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1일, 스태튼 아일랜드 시설에서 아마존 노동조합(ALU)이 전례 없는 승리를 거둔 이후, 미국 노동운동에 대한 논의가 급변했다.
ALU는 조합원 투표에서 아마존을 이겼다. 아마존을 상대로 한 성공 사례는 거의 없었다. 타겟(Target), 구글(Google),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 페이스북(Facebook), 우버(Uber), 월마트(Walmart)와 같은 21세기 경제의 상징적인 기업들을 상대로 한 노동조합 조직화가 성공한 사례는 거의 없었다. 따라서 이 사건은 매우 주목받았다.
많은 사람을 놀라게 한 사실은 ALU가 자원이 거의 없는 독립 노조라는 점이었다. ALU가 선거에서 승리할 가능성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고도로 중앙집권화된 노동조합이 21세기 경제의 거물들을 상대로 승리한 사례는 거의 없다. 그래서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
스타벅스 노동조합 조직화의 부상도 낙관적인 분위기에 큰 영향을 미쳤다. 스타벅스의 노동조합 조직화는 명목상 독립적이지만 국제서비스노동조합(SEIU)의 지원을 받고 있다. 현재 스타벅스 노동자 연합은 278개 매장을 조직했지만, 스타벅스 수장인 하워드 슐츠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해 조직화 속도가 느려지고 있다. 갑자기 노동자 주도의 독립적이고 풀뿌리적인 노동조합의 새로운 시대가 도래한 것처럼 보였다.
ALU가 고펀드미(GoFundMe) 모금과 후원 지역 행사를 통해 조직을 스스로 구축한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고액 연봉을 받는 노조 변호사, 외부 조직가, 중앙에서 계획된 전략은 어디로 갔을까? 물론 최근 몇 년 동안 많은 승리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요소들은 여전히 필요해 보였다.
첫 승리 후, 많은 노동평론가들이 독립 노조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노조주의의 선구자라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예를 들어, 2022년 4월 7일 자 뉴욕타임스에 실린 노암 샤이버(Noam Scheiber)의 ALU 승리에 관한 기사를 보라. 이 기사는 여러 노동 지식인, 작가, 활동가들을 인용하여 분권화된 노조가 미래가 아니라 현재라고 말하며, 기성 노조의 실패를 비판하고 독립 모델로의 전환을 촉구했다. 루스 밀크먼(Ruth Milkman) 교수는 ALU를 미국농업노동자노동조합(UFW,1962년 세자르 차베스와 돌로레스 우에스타가 만든 노동조합) 및 플린트 싯다운 파업(Flint Sit-Down Strike, 1936년 12월부터 44일간 있었던 GM 노동자들의 파업)에 비유했다.
ALU의 승리 후 몇 달이 지나면서 초기 낙관론이 무너졌다. 첫 승리 직후, ALU는 스태튼 아일랜드의 두 번째 시설에서 완패했다. 알바니의 아마존 시설 선거에서는 교섭 단위의 20% 미만이 ALU에 투표했고, 전체 투표에서는 2:1로 패배했다. 일부 기존 ALU 조직원들이 크리스 스몰스(Chris Smalls) 위원장에 대한 충성도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노조에서 쫓겨났다는 소문도 있다. 스태튼 아일랜드 시설에서 아마존은 노조와의 협상을 거부했지만, 이는 스몰스의 잘못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스몰스를 만나려면 노동 노트(Labor Notes) 컨퍼런스나 뉴욕에서 열리는 다양한 노동 행사, 또는 그의 강연이 있는 전국의 파업 현장에 가보면 된다. 그는 작년에 전국에서 열린 수십 개의 노동 행사에 출연했다. 스몰스를 찾아보기 힘든 곳은 ALU를 조직하는 곳이다. 첫 선거의 여파는 ALU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이 독립 노조의 단 한 번의 승리가 노동 운동의 변화를 의미할 수도 있고, 미국 노동조합 역사에서 한순간에 사라질 수도 있다.
ALU의 승리 이후 나타난 낙관주의의 문제
미국 노동법하에서 조직화의 현실은 승리하기 어렵다. 여기서 내가 우려하는 것은 ALU 그 자체가 아니라, 독립 노조의 길이 기성 노조보다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이다. 노동운동 지식인들이 이 선거를 노동운동의 미래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우려된다.
이제 독립 노조의 생존 가능성에 대해 진지한 대화를 나눌 때다. 나는 두 가지를 제외하고는 특별한 의제가 없다. 첫째, 노동자가 승리하는 데 도움이 될 최고의 아이디어를 홍보하고 싶다. 둘째, 노동운동 지식인들이 고립된 단일 승리를 노동운동의 미래라고 선언하는 것을 중단하기를 바란다. 독립적이든 아니든, 중앙 조직이든 아나키스트가 운영하든, 나는 오직 노조가 승리하기를 원한다.
한 세기 넘게 독립노조주의(independent unionism)는 미국 좌파의 흐름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이 역사는 오늘날 노동운동과 좌파 사이에서 독립 노조의 지위를 고찰하도록 한다. 독립노조주의가 계속되는 것은 ALU의 승리보다 독립노조주의의 생존 가능성을 알려준다.
출처 : Unsplash, Manny Becerra
독립노조주의의 오랜 매력
독립 노조는 기존 노조 외부에서 조직된 노조를 의미한다. 이는 세계산업노동조합(IWW)처럼 규모가 크고 오래 지속된 조직일 수도 있고, 미국 역사에서 단명했던 노동조합일 수도 있다. 독립 노조의 정신은 기성 노조에도 존재한다. 이 글에서는 독립 노조의 실제 형태와 정신을 시대적으로 살펴보겠다.
독립 노조를 노조 민주화 노력과 함께 살펴봐야 하는 이유는 특정 시기에는 독립 노조의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득권층에 도전하는 노조 민주화 노력 속에서 대안을 찾기 위해 산업별조직위원회(CIO, Committee for Industrial Organization)를 만드는 노력이 있었다.
1886년 미국노동조합연맹(AFL)이 설립된 후 최초의 중요한 독립 노조는 유진 뎁스(Eugene V. Debs)의 미국 철도 노조(ARU)였다. 1894년 풀만 철도 침대칸 노동조합(Brotherhood of Pullman Sleeping Car Workers)과 연대 파업을 벌인 후 ARU의 급격한 상승과 하락은 잘 기록되어 있다. 철도노조에 대한 뎁스의 경험과 철도노조의 연대 부족이 그를 새로운 모델로 이끌었다. 그의 독립 노조는 철도노조와의 연대 파업을 이끌어내지 못했고, 이후 군사적 탄압으로 인해 뎁스는 마르크스주의로 개종하고 자본주의에 대해 완전히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독립 노조를 향한 이 첫 번째 주요 움직임은 AFL식 노조주의의 한계와 성공의 어려움을 보여주었다.
더 오래 지속된 것은 서부 광부 연맹(WFM)이었다. 1893년 아이다호에서 파업이 실패한 후, 지도자들은 서부의 모든 경암 광부들을 조직해야만 의미 있는 성과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WFM을 결성했다. 1894년 콜로라도주 크립플 크릭에서 큰 승리를 거둔 WFM은 10년 동안 안정을 찾았고 광산에서 의미 있는 존재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1897년 콜로라도 민병대의 저항으로 더 이상 확산되지 못했고, 1903년 콜로라도 주지사는 계엄령을 선포하여 노동조합을 파괴했다.
WFM의 패배 이후, 빅 빌 헤이우드(Big Bill Haywood)를 비롯한 지도부는 미국 노동계급 전체에 조직화를 촉구했다. WFM은 1905년 IWW(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의 설립을 지원하게 되었다. IWW와의 정치적 분쟁으로 WFM은 곧 다른 방향으로 전환했다. WFM은 1950년대까지 서부 광산에서 국제 광산, 제철소 및 제련소 노동자 연합으로 활동을 이어갔고, 1967년 미국 철강노동자 연합과 통합되었다.
IWW에 소속된 노동자들이 진정으로 '독립적'이었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나는 두 가지 이유로 "그렇다"고 주장한다. 첫째, 대부분의 노동자에게 IWW 가입은 생활 방식이나 노동 조건이 아니라 연대에 뿌리를 둔 독립적인 행동이었다. 둘째, AFL 지도부는 IWW를 실존적 위협으로 보고 이를 분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IWW는 AFL의 방식과 정치, 그 부재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의 느슨한 연합이었다.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신디칼리스트, 이민자, 원주민 노동자들이 연대하여 조직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인종 차별과 차별에 맞서 싸우며 계급을 전 세계 노동자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정체성으로 여겼다.
IWW는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AFL식 기업별 노조주의를 지양했다. 투쟁의 원칙은 노조 사무실이 아니라 생산 현장에서 이루어졌다. 오늘날 활동가들에게 IWW의 많은 부분이 매력적이다. IWW는 노조 관료주의보다 지역 리더십에 중점을 두었다. 현대 좌파 문화에 영감을 주는 문화 제작물을 만들었다. 경찰의 폭력, 제국주의, 기후 변화, 인종 자본주의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에게 IWW는 AFL보다 더 관련성이 있다. 오늘날 주류 노동운동이 이러한 문제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풀뿌리 노조주의 운동을 보여줬던 IWW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 짧은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좌파에게 중요하다. 1930년대의 CIO 노조 성장 물결에는 독립노조주의가 들어설 여지가 거의 없었다. 1920년대 노조의 실패와 공산당의 이념적 경직성으로 CIO와 지도부는 독립 노조 모델에 관심이 거의 없었다. 일부 좌파 CIO 노조에는 민주적 노조주의가 존재했지만, 대다수의 노조는 중앙집권적 리더십을 선호했다. 민주적 노조주의는 전기, 라디오 및 기계 노동자 연합(일반적으로 UE로 알려짐)과 같은 일부 좌파가 CIO 노조에 존재했지만 자동차 노동자 연합(UAW), 광산 노동자 연합, 철강 노동자 연합 등에서는 1950년대 이후 노동조합 민주주의가 거의 없었다. 이는 관료와 전문가, 그리고 최고위층의 리더십을 바탕으로 한 대중운동의 시대였다. 이후 30년 동안 노동조합 운동은 독립적인 파업이 아닌 UAW의 월터 로이터(Walter Reuther)와 같은 지도력으로 상징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노동자들이 독립을 표명한 무모한 파업을 했을 때 노조 지도부는 루즈벨트(Roosevelt) 행정부와 긴밀히 협력해 그들을 탄압했다.
이는 자유주의자들과 좌파 모두에게 제도화 시대의 정점이었다. 민주당은 뉴딜(New Deal) 국가의 일부로서 전문성을 수용했다. 토양 관리자부터 전기 전문가까지, 비록 노조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미국 통치의 일부로 받아들여진다 하더라도 국가의 미래에 대한 결정을 내릴 사람은 노조 회원이 아닌 흰 실험복을 입은 사람들이었다. 더욱이 공산당의 성공은 대부분의 좌파들에게 성공적인 혁명을 창출한 중앙집권 모델을 보여주었다.
간단히 말해서, 그 중앙집권적인 세대는 오직 큰 조직만이 노동계급의 수준을 높일 수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었다. 소규모 민주주의는 중앙집권적 리더십이 제공할 수 있는 것을 방해할 뿐이었다. 노동운동 내에서 CIO는 당시 대부분의 노동조합원들에게 하향식 모델을 제공했다. 다양한 CIO 국제 인사들이 민주주의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있었으나, 최고위층에 있는 존 L. 루이스(John L. Lewis)는 연맹이나 미국 광산 노동자 연합(UMWA)에서 그런 일을 할 시간이 없었다.
독립노조주의의 어려움
1920년대와 1930년대의 독립 노조는 곧 기존 노조에 합류하거나 사라졌다. 이에 대한 한 가지 예는 미네소타주 오스틴(Austin)에 있는 호멜(Hormel) 육류 공장에서 발생했다. 그곳에서 전직 Wobblies(IWW 조합원들을 부르는 별칭)는 독립 노동자 연합(IUAW)을 창설했고, 이 연합은 1933년 조기 점거 파업에 참여했다. 그들은 승리하여 호멜이 계약에 서명하도록 했다. 1937년까지 IUAW는 미네소타, 노스다코타(North Dakota), 위스콘신(Wisconsin), 아이오와(Iowa), 사우스다코타(South Dakota)에서 공장을 조직했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에 이르러 독립 노조는 내분과 우익의 폭력으로 인해 해체되었다. 대부분의 현지인들은 IUAW가 제공하지 못한 안정성과 자원을 제공하는 훨씬 더 큰 CIO 산하 노동조합인 미국 포장노동자 연합(United Packinghouse Workers of America)에 가입했다. 아마도 놀랍지 않게도 이 지역은 독립적인 행보를 유지하여 1980년대에 악명 높은 P-9 파업에서 자국의 국제 단체인 현재 식품 및 상업 노동자 연합(United Food and Commercial Workers)에 저항했다. 1980년대에는 더 큰 국제 노조에 가입했다.
20세기 중반에는 독립적인 노조가 거의 발전하지 못했다. 노조의 중앙집권적 관료주의에 도전하는 풀뿌리 저항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제도화된 노조 운동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정부에 대한 환멸이 커지면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뉴딜 정책 입안자들은 환경 위기를 초래하는 데 일조했고, 민주당은 뉴딜 국가의 일부로 전문성을 포용했다. 그러나 노동계 지도자들은 정의를 위한 선봉대가 아니라 전쟁을 지지하는 관료들이었다. 1972년 조지 맥거번을 물리치기 위한 조지 미니(George Meany)의 캠페인과 반 베트남 시위대에 맞서 뉴욕 건설업자들이 주도한 하드햇 폭동(Hard-Hat Riots)은 한 세대 동안 많은 신좌파에 독이 되었다.
노동 운동 내에서 제도적 노조주의가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1960년대의 시위는 대부분 독립성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조직화를 촉진하지 못했다. 오히려 노조 민주주의가 개혁의 구호가 되었다. 특히 토니 보일(Tony Boyle)이 도전자였던 조크 얄본스키(Jock Yalbonski)를 살해한 후 노동자들이 부패한 지도부에 맞서 조직을 결성한 UMWA에서 가장 그러했다. 보일은 감옥에서 사망했고 UMWA는 직접 민주주의의 시기를 거치며 노조의 문화를 변화시켰다. 1972년 오하이오주 로드스타운 제너럴모터스(GM) 공장의 노동자들은 자동화로 인한 일자리 감소와 공장 현장의 열악한 노동환경에 대한 GM과 전미자동차노조(UAW)의 무관심에 맞서 파업을 벌였다. 민주 노조를 위한 팀스터(Teamsters)가 기존 지도부에 도전하기 위해 일어서는 것을 목격했다.
독립적인 노조 운동이 부상한 것은 세자르 차베스와 UFW 운동의 등장이었다. 차베스는 UFW에 민주주의를 거의 허용하지 않고 점차 자신에게 권력을 집중시키려고 했지만, 기성 노조에 대한 불신과 단식 투쟁을 통해 도덕적 우위를 점했다. 그는 전국적으로 포도 불매 운동을 전개했다. 이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그를 좌파의 영웅으로 자리잡게 했다. 이는 노동조합을 바꾸려는 시도였으며, 관료적 노조 사무실에서 멀리 떨어진 현장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많은 좌파들의 마음 속에 부패한 노동조합의 전형인 United Brotherhood of Teamsters가 농장주들과 협력하여 농장 노동자들을 탄압하고 UFW 자원봉사자들을 구타했다는 사실은 매우 다른 노동조합 모델의 필요성을 더욱 강화시켰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의 급진주의는 1970년대 후반에 사라졌지만, 비중앙집권적 운동의 영향력은 강력하게 남아 있었다. 반핵 캠페인과 같은 새로운 운동은 풀뿌리, 자원봉사자 중심의 새로운 모델을 채택했다. 이 운동에서 형성된 단체들은 지역화된 형태로 유지되거나, 그린피스처럼 대규모 조직으로 성장했다.
1980년대 급진적 환경주의의 성장은 반제도주의에 힘을 실어주었다. 시에라클럽과 야생보호협회(Wilderness Society) 같은 환경단체들은 '빅 그린(Big Green)' 조직이 레이건 행정부의 반환경 조치에 맞서 법정에서 자금을 모금하는 동안 급진 활동가들은 이들 조직이 무너졌다고 비난했다. 'EarthFirst!’는 주류 환경보호주의에 반발하는 단체 중 가장 유명해졌다. 이들은 종종 나무에 스파이크를 박거나 벌목 장비 앞에 누워 농성을 벌였다. 지구해방전선(Earth Liberation Front)과 같은 더 급진적 단체들은 목재 공장과 스키 리조트를 불태우기도 했다. 이러한 행동은 1970년대 노동-환경주의 동맹에 균열을 가져왔다.
이 그룹은 공개적으로 아나키즘을 표방했다. 이념은 종종 반쪽짜리였고 행동은 산발적이었지만, 좌파의 제도를 불신하는 젊은이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 아나키스트 핵심은 1999년 시애틀 세계무역기구(WTO) 시위에 참여하면서 노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아나키스트들은 시위에 참여한 제도권 노조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시애틀의 기업 자산에 대한 직접 행동은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이 신중하게 연합을 구축한 것과 맞지 않았다. 유리창 깨기에 대한 경찰의 폭력적인 대응에 대해 조직된 노동계의 대응은 노조에 따라 달랐지만, 아나키스트들에게는 이것이 자본주의에 대한 실질적인 공격이라 생각했다.
이 젊은 활동가들 중 상당수는 유니온 서머(Union Summer)와 조직화 연구소(Organizing Institute)의 활동을 통해 노동운동에 참여했다. 이들은 자신의 이념을 관철시키고 노동조합의 간부가 되었다. 그러나 낡은 노조 지도부에 대한 의심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것이 반드시 노조 운동의 변화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비판은 날카로워졌다.
월가를 점령하라(OWS, Occupy Wall Street) 시위에서 ‘빅 유니온’에 대한 의혹이 드러났다. OWS가 소득 불평등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자 노조가 시위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OWS 시위대는 노조가 시위를 조직화할 것이라고 두려워했다. 이는 중앙집권에 대한 의혹과 제도적 통제에 대한 두려움이 운동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기존 노동운동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
많은 새로운 노조 운동이 독립적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성공하더라도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압도적으로 많은 자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테네시 대학교의 연합 캠퍼스 노동자(UCW, United Campus Workers)는 몇 년간 독립성을 유지했지만, 결국 미국 커뮤니케이션 노동자연합(CWA, Communications Workers of America)에 가입했다. UCW-CWA는 일상적인 독립성을 유지하면서도 대규모 조직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준독립 모델은 대규모 노조가 제공할 수 있는 자원을 일부라도 이용할 수 있어 필요하다.
ALU가 지속되려면 더 확고한 노조와 제휴해야 할 것이다. 아마존과 같은 거대 기업을 상대로 살아남으려면 막대한 자원이 필요하다. ALU의 승리로 '조합원 주도형 노조주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지만, 거의 모든 노조 캠페인은 조합원 주도로 이루어진다. 국제 노조는 수년간의 조직화 경험을 바탕으로 조언을 제공한다. 때로는 그 조언이 도움이 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지만, 조합원을 약화시키는 적대적 조직이 아니다. ALU와 모든 독립 노조는 법률 전문 지식, 자원봉사자의 활동을 강화하기 위해 자금, 정치 로비 및 입법 전문 지식이 필요하다. 독립 노조가 대규모 국제 노조와의 제휴 없이 이러한 수준의 자원을 모으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기존 노조와의 제휴는 독립 노조 조직화의 자연스러운 궤적이다. ALU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 독립 노조에 대한 열기는 식지 않을 것이다. 미조직 노동자들이 새로운 자율 조직을 만드는 대신 AFL-CIO 기성 노조를 선택하게 하려면 기존 노동운동이 방향을 바꿔야 한다. 지구의 이익을 전면에 내세우고, 경찰의 폭력에 항의하고, 조직화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고, 구조적 불평등에 맞서기 위한 과감한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결국 독립적 노조주의에 대한 강조는 기성 노동운동이 시대에 부응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출처] Independent Unions: The Allure of a Failing Strategy
[번역] 참세상 번역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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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루미스(Erik Loomis) 는 로드아일랜드대학교 역사학 교수이며, A History of America in Ten Strikes (The New Press, 2018)의 저자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