. 노동자들은 아스코 그룹 와그너 총수와의 면담과 해고자 전원복직을 요구했다. 그러나 서독대사는 외무부에 이들을 주거침입으로 고소했고 대사관 밖으로 쫓겨난 노동자들은 결국 남대문경찰서 형사들에 의해 ‘이리’로 끌려 내려왔다.
이들은 한 명씩 몰래 들어가 생산라인을 통제하는 메인컴퓨터가 있는 기술부를 점거했다. 회사 전체를 마비시켜 버렸다. 사측이 구사대와 경찰을 동원해 위협했으나 농성장을 침탈하지 못했다. 결국 위원장 직선제와 수당에 대한 개선책을 제시하면서 2차 투쟁이 종결됐다.
8월에는 남성 노동자들이 함께하면서 후레아패션 노동자 전체가 참여하는 파업투쟁이 다시 시작됐다. 현장 안에서 여성 조합원들은 ‘노조정상화추진위원회’를 조직해 활동했다. 이들은 구사대로 결합했던 남성 노동자들과도 대화했다. 노동자대투쟁이 전국을 뒤흔들었고 후레아패션 7월 투쟁의 성과로 어용노조가 힘을 잃자 남성 노동자들도 함께 투쟁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졌다.
8월 12일 야식시간이 끝날 무렵 재단부 노동자를 주축으로 500여 명이 ‘해고자 복직, 임금인상 1,000원, 어용노조 퇴진, 사원 총회’를 요구하며 행동에 돌입했다. 해고노동자들도 지원투쟁을 펼쳤다. 사측은 휴업공고를 내고 농성장을 봉쇄했지만 노동자들은 투쟁을 이어갔다. 8월 22일 “일당 1만2천 원과 어용노조 퇴진, 위원장 직선제”를 성과로 투쟁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9월 직선으로 위원장이 선출되었고 민주노조 깃발이 올랐다.
한편 해고 당사자들은 “1인당 천오백만 원의 보상금과 자진 사퇴”에 합의했다. 그러나 박경이, 주순래는 이 보상 합의를 거부하고 “해고기간 임금 지불, 조합활동 보장, 원직 복직”을 주장했고 10월 마침내 복직을 쟁취했다.
1988년 한국 여성노동자 투쟁 소식을 알리는 독일 노동조합 연대행사 포스터.
국제연대
이리에서 후레아패션 노동자들이 투쟁하는 동안 재독한인여성모임은 독일과 한국에서 이들의 투쟁을 지원했다. 파독 간호사를 주축으로 한 재독한인여성모임이 후레아패션 투쟁에 동참한 것은 전 파독간호사 주예희의 편지를 통해서였다. 1987년 8월 1일 재독한인여성모임 회원들은 아들러 의류 판매장 앞에서 6개 단체 30여 명이 모여 제품 불매운동을 펼치면서 후레아패션 노동자들의 투쟁소식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일반인들에게 알렸다. 이 일이 독일언론에 알려지면서 확산되는 계기가 됐다. 8월 15일에는 아들러 기업이 운영하는 9개 매장에서 동시다발로 화재가 발생했다. 이 사건을 일으킨 이들은 “타오르는 불길로 후레아패션 여성 노동자들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한국 아들러 지점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은 노동력의 착취와 일상적으로 자행되는 성유린 및 성차별주의에 대항해 투쟁하고 있다. 그들은 또한 이곳 서독에 공동연대를 요청해 왔다. ... 성 유린 및 차별주의는 여성에 대한 폭력행위이며 성적 노동분업을 의미한다. 또한 인종차별주의는 백인 여성들이 제3세계의 착취를 통한 이익을 누리고 있는 사실을 볼 때 우리 여성투쟁의 분산을 의미한다. ... 타오르는 불길로 아들러 기업에서 일하는 한국 여성 노동자들에게 인사를 보낸다. ‘임금협상 제기할 것, 해고노동자 원상복직, 16.5% 임금인상, 구사대 투입 중단할 것, 비인간적인 임금계산제도 해체할 것’ 국제적인 여성해방을 위하여 제국주의적이고 가부장체제에 대항해 중단없는 투쟁을!”
- 독일 페미니스트 단체 로테초라 성명서, 1987년 8월 18일
노동자들의 투쟁과 국제연대 결과 아들러 기업은 이 사건으로 ”한국에 있는 공장과 독일 시장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도가 없기 때문에 폭력집단의 무력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다“는 기사를 내고 후레아패션 노동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배아영, 「후레아훼션 노동운동의 전개와 그에 나타난 다원적 여성연대」, 2019년)
[참고자료]
임영일, <이리 지방공업단지의 현황>, 현장 1집, 1984년
배아영, <후레아훼션 노동운동의 전개와 그에 나타난 다원적 여성연대-1987년을 중심으로>, 열린정신 인문학연구, 23호, 2022년
한국여성단체연합, <이리 후레아훼숀 여성노동자의 투쟁>, 민주여성, 창간호, 1987년
민주화기념사업회, 오픈 아카이브
양규헌 글, <1987 노동자 대투쟁>, 한내, 2017년
전노협백서발간위원회, 전노협 백서1, 1997년
<전북민주화운동사>, 선인, 2012년
남춘호, 이성호 <전북지역 노동운동의 역사 다시쓰기>, 한울아카데미, 2009년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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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화는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