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거리를 생각하세요” 23년 원직복직 투쟁, 시그네틱스 여성노동자들 이야기

[필자 주] 2001년 사측의 ‘무노조 비정규직 꿈의 공장 만들기 시나리오’에 맞서 총파업 투쟁을 하다 해고당해 24년째 투쟁하는 여성노동자들이 있다. 영풍그룹 계열사인 (주)시그네틱스에서 해고된 시그네틱스분회 조합원들(민주노총 전국금속노조 경기지부 소속)이다.  

반도체 후공정 회사(반도체 칩에 전기 기능을 연결하고 외부 손상이 가지 않게 패키징한 후 성능을 검사한 제품을 삼성전자 등 국내 기업과 해외로 납품한다)인 시그네틱스는 1966년 미국 시그네틱스사가 서울 강서구 염창동에 설립한 해외 투자법인 1호 기업이다. 1975년 필립스에 이어 1995년 거평그룹이 인수하고, 1998년 거평이 부도가 나면서 2000년 영풍그룹이 인수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지금은 거리에서 투쟁하고 있는 시그네틱스 노동자들에게도 두 달에 한 번 보너스를 받으며 은행 직원보다 더 많은 월급을 받던 '잘 나가던' 시절이 있었다. 1998년, 거평이 문어발식 사업 확장으로 3년 만에 부도를 냈을 때도 희망은 있었다.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 대상 업체에 선정되어 회생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거평은 부도가 났을 때, 노동조합의 동의를 받아 염창동 부지를 담보로 대출을 받았다. 1997년 완공해 가동 중인 파주 만 여 평 부지 시그네틱스 제2공장에 염창동 노동자들을 데려간다는 조건이었다. 통근버스와 이사 비용도 다 지급하겠다고 했다. 시그네틱스 노동자들은 이 약속을 믿고 상여금 반납과 호봉승급 보류, 퇴직금 누진제 폐지 등 임금삭감으로 위기 극복에 함께했다. 그 결과 시그네틱스는 2년도 되지 않아 워크아웃 조기졸업에 성공한다. 

하지만, 정작 거평은 경영권을 박탈당하고, 회생하고 있는 시그네틱스를 2000년 영풍이 인수한다. 영풍그룹은 파주 본사 공장 이전에 관한 기존 노사 합의를 무시했다. 영풍은 공장 이전 시 위로금을 받고 퇴사할 이주불가자를 모집했고, 190명의 노동자가 회사를 떠난다. 2001년에는 안산 원시동에 별다른 생산·투자 계획도 없는 작은 공장을 만들어 시그네틱스 노동자들을 인사발령 냈다. 영풍은 노동조합이 요구한 안산공장에서 5년간 정리해고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약속과 공증조차 받아들이지 않았다. (박일환, <빼앗긴 노동, 빼앗길 수 없는 희망: 시그네틱스 노동자 18년 투쟁의 기록>, 우리학교, 2019)

노조 파괴와 정규직 없는 공장 만들기 수순임을 알아챈 노동자들은 이에 저항하며 전면 파업에 돌입해 용역과 구사대에 맞서 공장 사수 투쟁을 전개했다. 위기에 처한 회사를 살린 노동자들과 했던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했을 뿐인데, 회사는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들을 징계위원회에 회부하고 가압류를 걸었다. 그리고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 130여 명을 해고했다. 한강대교 아치 위 고공농성, 집단 단식농성, 영풍 본사와 파주 시그네틱스 공장 산업은행 앞 노숙농성, 연행과 구속 등의 긴 투쟁이 이어졌다. 그사이 일부 노동자가 복직했다가 해고되는 일이 네 차례 반복되었지만, 1차 해고노동자 29명은 복직하지 못했다. 7명의 4차 해고노동자가 2022년 해고무효소송에 승소하여 임금·위로금 지급에 합의하여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여전히 12명의 노동자가 시그네틱스분회에 남아 파주 공장 원직복직과 노동조합 인정 등을 요구하며 투쟁하고 있다. 시그네틱스분회 투쟁 근황을 짧게나마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영풍그룹 본사 앞 시그네틱스분회 조합원들. 왼쪽부터 정혜경·차은희·남옥연·임은옥·윤민례 조합원. 출처: 연정

매듭 

6월 27일 점심 무렵, 영풍그룹 본사가 있는 서울 논현동 영풍빌딩 앞. 시그네틱스분회(민주노총 전국금속노조 경기지부 소속) 조합원들이 영풍빌딩 앞에 현수막을 걸고 있다. 

“여기에 걸은 다음에 땡겨. 한 번만 이렇게 해줘도 잘 안 풀려. 나무에 칭칭 감으면 길이가 짧거든. 이게 생각보다 어려워. 나도 처음에는 안 돼서 그냥 감고 고리도 풀어놓고 했어.” 

임은옥 조합원이 위로를 곁들인 ‘현수막 걸기 23년 노하우’를 전수해 준다. 현수막 끈에 달려 있는 고리에 끈 끄트머리를 넣어 당긴 후에 매듭을 짓는 과정이다. 사실, 그간 몇 번 와서 거든다고는 했지만, 정석대로 한 적이 없다. 조합원들 하는 걸 곁눈질해 보기도 하고 설명을 듣기도 했지만, 결과는 늘 ‘칭칭 감기’였다. 이제 고백하는데, 조합원들이 애써 만든 고리를 풀어 놓은 적도 있다. 물론, 이전에도 조합원들이 모르지는 않았을 거다. 

“160(cm) 넘는 사람? 까치발 서도 안되네.”

“저 딱 160(cm)요.”

현수막을 위로 더 올리기 위해 키 160cm 이상자 공개 모집에 지원했는데, 반듯하면서도 팽팽하게 위로 올리는 게 마음처럼 쉽지 않다. 회의 일정으로 오지 못한 ‘160 이상’인 시그네틱스분회 윤민례 분회장의 공백이 느껴진다. 잠시 후 도착한 정혜경 씨가 현수막 전체 높이를 업그레이드 해준다. 다른 조합원들도 번갈아 현수막을 당겨보고 매듭을 확인한다. 후문에 ‘우리는 시그네틱스 파주공장에서 일하고 싶다!’ 현수막 거는 일도 잊지 않는다. 

현수막을 팽팽하게 잡아당기고 매듭을 짓고 끄르는 손놀림에서 23년 투쟁의 결기와 간절함이 느껴진다. 많지 않은 인원으로 한 달에 몇 차례 하는 선전전이지만, 대충 준비하는 걸 보지 못했다. 하도 잡아당겨 해어진 현수막 귀퉁이에는 천을 덧댄 자욱이 있다. 시그네틱스분회 남옥연 사무국장이 집에서 해어진 귀퉁이마다 두꺼운 천을 덧대어 재봉틀로 바느질을 해온 거다. 

조합원들이 현수막 사이 그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선전전을 시작한다. 스피커가 없어 투쟁 내용을 알리는 선전방송은 생략한다. ‘내가 세운 파주공장에서 일하고 싶다’ ‘노조혐오 불안정한 일자리로 생존권 위협하는 영풍자본 규탄’ 문구가 적혀있는, 조합원들이 입고 있는 몸자보가 선전전 피켓이다. 

"여름에는 그늘 따라 움직이고, 겨울에는 햇빛 따라 움직여."

2시간 가까이 노상에 있는 게 만만치 않은 30도를 웃도는 날씨다. 조합원들이 가방에서 삶은 감자와 계란을 꺼내놓는다. 임은옥 조합원이 갖고 있던 쿠폰으로 커피를 사다 주자 거리 농성장은 노천카페로 변신한다. 

노동조합 일정과 동료들의 근황부터 채소 가격, 요리, 가족·시댁 식구, 아파트 공사 하자 문제까지 한 가지 이야기가 가지에 가치를 치며 내용과 시간을 넘나드는 다양한 이야기가 쉴 새 없이 오고 간다. 영풍 본사 앞을 오가는 사람들은 무슨 일인지 궁금해 고개를 빼고 쳐다보며 지나가는데, 정작 조합원들은 둘러앉아 이야기하기에 바빠 이들에게 관심 가질 여유가 없다.

투쟁 기간과 회사에서 근무한 기간을 합하면 30년 넘는 세월을 함께 해왔는데, 만나기만 하면 뭐 그리 할 말이 많은 걸까. 영풍그룹 앞을 떠나도 온라인 소통공간에서 또 이야기하고, 수시로 통화도 하겠지. 23년 투쟁이 가능했던 이유 중 하나일 거다. 띄엄띄엄 멀찍이 떨어져 앉아 각자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는 관계였다면, 오늘의 이 투쟁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외로울 때면 생각하세요 아름다운 이 거리를 생각하세요

잊을 수 없는 옛날을 찾아 나 이렇게 불빛 속을 헤맨답니다

오고 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나도 몰래 발길이 멈추는 것은

지울 수가 없었던 우리들의 모습을 가슴에 남겨둔 까닭이겠죠

아아아 아아아 이 거리를 생각하세요 

영풍그룹 본사 앞에 현수막을 설치하고 있는 시그네틱스분회 조합원들. 출처: 연정

은행에 은행을 풀다

겨울에는 점심시간에도 빌딩 사이로 사납게 휘몰아치는 바람 때문에 추웠던 기억이 나는데, 여름이 되니 그늘이 있어 좋다. 인도에 있는 나무들이 큰 일을 한다. 

"예전에는 은행나무가 있었는데, 가을에 냄새가 나서 안 좋았어. 새로 심은 느티나무는 최고야. 빨리 자라고 가지도 잘 만들잖아."

"산업은행 버스정류장 인도에 은행나무가 노랗게 쫙 깔린데 있잖아. 거기 가을이면 아주 똥밭 수준이었어." 

"우리가 그걸 주워다가 산업은행에 가서 풀었어요. 똥냄새 나라고."

"그것만 했나? 돌아가면서 통장 만들고 10원 입금하고 10원 찾고 10원 입금하고 또 10원 찾고."

"넣고 빼고 법적으로 한도는 없었으니까 계속 하는 거지. 여름에는 은행이 시원하잖아. 시원한 물도 마실 수가 있고." 

"그것만 했나? 소파에 쫙 앉아가지고 오징어 씹어먹고. 꾸리꾸리한 냄새 나거든."

느티나무 이야기가 가지에 가지를 쳐서 20여 년 전 산업은행 투쟁 이야기로 이어진다. 업무방해죄 공소시효는 7년, 이제는 마음껏 말할 수 있다.   

산업은행은 시그네틱스 워크아웃 당시 최대 채권자였다. 다른 채권자들을 설득해서 영풍이 시그네틱스를 인수할 수 있게 한 게 산업은행이었다. 산업은행은 영풍이 산업은행에서 빌린 1000억 원을 아직 갚지 않았는데도 연간 41억 원의 이자를 탕감해 주었다. 안산공장을 지을 자금을 대출해준 것도, ‘무노조’ 노사관을 갖고 있는 삼성전자 출신 양수제 대표를 불러들인 것도 산업은행이었다. (박일환, 위의 책)

"산업은행은 국책은행이고 국민들 세금으로 운영하는 거잖아요. 시그네틱스가 어려웠던 시절에 노동자들의 고통분담과 국책은행의 도움으로 워크아웃 조기졸업을 했는데, 그 노동자들을 다 정리해고 했어요. 국민들 세금이 허투루 쓰이지 않게 산업은행이 자금을 대준 사업장 문제에 관리감독 책임을 다하라는 요구를 한 겁니다. 우리가 자료도 엄청 갖다줬어요." (정혜경, 당시 시그네틱스지회 지회장) 

노동조합은 산업은행이 특정 기업에 특혜를 베풀고 관리를 부실하게 한 데서 지금과 같은 사태가 발생했으니, 이에 책임지고 해결의 주체로 나설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대주주인 영풍, 시그네틱스, 산업은행, 노조 4자 면담을 통한 문제 해결을 제안했다. (박일환, 위의 책)

하지만, 산업은행은 문제 해결은 커녕 면담 요구에도 응하지 않았다. 권한도 없는 직원들을 내보내 형식적인 만남을 가진 게 전부다. 산업은행은 면담을 요구하는 시그네틱스 노동자들을 막고 사진 채증하는 데에만 열을 올렸다. 심지어, 채증에 항의하는 조합원들에게 채증 사진을 돌려주겠다며 은행 로비에서 기다리게 한 다음 경찰을 불러 건조물 무단침입으로 25명 조합원이 연행당하게도 했다. 구로경찰서 알몸수색으로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한 게 이때다. (2002년. 박일환, 위의 책) 산업은행은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비웃듯이 노동자들의 투쟁 소음에 대해 사죄한다는 내용의 공문을 발송하고, 이들을 대상으로 영화 <집으로>를 상영하기도 했다.(”산은, 사과의 영화시사회 ‘집으로’, <머니투데이>, 2002.05.02.) 2001년 늦여름에 시작한 시그네틱스 노동자들의 산업은행 첫 번째 압박투쟁은, 2002년 6월 64명 조합원 집단단식 농성(명동성당과 여의도 노사정위원회)이 시작되면서 일단락된다. 

6월 27일, 영풍그룹 본사 앞에서 선전전을 하고 있는 시그네틱스분회 조합원들. 출처: 연정

대우자동차도 못뚫은 산업은행 정문 뚫어 

회사를 살린 노동자들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정리해고한 시그네틱스는 2003년 1월 또다시 위기에 처해 법원에 화의 신청을 한다. 그즈음 28명의 조합원이 중노위 복직 판정으로 안산공장으로 출근을 시작했고, 5월 노동조합은 생계 나간 조합원들을 다시 불러들였다. 노동조합은 산업은행 측에 부실자금 대출로 시그네틱스 경영을 악화시킨 책임을 묻고 정리해고한 시그네틱스에 추가대출을 해주지 말라는 요구를 하며, 삭발식을 시작으로 여의도산업은행 본사 앞 노숙농성에 들어갔다. 노동자들은 출력한 임원 사진을 코팅해서 들고 출입문 4개를 2인 1조로 지켰다. 

"산업은행 임원들이 출퇴근 때마다 007 작전을 펼치더라고요. 우리가 고급 차만 검문을 했더니, 임원들이 주변 다른 데서 직원들을 만나 티코 같은 소형차로 갈아타고 들어오는 거예요. 어느 날 우리가 돗자리 펴고 앉아 있는데, 서너 명이 몰려나와요. 느낌이 이윤우 부총재 같은 거예요. 내가 '이윤우 부총재님!" 불렀더니 돌아봐요. 더우니까 신발을 벗고 있었는데, 그냥 맨발로 뛰어갔죠. 제가 달리기를 쪼깐 하거든요. 거의 잡을 뻔했는데, 부총재를 향해 손을 뻗는 순간 경비가 나를 확 밀어 버린 거예요." 

윤민례 씨(당시 시그네틱스지회 사무국장)는 2003년 당시 산업은행 시그네틱스 담당이었던 이윤우 부총재 면담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산업은행 측의 폭력으로 전치 4주의 부상을 입었다. 

"창구 직원으로서는 괴로웠을 거야. 지금 생각하면 솔직히 업무방해 맞아. 내가 은행 직원이었다면 정말 진상이었던 거지."

"그때만 해도 그런 게 통했는데, 지금 같으면 바로 업무방해로 고소했겠지."

"그때는 지금처럼 보이스피싱 때문에 긴장 걸리지 않을 때여가지고 계좌 개설도 가능했던 거지. 일반인이 산업은행 갈 일이 뭐 있겠어?"

"지금은 기자가 먼저 와서 찍어가." 

"우리는 정당한데, 개인으로서의 직원은 힘들었을 거야. 잘못은 산업은행 우두머리가 한 건데, 종일 그거 한다고 생각하면..." 

"민원을 넣을 때, 최대한 우두머리를 괴롭히는 걸 고민해야지. 사실은 그 사람도 을이잖아. 공무원이라면 공무원노조 조합원일 수도 있고. 자칫하면..."

"누군가의 동료이고 이웃일 수도 있는 거지. 카드도 그렇고 우리 조합원들도 이러저러하게 알바들도 해보고 그랬잖아."

"전에 잠깐 고객 전화를 받는 콜센터 같은 회사에 취직을 했었는데, 벨소리만 들리면 가슴이 쿵쾅쿵쾅 하는 거야. 집에서도 전화벨만 울리면 깜짝깜짝 놀라요. 도저히 못 하겠더라고."

"우리 조합원으로서는 나름대로 굉장히 평화적으로 한 거였는데...”"

"야야야.. 생각만 해도 피곤하다. 검찰 가서 다 조사받았어. 내가 잡혀가니까, 기억도 잘 안 나는데 하여튼 경찰서 여러 군데서 쫓아왔었어."

정혜경 당시 지회장이 생각도 하기 싫다는 듯이 어깨를 바르르 떤다. 강산이 두 번 바뀐다는 세월이 흘러 지금은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고 나름의 ‘자기성찰’도 할 수 있지만, 그땐 그럴 수 없었다. 누군가가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고만 해도 참을 수 없었다. ‘용역 250명과 맞짱을 뜬’ 분노와 결기가 가득한, 말 그대로 서슬이 퍼렇던 시절이었다. 그즈음 시그네틱스뿐만 아니라 1750명이 정리해고되었던 대우자동차 노동자들도 산업은행 앞에서 투쟁했었다.    

“대우자동차 투쟁할 때 우리도 같이 했어요. 그 남성 노동자 분들은 산업은행 정문을 뚫지 못했는데, 우리는 정문을 뚫었어. 현관 유리문이 박살났어요. 그 책임도 우리가 다 받았지 뭐.” (정혜경, 당시 시그네틱스지회 지회장) 

시그네틱스분회 조합원들이 영풍그룹 본사 후문 앞에 걸어놓은 현수막. 출처: 연정

손가락이 꺾일지언정 잡은 멱살은 놓지 않는다

“그땐 누가 말 시키면 울었어. 분노 배신감... 복잡다단한 그런 감정 때문에 나도 모르게 막 눈물이 나오고 그랬죠. 누가 건들기만 하면 그냥 득달 같이 와르르 달려들었을 때야. 옷 찢는 건 일도 아니었어. 우리가 파주 본사 투쟁할 때도 그렇고, 손가락이 꺾일지언정 잡은 멱살을 놓지 않았어요. ‘우리가 그렇게 고통분담하면서 인내해서 회사를 살렸는데, 이건 아니지 않아?’ 이런 거죠. 저도 그랬지만, 조합원들이 분기탱천해가지고 통제가 안 되니까 간부들이 말릴 지경이었어요. 조합원들이 얼마나 억세게 투쟁을 했는지, 산업은행이 출입구를 다 막으니까 어디 통로를 찾아 가지고 수입 대리석 화장실 벽에 낙서도 했더라고. 그것도 책임을 물어 다 받았지.” (정혜경, 당시 시그네틱스지회 지회장) 

2001년 말부터 2002년 봄, 구속된 정혜경 지회장과 윤민례 분회장이 그간의 각종 투쟁에 대한 조사와 처벌을 받았다.

시그네틱스는 2003년 6월 화의 개시 결정을 받고, 노동자들의 요구를 외면한 산업은행의 지원을 받아 화의 조기졸업(2007년)에 성공한다. 시그네틱스 파주공장은 천 명의 2차 하청업체 노동자들로 채워지고, 시그네틱스를 살리고 지켰던 해고노동자들은 여전히 거리에 남았다. 2007년 대법원 판결로 64명의 조합원이 안산공장으로 출근을 했고, 29명은 패소하여 ‘1차 해고자’라는 이름으로 긴 투쟁을 해왔다. 그간 ‘희로애락’이라는 말로 충분히 설명하기도 어려운 많은 일이 있었다. 3명의 조합원이 세상을 떠났고, 아픈 몸과 힘겨운 생계를 추스르고 투쟁을 하기도 하고 떠나가기도 했다. 작년까지 조합원이 15명이었던 시그네틱스분회는 투쟁기금이 바닥나면서 최근 조합비를 인상했고, 그 과정에서 3명이 노동조합을 탈퇴한다. 남은 12명도 생계문제 등으로 전원 다 투쟁에 참여하지 못하고, 남옥연·윤민례·임은옥·정혜경·차은희 씨 5명의 조합원이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20여 년 전 그 ‘역전의 투사들’은 그 시절 그 투쟁의 거리를 가끔은 기억할까?

눈이 내리면 행복했었죠 차가운 손 호호 불며 우린 걸었죠

명동성당에 종이 울리면 두 마음은 젖어가고 꿈이 있었죠

둘이 걷던 그 길목엔 그대는 없고 늘 다니던 찻집에도 그대는 없어

눈물 어린 발자욱 여기 남겨두는 건 그대를 부르는 나의 목소리

아아아 아아아 이 거리를 생각하세요

- <이 거리를 생각하세요>, 박건호 글·오동식 곡·장은아 노래

덧붙이는 말

연정은 르포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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