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 주] 22대 총선이 끝난 지도 꽤 되었다. 뒤늦은 감은 있지만, <22대 총선, 노동자정치의 비극과 길 찾기>라는 주제로 연재한다. 22대 총선으로 96-97총파업 이후 본격화된 ‘대중적’ 노동자정치세력화운동, 또는 진보정당운동의 한 시기가 매듭지어졌기 때문이다. 더욱이 1987년 이후 해묵은 논쟁이었던 ‘독자적 노동자정치냐 민주진보대연합이냐’라는 논쟁이 헌재 진행형으로 전개되면서, 향후 노동자정치의 전망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본 연재에서는 22대 총선이 노동자정치에 던진 질문은 무엇인지, 20여 년간 진행된 노동자정치운동은 왜 실패했는지, 민주진보대연합론에 근거한 진보당의 민주당발 비례위성정당 참여는 왜 문제인지 등을 짚어보면서, 노동자정치의 새로운 전망 찾기를 독자들과 함께 모색해 보고자 한다.
(1) 22대 총선이 노동자정치에 던지는 질문 그리고 과제
(2) 민주대연합-의회주의에 발목잡힌 노동자정치
(3)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파산과 민주노조운동의 위기
(4) 진보당의 비례 위성정당 참여가 불러온 민주노조운동의 위기와 대안
2024년 총선과 이를 전후해 드러난 민주노총의 총선 방침, 정치 방침 및 관련된 실천들은 1995년 민주노총 건설과 함께 제시되었던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파산을 보여준다.
1995년 민주노총은 강령 중 하나로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천명했다. 기본 과제 및 그 해설에서는 ‘노동자 대표의 정치적 진출 확대’와 ‘전체 노동자 대중의 요구와 이해를 진실로 대변할 수 있는 정당 건설’을 제시했다. 이후 2004년 민주노동당이 10석으로 국회에 입성한 이래 20년 만에 진보정당의 국회 진입은 실패했다. 진보당이 3석을 점했다고는 하나, 민주당이라는 자유주의 정당에 기댄 결과였을 뿐이다.
22대 총선과 그 후 넉 달이 보여준 것
민주노조 간부 출신이 민주당발 비례 위성정당 참가를 통해 국회에 들어갔고, 진보당이 진보정당을 자임하는 당으로 활동한다고 하면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실패하지 않은 것일까? 독자적인 정당으로서는 비례대표 후보를 내세우지 않은 채 민주당의 비례 위성정당의 품에서 자신이 선출했다는 후보의 출마 가능 여부까지 민주당의 입김에 좌우됐던 상황을 놓고 본다면,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실패하지 않았다고 자평하기엔 너무도 참담하다. 더욱이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결정한 총선 방침인 “보수 양당 지지를 위한 조직적 결정은 물론이고, 전·현직 간부의 지위를 이용해 친자본 보수 양당을 지지하는 행위를 금지한다”마저 내팽개친 상황에서, 민주노총이 정치세력화란 이름으로 조합원들에게 그 어떤 정치활동을 요구할 수 있을지 암담할 뿐이다.
민주노총은 넉 달이 다 돼가는 지금껏 총선 평가도 마무리하지 못했으며, 총선 방침 위배에 대한 징계조차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보수 양당 지지를 넘어 그 위성정당의 후보로 들어간 민주노총 전 사무총장은 징계는커녕 민주노총 집회에서 자랑스레 연설까지 한다. 대의원대회에서 결정한 명확한 방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총의 지도부는 방침에 따른 집행을 거부한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인정하지 못하는 입장들로 인해 민주노총 중앙집행위원회는 그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한다. 심지어는 ‘위성정당이 아니니 방침 위배가 아니’라는 말조차 거리낌 없이 제출되고,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노조법 2, 3조 개정을 위한 국회 활동은 누구와 해야 하며, 윤석열 퇴진 투쟁은 어떻게 하느냐고 우겨댄다. 결론을 내리지 못하니, 이제는, 정세가 바뀌고 방침이 맞지 않은 것이니 방침을 바꾸면 되지 않냐고 반문한다.
대리주의, 정치 왜곡을 부추기는 양날개론
이제까지 추진된 노동자 정치세력화 자체의 근본적 문제점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흔히 지적되는 것은 ‘노동과 정치의 분리’다. 즉 정치세력화하지 못한 ‘노동’이 제도정치권에 대표자를 진입시키는 것을 정치세력화로 설정하는 것이다. 여기서 ‘노동’은 결국 경제투쟁에 전념하는 노조 또는 산별노조이며, ‘정치’는 결국 제도정치권에서 ‘노동’을 대리, 대표하는 정당을 의미한다. 이러한 ‘노동자 정치세력화’에서 노동 정치는 이제 제도정치권 진입을 위한 활동과 제도정치권에서 노동의 이익을 대리, 대표하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리고 ‘독자적’이라는 말로 수식함으로써 정당성을 부여한다. 이번 총선을 통해 이 ‘독자성’마저도 심대하게 왜곡되었지만 말이다.
이러한 노동과 정치의 분리는 필연적으로 경제주의적, 조합주의적 노조 활동을 조장하며, 정치에 있어서 도구주의적, 대리주의적 접근을 정당화한다. 정치권에 진입할 수 있다면 정치공학적 셈법도 정당화될 수 있으며, 대리자가 제도정치권에 성공적으로 진입하는 것이 노조의 성공적인 정치활동이 되는 것이다.
부유하는 ‘진보정치’
이로부터 상충하는 두 가지 경향이 나타난다. 한편으로는 조직노동에 대한 의존이다. 조직노동의 지지를 받기 위해, 조직노동 내에 지지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진보정치는 왜곡된다. 조합주의적 이해는 현장 노동자의 목소리로 포장되고, 조직노동은 표밭이자 세력권이며, 재정의 전달 벨트로서 역할을 한다. 세력권을 확보하고 강화하기 위한 활동이 곧 현장 활동이요, 하방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민주노총 소속 노조 간의 조직 갈등과 조직화 경쟁은 민주노조운동 속 다양한 의견그룹과 정파적 입장 간의 공존과 존중의 원칙을 뛰어넘어버린, 왜곡된 진보정치의 생존 방식을 보여주기도 한다. 노조 가입 시 특정 정당 가입을 강요하기까지 하는 상황은 제도정치권을 향한 종파주의적 이해가 조직노동 현장마저 왜곡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불충분한 조직노동의 대표성, 제도정치권 진입과 의회주의적 활동 외에 보여줄 것 없는 노동정치, 진보정치의 빈곤함으로 인해 이른바 국민의 눈높이에 맞춘 정치로 지속적으로 퇴보한다는 것이다. 탈민주노총에 대중 정당을 지향하겠다던 진보정당, 지역의 맹주인 보수정당이 후보를 내지 않아 당선된 의원이 지역 정서를 강변하며 보수정당에 감사하는 현수막을 내걸었던 진보정당은 그 전형적인 사례들이다.
한편으로 조직노동에 의존하며 조직노동을 자신의 세력권으로 묶어 세우려 하는 경향과, 다른 한편으로 국민정당화를 꿈꾸고 보수정당에 대한 구애를 정당화하는 경향은 끊임없이 서로 충돌하면서 ‘진보정당’의 정체성을 흔들고, 제도정치 속 보수정치와 진보정치의 경계선을 흐려놓는다. 진보정치의 독자적 대중화는 말할 것도 없고, 노동자계급의 정치는 들어설 여지도 없다. 결국 민주당 2중대 논란은 ‘독자적’ 진보정당에게 끊임없이 따라붙을 꼬리표가 되었으며, 진보정당의 ‘독자적’ 기반은 보수 양당 정치의 대립 속에 언제든 회수되는 신세를 면하기 힘들다.
단순 명쾌한 정치 방침과 현장 노동 정치의 공백
또 지적해야 할 것은 방향과 이념이 결여된 ‘노동 정치’다. 무엇을 위한, 무엇을 향한 노동정치, 진보정치인지 분명하게 정립하지 못했다. 남아있는 것, 명확히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노동자를 위한 정치, 노동자의 정치라는 ‘무색무취’한 조합주의적 언명이다. 이는 단지 노동자 정치세력화라는 기본과제에 단지 ‘계급’이나 ‘사회주의’라는 말이 빠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독자적’이라는 말로 충분히 해명될 수도 없다. 무엇으로부터의 ‘독자’이며, 그 ‘독자적’ 정치의 모습이 무엇인지 대중적으로 제시되지 않는 한 정치를 둘러싼 노동 현장의 혼란과 혼선은 피할 수 없다.
노동자의 정치가 무엇인지, 제도정치권의 보수정치, 부르주아 정치와 어떻게 다른지 해명하지 못한다면, 정치는 그저 기존의 의회정치, 제도정치권 활동만을 의미하게 될 뿐이다. 노조의 정치 사업은 진보정당의 제도정치권 진입과 지원으로만 축소된다. 그리하여, 진보정당을 찍고 지지하자는 단순 명쾌한 정치 방침이 탄생한다.
노동정치, 노동자계급정치의 상은 간데없고 정치활동은 진보정당을 제도정치권에 진입시키는 것, 제도정치권의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것으로만 왜곡된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때 되면 돈 모아주고, 표 찍어주는, 현장의 대상화와 대리주의 정치로 귀결될 뿐이다. 진보정치 역시 상층 제도권 정치의 일부일 뿐이게 된 것이다.
이제 노동정치는 누구 찍고, 누구에게 정치후원금 내면 되는 편리함만 남았다. 그래서 현장에서 제기되는 질문은 진보정당이 여러 개이면 혼란스러우니 하나로 정리하면 안 되냐는 것이 된다. 곤혹스럽고 난감하다. 선거 때가 되면 누구를 찍고 지원해야 하는지 물어보는 조합원들에게 뭐라 이야기할지 곤란하니 또 편리한 해결책을 찾는다. 단일 진보정당이 이제 조합원의 뜻이 된다. 새로운 정치세력화라는 이름으로 자못 엄숙하게 관료적 해결책을 강요한다.
하지만 선거 때 누구를 찍어야 하냐, 하나로 정리하면 안 되냐는 조합원들의 질문은“진보정치, 노동정치는 표 찍는 거 말고는 뭐가 있는데? 선거 때만 이야기하는 정치세력화 말고 현장에서는 무슨 활동을 해야 하는데?”라는 질문에 다름 아니다. 이 질문에 답을 한답시고 하나의 진보정당을 만들자는 것은 그저 관료적 게으름이며, 노동자계급정치, 새로운 정치에 대한 현장의 갈증에 눈감고 이를 왜곡하는 의식적이고 종파적인 침묵이요 왜곡일 뿐이다.
문제는 계급투쟁 전선
마지막으로는 대중투쟁, 계급투쟁의 문제다.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실패는 진보정당의 독자적인 의회 진출이 가로막혀서가 아니다. 진보정치의 실패는 진보정당이 여러 개여서가 아니다. 제도권 정치 속에 미약하게나마 진보정치, 노동정치를 내걸었던 흐름이 약화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대중투쟁의 후퇴, 계급투쟁 전선의 위축을 보여주는 것이다.
대중투쟁의 전진 없이, 계급투쟁 전선의 확장 없이 이른바 진보정치는 제도정치권 내의 섬일 뿐이다. 노동과 정치가 분리되고, 대중투쟁, 대중운동과 유리된 진보정치는 결국 ‘정치’ 전문가 집단, 상층 노조 관료들의 서식지를 가꿔줄 뿐이다.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라는 말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압도적인 지배계급, 지배 이데올로기의 우세 속에서 강력한 계급투쟁 전선의 구축을 통한 대항 헤게모니의 형성과 강화 없이는 진보정당이라는 섬이 하나이든 여럿이든 별 무의미할 수밖에 없다.
새로운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새로운 노동자계급운동의 부상으로
수십 년째 ‘노동자 후보’, ‘민중후보’만 이야기할 뿐 정치적 정체성을 명확히 하지 못하고 ‘색깔’을 뺀 선거에 급급한 현실, 진보라는 이름조차 자유주의 우파 정당에 빼앗겨버린 진보정치, 때 되면 매번 다시 살아나서 전선을 교란하는 ‘민주-반민주구도’ 또는 비판적 지지.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예정된 실패의 기저에는 우리의 무능과 나태와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다.
‘외적, 형식적 ‘독자’를 넘어서 계급정치의 지향, 변혁의 상을 드러내지 못하는 무능함은, ‘진보정치’의 제도권 진입을 위해 복잡한 정치공학적 셈법을 고안해 내는 유능함으로 이겨낸다. 현장 정치활동, 계급정치의 상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나태함은 조직노동의 표와 돈을 몰아주면 진보정치가 이긴다는 부지런한 조직화로 돌파한다. 대중에게 사회주의를 이야기하기 어려워하는 두려움은 사회주의는커녕 해방과 변혁조차 이야기하지 않고서도 진보가 가능하다는 대담한 상상으로 극복한다.
또 기존과 유사한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반복하고 싶다면 이런 유능함과 부지런함, 대담함이 필요하지 않을까?
지난 30년의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실패에 다시금 민주노조운동의 위기를 떠올리는 것은 작금의 사태가 노동자계급정치의 싹을 뿌리째 도려내 버릴 것 같은 절망감 때문이다. 자유주의 우파 정당의 충실한 파트너이자 그 일부로서 조직노동을 지배하고 길들이면서 대중운동의 대주주로 행세하는 노동-정치 연합체의 탄생을 목도하게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미국식 자유주의-노동 동맹(lib-lab coalition)의 한국적 버전이 87년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귀결이 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새로운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필요하다면, 지금까지의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던 조건과 주체 상황에 대한 발본색원과 함께여야 한다. 그동안의 문제점을 반복하는 노동자 정치세력화 버전 2가 아니라 노동자계급정치를 세워내고, 노동 현장을 정치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어야 한다. 현장의 요구와 투쟁이 노동자계급정치의 상 속에서 새롭게 제시되고 조직되어야 한다. 노동자계급정치는 노조의 요구를 제도정치권에 전달하고 대리하는 것을 넘어, 노조와 당 간의 역할 분담과 모양 좋은 공생을 넘어, 제도정치권의 일부가 아닌 현 정치체제 자체의 대안이자 전복자여야 한다. 조직노동에 노동정치가 결박될 것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을 조직화하는 도정 자체가 진보정치, 계급정치여야 한다. 민주노조운동의 위기는, 민주노총의 위기는 새로운 노동자계급운동의 부상으로써만 극복될 수 있다.
- 덧붙이는 말
-
김석은 노동당 서울시당 당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