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충격: 1920년대 달러 지배와 현대 통화 거시경제학

헤게모니 노트 05

나는 이 '헤게모니 노트시리즈에서 20세기 세계 질서의 문제즉 헤게모니의 문제를 중세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깊은 역사적 순서의 일부로 보는 것은 오해라고 주장해 왔다대신이 문제가 제국 간 경쟁과 폭력의 폭발로 처음 제기된 새로운 문제였으며, 1918년 이후 새로운 유형의 강대국 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투쟁의 결과였다고 주장한다.

이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영향권 및 채권자 카르텔 형태로 동아시아 및 중국의 주요 무대에서 제국주의 경쟁을 관리하려는 명시적 노력

군비 통제 - 1921/22년 워싱턴 해군 조약

새로운 국제기구특히 국제연맹과 그 위임 체제특히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글로벌 금융 분야다.

이전 글에서 주장한 바와 같이글로벌 금융 분야에서 이러한 노력은 핵심 강대국 그룹 내에서 정치적 부채와 배상 문제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이 문제는 미국을 향한 동맹국들의 부채에서 시작되었다그러나 이번 글에서는 이러한 논의가 단순한 부채 문제를 넘어 통화 질서의 근본까지 확장되었음을 주장하고자 한다새로운 강대국 관계는 부채 문제뿐만 아니라거시경제 관리라는 완전히 새로운 영역에서도 공식화되었다이러한 관계는 통화 정책환율인플레이션중앙은행 간의 협력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1920년대에는 국제 금융 문제국제 수지 문제와 함께 통화 및 인플레이션 문제가 통화 거시경제학의 새로운 지적 영역을 구성했다1차 세계대전 직후 처음으로 거시경제학이라는 틀 안에서 전 세계 경제가 수량 이론과 구매력 평가 정리라는 두 가지 간단한 개념적 틀을 중심으로 파악되기 시작했다세계 경제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통합 이해를 배경으로 미국의 힘에 대한 문제는 새로운 종류의 관리되고필연적으로 정치적인 통화 시스템을 가장 잘 설계하는 방법에 대한 질문으로 개념화되었다.

미국의 패권 문제와 거시경제학이 지식의 한 분야로 부상한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마셜 플랜 시대에 대한 찰리 마이어의 영향력 있는 에세이에 이어 1940년대 고전적인 형태의 미국 헤게모니의 부상을 생산주의 담론 및 성장주의 거시경제학과 연관시키는 것은 흔한 일이다다른 사람들은 전간기에 글로벌 포디즘의 중요성에 대한 주장을 펼쳤는데이 주제는 다시 다룰 예정이다.

나는 거시경제학이 20세기 미국 권력의 중요한 지적 프레임이었다는 데 동의한다하지만 최초의 프레임은 1940년대나 포드주의의 프레임이 아니었다미국의 글로벌 파워에 대한 최초의 거시경제학적 프레임은 1918년 직후 부채 문제와 인플레이션 및 환율 문제를 둘러싸고 형성되었다.


거시경제학은 미시경제학과 달리 경제 시스템 전체를 연구하는 학문이다거시경제학은 흔히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와 1936년에 출간된 그의 일반이론’(General Theory)의 획기적인 이론과 연관된다그러나 일반이론 중심의 현대 경제 지식 역사는 거시경제학의 핵심 주제주요 장소주요 인물 및 출현 연대를 잘못 파악하고 있다.

현대 거시경제학의 기원은 1930년대 실업률을 둘러싼 논쟁에서 찾을 수 없다데이비드 레이들러(David Laidler)가 그의 고전적 연구인 양적 이론의 황금기에서 주장한 것처럼현대 거시경제학은 19세기 후반 인플레이션과 화폐에 관한 논쟁에서 등장했다케인스는 이미 제1차 세계대전 양측의 논의에서 중요한 목소리를 냈지만그 자신도 쉽게 인정했듯이 금본위제의 정신적현실적 족쇄에서 경제학을 해방시키려는 수많은 사상가 중 한 명에 불과했다.

19세기 후반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 1세대 거시경제학자들의 공통된 관심사는 총물가 수준의 변동을 통화 질서의 함수로서 설명하는 것이었다.

가격은 본질적으로 관계적 개념이기 때문에 총 가격 수준즉 '모든 것의 가격'은 분명한 의미를 갖지 않는다식료품 가격이나 에너지 가격 등 특정 가격의 하락 또는 상승은 일반적인 인플레이션이나 디플레이션이 아니다일반적인 인플레이션이나 디플레이션은 변동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상품 및 서비스 가격 이외의 다른 것과 관련해서만 논리적으로 정의할 수 있다그 '다른 것'은 모든 상품과 서비스와 관련된 가치의 단위인 화폐일 수밖에 없다이것이 바로 거시경제적 사고의 기원즉 특정 가격이 아닌 모든 가격의 변동을 화폐의 재고와 실물 경제 활동 사이의 불균형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의 시작이었다.

새로운 거시경제학을 구성하는 중심 이론적 아이디어는 적어도 흄과 1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계보를 가진 화폐의 수량 이론이었지만, 19세기 후반에 영국과 미국의 경제학자특히 알프레드 마셜(Alfred Marshall)과 어빙 피셔(Irving Fisher)에 의해 보다 정밀한 양적대수적 표현이 부여되었다간단히 말해총물가 수준은 유통되는 화폐의 양과 그 유통 속도에 따라 달라진다고 주장했다.

이 이론을 통해 현대 경제학자들은 19세기 후반 국제 금본위제 형성의 첫 번째 영향즉 개별 국가의 통화 선택에 따른 임시적 과정이 화폐를 희소하게 만들고 부채가 많은 생산자특히 농민에게 심각한 피해를 주는 일반적인 디플레이션을 유도했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경제 활동량과 신용 수요에 비해 금으로 제한되는 화폐 공급이 부족해지면서 금으로 뒷받침되는 화폐의 가치는 상승하고 상품 가격은 하락했다전 세계는 디플레이션을 겪었다그러다가 1890년대부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금이 시스템에 넘쳐나면서 그 반대의 결과즉 인플레이션이 점점 더 뚜렷해졌다이러한 가격 변동은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에 비용과 이익을 분배하고 화폐를 정치화하려는 움직임을 촉발시켰다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1890년대 미국의 농업 디플레이션에 반대하는 포퓰리즘 운동(차트북 44 참조)과 1900년대와 1910년대의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산업화된 전 세계에서 일어난 파업의 물결이다.

이러한 용어로 문제를 정의하면 경제학자들은 새로운 역할을 상상할 수 있게 된다급진적으로 출발한 미국인 어빙 피셔는 근본적인 불균형을 보완하고 가격 안정을 유지하여 경제와 사회에 혼란을 주는 화폐 가치의 변화를 막는 적극적 관리 통화를 최초로 주장했다이것은 자의식적으로 행동주의적 교리였다혼란스럽게도 역사적 운명의 기묘한 왜곡으로 인해 피셔의 수량 이론은 1970년대에 케인스주의에 대한 화폐주의자들의 공격과 연관되게 된다이로 인해 20세기 통화주의와 케인스주의가 모두 거시경제 안정에 대한 동일한 관심에서 1900년경에 탄생했다는 사실이 가려졌다차이점은 후기 버전의 케인스주의는 완전 고용을 핵심 변수로 삼았다는 점이다그러나 20세기 초 케인스를 비롯한 케임브리지 학파 경제학자들과 대영제국의 다른 경제학자미국의 피셔 추종자들스칸디나비아의 구스타프 카셀(Gustav Cassel)과 독일어권의 조셉 슘페터(Joseph Schumpeter) 등 유럽인들은 모두 수량 이론을 사용하여 경제 안정화 과학으로서 거시경제학이라는 새로운 지적 영역의 윤곽을 공식화했다.


전쟁 전 금본위제 하에서 물가 수준의 변동이 거시경제에 첫 번째 자극을 주었다면, 1차 세계대전의 영향은 훨씬 더 폭력적이고 근본적인 것이었다.

인플레이션과 1차 세계대전을 떠올리면 독일을 떠올리게 된다하지만 사실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전 세계의 가격 체계가 전반적으로 붕괴되었다전시 지출과 막대한 재정 적자의 압박으로 모든 곳에서 물가가 급등했다. 1914년 이후에는 말 그대로 지구상 어디에도 인플레이션에서 벗어난 곳이 없었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다금본위제가 폐기되고 자본과 상품이 더 이상 자유롭게 유통되지 않게 되면서 글로벌 통화 시스템은 한때 '자연스러움'의 기반이 되었던 통일성과 공통의 움직임을 잃었다인플레이션조차 더 이상 균일한 현상이 아니었다.

전쟁 기간 동안 각국의 통화 및 금융 시스템은 경제 및 정치 상황과 전쟁 노력의 급증하는 수요에 따라 관리되었다이러한 붕괴의 표현은 물가가 국가 간에 극도로 불균등하게 상승하여 무역경쟁력 및 구매력 측면에서 큰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통화 및 금융 질서는 '자연스러운질서로서의 정당성을 잃고 정치적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새로운 세계 권력의 중심이었던 미국에서도 헤게모니 노트 4에서 설명한 것처럼전시 동원의 스트레스는 사회적정치적 질서를 무너뜨렸다. 1918년과 1920년 사이에 윌슨의 '새로운 자유프로젝트가 무너지면서 극심한 디플레이션이 시작되었다재정 및 통화 정책의 '정상화'는 사회적정치적 변화에 대한 반동적 반발로 이어졌다.

미국의 디플레이션이 전 세계에 미친 영향은 엄청났고전쟁이 가져온 근본적인 변화를 실감하게 했다.

1914년부터 대영제국과 그 동맹국들의 힘은 미국의 대출 정책에 의해 좌우되었다이제 그들은 1차 대전의 여파를 관리하려는 노력도 미국에 의해 좌우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예산 균형은 의회 전쟁 부채 위원회의 감시 아래 미국 협상가들과 합의할 수 있는 전쟁 부채 협상 조건에 따라 달라졌다하지만 더 시급한 문제는 미국 거시경제 정책의 영향이었다.

1920~1921년 미국의 디플레이션 정책이 전 세계에 미친 영향은 새롭고 극적이었다미국의 재정 정책과 관세는 세계 경제에서 수요를 빨아들이는 동시에 연방준비제도의 사상 첫 금리 인상으로 금과 함께 세계 경제에서 통화 유동성을 빨아들였다그리고 금본위제의 규칙에 따라 정책을 완화하여 막대한 금 유입에 대응하는 대신연준은 계속해서 긴축 정책을 유지했다이로 인해 세계 경제에 디플레이션이 더욱 심화되었다.

가설적으로 나머지 국가들이 연준의 디플레이션 정책에 반대할 수도 있었다하지만 통화 평가절하와 인플레이션 급등의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었다이는 생활 수준을 떨어뜨리고 미국 달러 부채의 국내 비용을 증가시켰을 것이다유리한 부채 계약을 맺거나 월스트리트에서 새로운 대출을 받으려면 미국 정책에 충실해야 했다그 결과 디플레이션이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위의 표에서 볼 수 있듯이 1920년과 1921년 사이에 물가는 폭락했다제국주의 경제의 중심지이자 미국 다음으로 중요한 경제 대국이었던 영국은 1920~1921년에 충격적인 디플레이션에 빠졌다금리가 인상되었다전시 지출이 삭감되었다. "영웅들에게 적합한 집"이라는 약속은 버려졌다물가는 미국의 디플레이션을 쫓아 하락세로 돌아섰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영국에서도 실물 경제에 미친 영향은 극적이었다영국에서 전간기의 비참함은 1929년 월스트리트 붕괴가 아니라 1920년 전후의 큰 충격으로 시작되었다. 1920년 실업자 수는 급증했고 이후 회복되지 않았다.

그 결과 미국에서는 조직된 노동자본정부 및 채권자 간의 힘의 균형이 역전되었다전 세계적으로 전후 파업의 물결은 찰스 마이어(Charles Maier)가 "글로벌 테르미도르(global thermidor)"라고 표현한 대로 깨졌다.

물가가 폭락하고 실업률이 급증하면서 노동자들의 전투성은 약화되었다이탈리아에서는 파시즘의 깃발 아래 무력 진압이 이루어졌다물론분대 단위의 폭력도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최근의 많은 역사학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준군사적 폭력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그러나 무솔리니 정권이 보수적 복원을 위해 실제로 집중했던 것은 거리 싸움이 아니라디플레이션에 대한 집요한 집착이었다.

전 세계적인 디플레이션은 하이퍼인플레이션의 대표 주자였던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에도 영향을 미쳤다. 1920년 2월부터 1921년 5월까지 미국과 영국에서 가장 혹독한 디플레이션이 발생한 시기인 독일의 물가는 25% 하락했다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이로 인해 실업률이 고통스럽게 증가했다영국과 미국과는 달리 바이마르 공화국은 너무 취약한 경제 구조로 인해 인플레이션과 궁극적으로는 초인플레이션으로 치닫게 되었다.

금융 외교관과 전문가들이 세계 통화 및 금융 질서를 재건할 방법을 고민한 배경에는 경기 호황과 격렬한 사회경제적 투쟁전쟁 부채가 있었다외교적 측면에서는 브뤼셀제노바에서 열린 일련의 회의를 통해 1924년 도즈 부채 협상과 1920년대 후반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금본위제를 복원하는 것으로 정점을 찍었다하지만 여기서는 금융 외교의 세부 사항을 파헤치기보다는 전후 통화 재건 과정에 수반된 담론적 변화특히 1918년 이후 미국의 중심성 문제가 화폐물가환율에 대한 새로운 거시경제적 이해와 어떻게 연결되었는지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명확히 말하자면미국의 패권에 대한 문제는 이 맥락에서 승리의 답변이 아닌난처한 질문으로 제기되었다하지만 이는 더욱 구체적으로 논의되었다특히, 1923년에 출간된 <평화의 경제적 결과>와 같은 덜 알려진 저작에서 이러한 상황을 명확하게 설명한 인물은 바로 케인스였다그의 통화 개혁에 관한 논의가 그 예다.

전 세계 경제학자들은 1차 세계대전 이전에 이루어진 최초의 통계 실험을 발전시켜 실시간 데이터로 전후 통화 시스템의 롤러코스터를 추적했다처음으로 세계 경제 전체가 실시간으로 상호 연결된 통화 및 가격 시스템으로 매핑되었다경제학자들은 나중에 '좁은 화폐(narrow money)'라고 불리게 될 표를 작성했다.

또한 '광범위한 자금'(은행 신용)도 추적했다.

수량 이론에 따르면 신용의 변동은 물가 수준과 관련이 있다그리고 두 국가의 상대적 가격 변동은 환율과 실시간으로 연관될 수 있었다중요한 점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이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시스템으로 간주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전체 시스템이 정치화되었다화폐신용물가환율의 모든 움직임에 의문이 제기되었다안정화가 목표인가아니면 전쟁 전 상황으로의 회복이 목표인가안정화 또는 복구가 목표였다면 안정화 또는 복구되어야 하는 것은 무엇이었나중요한 것은 물가였나환율이었나금과의 패리티(parity with gold, 화폐 단위의 가치가 금의 가치와 동일하게 유지되는 상태)였나아니면 부채의 가치였나?

1923년에 출간된 케인스의 통화 개혁에 관한 조약과 같은 텍스트는 당시의 논쟁을 잘 보여준다케인스는 은행 예금유통 현금물가 수준에 대한 데이터를 수집했다이를 바탕으로 케인스는 화폐의 양과 유통 속도를 평균 상품 가격과 연관시켜 개인 버전의 수량 방정식을 추정했다그런 다음 그는 "이 논의의 교훈은... 가격 수준은 신비로운 것이 아니라 몇 가지 확실하고 분석 가능한 영향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이 중 두 가지는... 중앙은행 당국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그의 방정식의 세 번째 항인 유통 속도는 경제의 비합리적인 정신에 달려 있었다그러나 이는 단순히 가격 수준의 변동을 허용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중앙은행이 통제하는 변수를 이용해 민간 신용 활동의 변화를 상쇄해야 한다는 의미였다정책 입안자에게는 선택권이 있었다인플레이션이나 디플레이션을 촉진하거나 물가 수준을 일정하게 유지하려고 시도할 수 있었다각 선택은 국내 정치 경제 내에서 서로 다른 분배 결과를 가져오는 선택이었다인플레이션은 채권자보다 생산자에게 유리한 경향이 있고디플레이션은 그 반대의 영향을 미친다가격 안정은 전후의 현상 유지를 위한 선택이었다케인스는 후자를 선호했다이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그러나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은 이러한 각 선택이 통화의 대외적 위상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상대적으로 빠른 인플레이션은 통화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경향이 있고안정화 또는 디플레이션은 그 반대의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이러한 모든 사고방식은 오늘날에도 분명하다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이러한 생각은 실시간 경제 분석으로 뒷받침되는 본격적인 옵션 목록으로 처음으로 명료화되었다그리고 이 일은 전 세계에서 동시에 일어났다케인스는 직접 세계를 지도화했다하지만 하버드와 워싱턴스톡홀름베를린카이로라지소련도쿄의 새로운 경제 연구 센터의 분석가들도 마찬가지였다이들 모두는 통화 및 금융 정책에 내재된 선택과 그것이 국내 사회분배 및 글로벌 위상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동일한 인식에 직면했다.


19세기 금본위제가 통화 절대주의의 시대였다면케인스와 그의 동료들에게 1차 세계대전의 영향은 통화 문제에서 신중한 자생적 입헌 정부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통화 정책은 좋든 싫든 선택된다소 신중한 관리의 영역이 되었다미국과 같은 일부 국가가 금본위제를 유지하더라도 금과 은 시장은 매우 규제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역시 정치적 가격에 따라 결정되었다따라서 시스템을 규제하는 것은 금이 아니라 금의 가치와 공급량까지 규제하는 정치적 결정이었다.

이는 곧 국제 통화 문제의 틀도 자연스러운 위계와 형태를 잃었다는 것을 의미했다전쟁은 세계를 혼란에 빠뜨렸다. 1918년 이후의 과제는 이를 의도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었다케인스와 같은 통화 전문가들과 유럽과 미국의 통화 전문가들의 역할은 이 과정을 안내하는 것이었다.

더 이상 유전적 질서나 자연적 질서 중 어느 쪽도 가리킬 수 없게 되면서 위계는 극적으로 높아졌다국제 문제에 관한 한진정한 선택은 위계질서 사이의 선택이라는 것을 의미했다그리고 여기에서 헤게모니의 문제가 처음으로 명시적으로 공식화되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화폐 시스템이 의도적으로 관리되는 시스템으로 재건되고 그 중심이 단 한 곳이어야 한다면가능한 선택은 단 한 곳미국뿐이었다.

미국은 분명히 세계 경제 전체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전쟁 부채의 구조를 고려할 때 고전적인 금본위제 시대에는 영국이 행사하지 못했던 권력을 행사한 것이다. 1914년 이전 런던 시티를 드나드는 자금의 흐름에는 의심할 여지 없이 정치적 논리가 있었다그러나 1917년 이후 전쟁 부채 및 배상금 네트워크 내에서 정부 간따라서 사실상 납세자 간 협상이 이루어진 것과는 매우 달랐다. 1920~1921년 사이의 미국 디플레이션의 충격은 미국의 영향력이 중장기 재정 정책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었다이자율환율물가 수준을 주도했다.

1920~1921년의 충격이 분명하게 보여주듯이달러의 실질적인 힘을 중심으로 글로벌 통화 시스템을 재건하기로 한 결정은 유럽과 동떨어져 있고자체적인 사회 및 경제 위기로 인해 변덕스러운 미국 민주주의의 세력에 의해 지배되며금융 리더십의 경험이 10년 미만인 근본적으로 새로운 권력 중심을 만들어낼 것이다.

이런 상황은 전례가 없었다통화 시스템이 이렇게 정치화된 적은 없었다이렇게 강력한 국가 집단이 단 한 명의 지배적인 금융가그것도 유럽 외부의 금융가에게 종속된 적은 없었다.

이것은 전쟁의 드라마가 만들어낸 급진적인 새로운 현실이었고이것은 역사적 참신함으로 이해되는 헤게모니의 문제였으며케인스는 가능한 모든 정보와 에너지로 이러한 발전에 저항하는 것이 영국 엘리트의 적절한 사명이라고 확신했다지배적인 상황에서 미국을 유일한 통제 센터로 하는 관리 화폐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실험이었다.

물론 케인스는 미국이 통제하는 단일 중앙집권적 통화 시스템이 최적의 해결책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그러나 통화 질서를 관리되는 것으로 인정하고 그 관리의 중심을 미국으로 옮기는 이중 혁신은 당장 실행하기에는 너무 위험했다.

케인스는 실제로 미국의 통화 정책이 유럽의 통화 정책보다 훨씬 더 새로운 경제 사고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더 현대적이었다고 인정했다그럼에도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현재 상황에서 우리의 행동의 자유를 미국 연방준비위원회에 넘기는 것은 성급한 일이다우리는 아직 위기 상황에서 용기와 독립성을 가지고 행동할 수 있는 충분한 경험을 갖고 있지 못하다연방준비위원회는 부분적인 이해관계의 압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아직 완전히 성공할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다여전히 저금리 캠페인의 성급함에 압도당할 수 있다영국의 영향력에 대한 의혹은 위원회를 강화하기는커녕 대중의 외침에 대한 저항력을 크게 약화시킬 것이다또한 약점과 실수를 떠나서 동일한 정책을 동시에 적용하는 것이 항상 양국에 이익이 될 것이라는 확신도 없다신용 사이클의 발전과 비즈니스 상황은 때때로 대서양 양쪽에서 크게 다를 수 있다."

케인스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화폐의 진화 과정에서 '관리형통화가 불가피한 단계에 도달했지만아직 단일 기관에 관리를 맡길 수 있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는 랄프 호트리(Ralph Hawtrey)와 같은 동시대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최선의 경우 연준과 영국은행이 긴밀히 협력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그러나 최선의 정책은 연준과 영국은행이 국내 물가 안정을 개별적으로 추구하는 것이었다그러면 전쟁 전 파운드와 달러의 패리티와 같이 임의로 선택한 수준이 아니라 각자의 가격 수준에 따라 결정된 패리티로 환율이 자연스럽게 안정화될 것이다이는 채권 보유자에게는 좋겠지만 영국의 생산과 고용사회적 균형을 희생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따라서 케인스는 당시 많은 영국 정책 입안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제1차 세계대전 위기의 해결은 미국과 대영제국 간의 일종의 대등한 관계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상상했다이는 당시 영국과 미국의 전함 함대 비율을 5:5로 고정하고 일본과 다른 해군 강대국들에게 더 적은 배급량을 할당하는 해군 협정에 담긴 논리가 바로 이 논리였다.

통화와 관련하여 케인스는 나머지 세계 경제의 경우 달러와 스털링 존(Sterling Zone, 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이 주도한 경제 및 통화권사이에서 통화를 조정할 것을 제안했다단극 체제에 저항했다면 다극 체제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1923년 이후 실제로 등장한 것은 금본위제가 케인스가 인정한 것보다 훨씬 더 지배적인 단일 및 이원론적 통화 질서의 지저분한 타협이었다이러한 전후 통화 질서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자세히 설명하겠다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1차 세계대전 이후 통화 거시경제학 분야에서 패권이라는 새로운 문제가 얼마나 명확하게 정리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는 미국이 근본적으로 재편된 시스템의 사실상 중심지로 급부상하면서 통화 시스템을 정치적 구조로 볼 수 있는 기본적인 개념적 전환과 맞물린 결과였다금본위제의 붕괴와 통화 거시경제학이라는 새로운 분야의 등장은 이전에는 제기된 적이 없는 방식으로 글로벌 금융 리더십에 대한 질문을 제기했고미국이 리더십 문제에 대한 확실한 해답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충격은 더욱 가중되었다통화 거버넌스에 대한 기본적인 질문은 다시는 그 순간과 같은 극명한 참신함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출처Chartbook 310 The shock of the new: Dollar dominance and modern monetary macro in the 1920s. (Hegemony note 05)

[번역이꽃맘

덧붙이는 말

애덤 투즈(Adam Tooze)는 컬럼비아대학 교수이며 경제, 지정학 및 역사에 관한 차트북을 발행하고 있다. 『붕괴(Crashed)』, 『대격변(The Deluge)』, 『셧다운(Shutdown)』의 저자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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