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 반제국주의, 초국적 계급 착취

[편집자 주] '제국주의'라는 용어는 국가 간 자본 이동의 시대에 적용 가능성을 상실했을까, 아니면 오늘날의 착취, 불안정, 불평등의 글로벌 패턴과 여전히 관련성을 유지하고 있을까? 전 세계 노동자들이 점점 더 열악한 노동과 생존 조건에 직면해 있고, 세계 주요 경제 강대국들 간의 대립과 세계경제질서 재편이 심화하는 가운데, 국제적 대립과 투쟁의 본질을 평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또한, 반제국주의-반미투쟁 지상주의 또는 반제국주의를 넘어 친러시아, 친중국으로까지 지평을 확장하는 것이 정당한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도 필요한 문제다. 

지난 7월 제국주의에 대한 특별 심포지엄이 마르크스주의 저널인 “Science and Society”를 통해 열렸고 논문집이 최근 발표됐다. 참세상은 이 논문집의 주요 글과 관련 주장을 모아 연재한다.

(1) '반제국주의' 좌파의 참을 수 없는 마니교주의 (윌리엄 로빈슨)
(2) 제국주의, 반제국주의, 초국적 계급 착취 (윌리엄 로빈슨)
(3) 누가 사회주의를 언급했나? (톰 브라스)
(4) 제국주의 체제는 여전히 우리와 함께 있다 (알렉스 캘리니코스)
(5) 로빈슨 "마니교" 딱지의 ​​의도치 않은 불행한 결과 (스티브 엘너)
(6) 제국주의: 나무가 숲을 보는 것을 막지 못하게 하라 (훌리오 후아토)
(7) 국제적 자본주의 계급 이론: 평가 (데이비드 라이브먼)
(8) 21세기의 제국주의와 반제국주의 (준 쉬)
(9) 제국주의에 ​​관하여: S&S 심포지엄에 대한 답변 (윌리엄 로빈슨)
(10) 민주주의에 대한 제국의 지배를 해체하다 (이녜스 발데즈) 
(11) 양극화된 세계에서 마르크스의 반식민주의, 새로운 아(亞)제국주의 그리고 국제주의

출처: AI 생성

좌파 사이에서 제국주의는 레이먼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가 말한 '키워드'가 되었는데, 그 의미의 문제가 “논의하는 데 사용되던 문제와 분리할 수 없이 얽혀 있다”는 것이다. 윌리엄스에 따르면, 이 단어들은 “문제의 요소로서 그 단어를 의식하지 않으면 실제로 생각할 수 없고, 어떤 단어들은 집중할 수도 없다”고 한다. 그러한 키워드 중 하나인 제국주의를 “주로 경제 시스템이나 외부 투자, 시장과 원자재 공급원에 대한 침투와 통제로 이해한다면 식민지 또는 이전 식민지의 지위에 대한 정치적 변화는 지속적인 경제 시스템을 제국주의로 설명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근본적인 사회적, 정치적 갈등을 지칭하는 다른 단어와 마찬가지로 제국주의도 의미론적으로 하나의 적절한 의미로 환원될 수 없다. 그 의미의 중요한 역사적, 현대적 변화는 그 자체로 연구되어야 하는 실제적 과정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제국주의의 '문제', 즉 “그들 나름의 용어로 연구되어야 하는 실제 과정”은 무엇일까? 2023년 여름, 나는 지난 반세기 동안 세계 자본주의의 급진적 변화와 현재 지정학적 갈등의 고조라는 맥락에서 제국주의와 반제국주의에 대한 질문에 답하고자 세 편의 에세이를 출간한 바 있다. 정치적으로는 미국과 다른 서방 강대국 또는 그들이 지지하는 정부가 전 세계에서 자본주의적 착취와 억압을 자행할 때는 쉽게 비난하지만, 억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이며 독재적인 국가가 미국과 적대 관계에 있거나 경쟁 관계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를 외면하거나 심지어 옹호하는 자칭 '반제국주의' 좌파를 비판했다. 이 '반제국주의' 좌파는 마르크스주의 정치 및 이론적 틀에 현실주의적 틀로 대체하여, '서구와 나머지'라는 마니교적(이분법적) 이야기 속에서 미국과 그 동맹국이라는 단 하나의 적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사회주의자로서 우리는 제국주의에 반대하면서 미국 제국과 싸운다는 명목으로 자본주의적 착취와 억압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나는 여기서, 제한된 지면 내에서 2023년 여름 에세이에서 제시했던 주장을 더 발전시키려고 노력할 것이다. 나는 제국주의와 반제국주의에 대한 깊은 재고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나는 제국주의라는 용어, 혹은 개념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전혀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대신 초국적 착취와 그와 관련된 국가의 정치적·군사적 개입을 새로운 방식으로 개념화하고 논의할 방식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국주의와 반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은 자본주의 세계화를 통해 세계 자본주의가 겪은 변화에 대한 분석에서 시작해야 한다. 세계 자본주의의 지속적이고 개방적인 진화 속에서 글로벌 자본주의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이 시대는 진정한 초국적 자본의 부상, 모든 국가가 종종 폭력적으로 글로벌 통합 생산과 금융, 서비스 시스템으로 통합되거나 재통합되는 과정, 그리고 초국적 자본으로의 전례 없는 자본의 집중과 중앙집중화를 특징으로 한다. 

전 세계의 지역 자본가들 중 일부가 이러한 세계화된 축적의 회로에 휩쓸려 들어갔다. 이제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 초국적 자본가 계급(TCC, Transnational Capitalist Class)의 강력한 부대가 존재한다. 전 세계적으로 통합된 생산, 금융, 서비스 시스템을 통해 글로벌 자본은 자원을 통제하고 전 세계 노동력을 착취한다. 전 세계 자본의 헤게모니적 일부분인 TCC는 영토에 얽매이지 않으며 국민국가에 의존하고 국민국가와 경쟁해야 하지만, 어느 한 국민국가와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는 지난 5세기 동안 자본주의가 외연을 확장하고 세계를 정복한 역사적 과정이다.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팽창성을 갖는다. 정체 상태는 곧 위기 상태를 의미한다. 그 주체는 끊임없이 축적의 지평을 넓히고, 점점 더 많은 공간에 가치 형태를 부과하고, 새로운 자원을 장악하고, 새로운 노동력을 착취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제국주의는 경제 외적인 정치, 군사, 이데올로기적 과정에 의해 촉진되는 경제적 (계급) 관계를 의미한다. 레닌과 그 세대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세계 자본주의가 진화하는 초기에 이에 대해 분석했다. 이들은 국민 국가가 아닌 계급에 기반한 제국주의 이론을 발전시켰다. 이들은 강력한 국가 자본주의 독점체의 부상, 과잉 축적된 자본과 새로운 노동력 및 원자재 공급원을 확보하기 위한 해외 신시장 선점 경쟁, 각 국가를 통한 국가 자본주의 계급 간의 갈등과 경쟁을 분석했다. 그들의 분석은 틀린 것이 아니라,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다. 자본은 원래 서구의 중심지에서 폭력적으로 확장하면서 식민지 지역을 약탈하고 착취했으며, 대도시 중심지에 축적된 잉여 가치를 식민지로부터 추출했다. 그러나 이러한 수탈과 착취의 관계와 그에 따른 잉여가치의 흐름은 이제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서구 식민지 자본이 식민지에서 단순히 잉여가치를 빼내 식민지 금고에 다시 쌓아두었던 초기의 구조와 닮지 않았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확장과 착취의 전 세계적 계급 관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이론화할 필요가 있다. 특히 누가 착취하고, 누가 착취당하는지 물어야 한다. 만약 제국주의가, 자본이 국경을 넘어 자원을 수탈하고 노동을 착취하며, 그 안에서 추출한 잉여가치를 다시 국경을 넘어 유통시키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러한 제국주의는 현재 전 세계에서 다양한 방향으로 일어나고 있으며, 구 제3세계를 포함해 수많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명제는 문제적이다. 다만, 이 명제가 제3세계의 이른바 '억압받는 국가들'이 세계적인 제국주의적 착취의 망에 연루되어 있다는 점 때문이 아니라, 제국주의를 억압하는 국가와 억압받는 국가(또는 제국주의 국가)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착취할 수는 없다. 이는 극단적이고 단순한 물화이다. 착취하는 것은 계급이며, 착취당하는 것도 계급이다. 제국주의는 항상 국가 간의 관계가 아니라, 글로벌 자본과 글로벌 노동 간의 폭력적인 계급 관계였다. 다만 이 관계는 세계 경제가 국가 관할 구역으로 정치적으로 분리되고, 세계적 규모의 불균등한 자본 축적에 의해 매개된다. 우리의 과제는 이러한 관계를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에, 즉 초국적 자본과 계급이 국가, 특히 국민 국가와 맺는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구 제3세계의 많은 국가들에서 TCC의 강력한 파견대가 등장하면서 소위 '억압받는 국가'의 초국적 자본가들은 전 세계의 자원을 적절히 활용하고 노동력을 착취하고 있다. 2023년 여름 에세이에서 언급했듯이, 이러한 초국적 자본은 단순히 '북반구' 또는 '삼극동맹(Triad, 북미, 서유럽, 동아시아(주로 일본))'의 자본만이 아니다. 여기에는 과거 식민지였던 국가의 강력한 초국적 기업 및 금융 대기업의 부상이 포함되며, 이들은 이제 레닌 시대에 유럽 제국주의 열강이 그랬던 것처럼 전 세계로 자본을 수출한다. 세계 최대 종합 광산 회사 중 하나인 브라질의 초국적 대기업 발레(Vale)는 21세기에 더 이상 “브라질” 기업이 아니다. 이 회사는 모든 대륙에서 사업을 운영하고 있으며 전통적인 북미와 유럽의 핵심 지역에서 수만 명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 외에도 수많은 사례가 있다. 인도에 본사를 둔 대기업 타타(Tata)는 영국에서 가장 큰 제조업 고용주로, 따라서 노동을 자본주의적으로 착취한다. 중국계 기업은 북미와 유럽을 포함한 모든 대륙에서 활동하며 미국과 유럽 노동자를 착취하고 있다. 멕시코에 기반을 둔 다국적 기업들은 라틴아메리카, 북미 등 전 세계에 투자하여 모든 국적의 노동자를 착취하고 있다. 걸프에 기반을 둔 자본가들은 전 세계로 자본을 수출한다. 또한 글로벌 자본의 구조를 분석하기 시작하면 전 세계를 가로지르는 상호 연동된 네트워크의 복합체와 특히 글로벌 금융 회로를 통해 매우 높은 수준의 초국적 통합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프레임은 여전히 문제가 있다. 이 프레임은 중국, 브라질, 인도 등이 제국주의 강대국이며, 제국주의자들의 위계와 그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국제 질서에서 각각 어느 정도 권력을 갖고 착취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러한 접근 방식을 체계적으로 적용한다면 제국주의가 아닌 국가는 거의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최근 몇 년 동안 중앙 아프리카 국가인 르완다는 중앙아프리카공화국과 모잠비크에 군대를 파견했으며, 베냉과 다른 지역에도 지역 반란과 싸우기 위해 더 많은 군대를 파견할 것으로 보인다. 유럽연합이 일부 자금을 지원한 이 군대는 르완다 기업들이 현지 광산, 토지, 산업 광구를 점령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었다. 이코노미스트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이러한 파병은 두 가지 큰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돈을 벌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려는 것이다. 보상은 르완다 기업들이 광물 채굴권을 얻는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르완다 대통령] 카가메는 모잠비크와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이 돈이 없기 때문에 르완다에 보상하기 위해 '다른 방법을 찾기로' 합의했다고 말하며 이를 인정했다. 많은 르완다 기업들이 두 나라에 진출했다. 이들 중 다수는 르완다 집권당의 투자 부문인 거대한 지주회사 크리스탈 벤처스(Crystal Ventures)와 관련이 있다. 군대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크리스탈 벤처스가 따라간다.” 이 기사는 농업과 광업에서 소비재와 소매업에 이르기까지 100개 이상의 르완다 기업이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 등록되어 있으며 모잠비크에서도 거래를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국가 간의 관계로서의 제국주의 개념을 초국적 계급 착취의 네트워크에 중점을 둔 분석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것이 분명하다. 나의 반대자들은 최소 두 가지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첫째는 세계 자본주의의 중심-주변부 구조, 둘째는 전 세계에서 미국의 통제와 개입주의의 엄청나게 큰 역할이다. 첫 번째로,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를 통해 형성된 국제적인 노동 분업과 중심-주변부 구조가 여전히 존재한다. 이 구조는 상당한 변화를 겪고 있지만, 여기에서 다룰 수는 없으며, 여전히 제3세계에서 노동이 더 강도 높게 착취되고 자본의 절대적 잔혹함이 더욱 드러나고 있다. 좌파 대부분은 이러한 착취의 강도가 핵심 국가의 자본가들만 이익을 얻는 것으로 보거나, 더 나쁜 경우, 이를 국가 전체에 이익이 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세계 경제의 중심-주변 구조와 세계 자본주의의 관계는 이전 세기에 부합하는 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으며, 특히 대도시 자본에 억압받고 그들이 거주하는 (그러나 반드시 그들의 자본이 머무르는 곳은 아닌) 국가의 노동자-농민과 계급 동맹을 맺을 준비가 된 주변 지역의 일부 부르주아지의 관점에서 이해될 수 없다. 아프리카의 하층 노동 대중은 초국적 자본에 의해 과도하게 착취당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착취를 자행하는 주체는 '억압 국가'가 아니라 르완다의 국영 및 민간 자본가를 포함한 전 세계의 초국적 자본가들이다. 중국 민간 및 국영 기업은 콩고에서 코발트 생산의 대부분을 통제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콩고 광부들을 잔인하게 착취하고 콩고를 약탈하고 있다. 이렇게 생산된 코발트는 초국적 자본에 의해 아이폰과 기타 전자 장비가 제조되어 전 세계로 판매되는 아시아의 산업 회로로 돌아간다. 아이폰의 경우를 예로 들어 애플의 실제 소유 구조를 살펴보면, 전 세계의 초국적 자본가와 금융 지주 회사가 애플에 투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르완다가 중앙아프리카에서 수행하는 정치적-군사적 역할은 정치적-군사적 개입과 경제적 착취의 관계를 명확히 보여준다. 르완다 군대가 가는 곳마다 르완다 자본가들이 활동할 공간이 생긴다. 르완다를 '제국주의 국가'로 묘사하는 것은 터무니없을 수 있다. 그러나 르완다는 좌파가 제국주의라고 설명하는 바로 그 행동을 하고 있으며, 이는 좌파의 제국주의 개념이 얼마나 시대에 뒤떨어져 있는지를 짚는다. 그렇다면 초국적 자본의 착취는 어떻게 가능할까? 이러한 전 세계적인 착취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정치적, 군사적 과정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자본은 국가 없이는 재생산이나 확장이 불가능하다. 이는 세계 자본주의의 역사 전체에 걸쳐 사실이었으며,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이 글로벌화 시대에 세계는 초국적 자본에 열려 있어야 하고, 그렇게 열린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착취와 축적의 자유에 대한 모든 위협은 억제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쿠데타와 군사 개입에서부터 경제 제재, 구조 조정 프로그램, 자유 무역 협정, 부채 및 금융 레버리지, 법적 투쟁 등의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수단들이 필요하다.

미국 국가는 자본주의 세계화 과정에서, 초국적 자본이 세계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그를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다. 미국은 자본이 축적될 수 있는 공간을 강제로 열어주는 공성 망치 역할을 하고, 이에 대한 저항을 파괴하는 철퇴로 계속해서 활동하고 있다. 좌파의 많은 이들은 이러한 미국의 세계적 개입주의에 대해 '미국 자본'이나 '미국의 이익'을 다른 강대국들과의 경쟁 또는 동맹을 통해 증진시키기 위한 것으로 특징지을 것이다. '국익'이라는 표현(예: '미국의 이익을 수호하는 것')은 의미가 없으며, 마르크스주의 분석에서는 자리가 없다. 우리가 진정으로 물어야 할 질문은 미국 국가가 세계적으로 수행하는 행동 뒤에 어떤 계급적 이익이 있는가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자본주의 세계화 속에서 미국 국가는 세계 자본주의의 가장 강력한 무기로 기능해왔다. 이를 통해 세계의 가난한 사람들과 노동하는 이들이 억제되고 통제되었으며, 세계는 초국적 기업의 약탈에 더욱 개방되었고, 자본의 무제한 축적을 위협하는 국가들은 공격받았다. 그러나 내가 다른 곳에서 설명했듯이, 미국의 개입은 다른 국가의 자본가들을 차단하기보다는 국적에 상관없이 초국적 자본에 지역을 개방하는 역할을 해왔다.

미국은 아프리카의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라틴아메리카의 억압적인 정부를 지지하는 반면, 같은 국가에서 중국이나 다른 초국적 투자자들은 노동력을 착취하지만 억압적인 국가를 지지하기 위해 정치적 또는 군사적으로 개입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서구의 개입과 중국 자본주의의 착취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사회주의자로서 우리는 정치적, 군사적 개입뿐만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계급 착취에도 반대해야 한다. 예를 들어 오늘날 중국이나 브라질, 인도에 기반을 둔 자본가들은 전 세계에 자유롭게 자본을 수출하고 노동력과 자원을 착취하기 위해 군사적 침략을 하거나 식민지를 건설할 필요가 없다. 이는 역사적으로 서구의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의해 달성된 것이다. 제국주의는 본질적으로, 즉 역사적 맥락과는 구별되는 의미에서, 서구적인 것이 아니다. 제국주의가 역사적으로 서구적 정체성을 가졌던 이유는 자본주의가 서구에서 태어나 그곳에서부터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상황은 급격히 변화하고 있다. 글로벌 자본주의는 과잉 축적의 구조적 위기, 국가 정당성의 정치적 위기, 자본주의 헤게모니와 국제 갈등의 위기, 그리고 지구 생태계의 환경적 위기에 빠져 있다. 우리는 자본주의 통치의 일반적 위기, 전 세계적인 불안정성과 혼란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으며, 이는 지정학적 대립과 쇠퇴하는 패권 국가의 무모함을 촉진하고 있다. 이 위기는 전 세계적으로 통합된 경제와 국가 기반의 정치 권위 및 자본주의 재생산 시스템 간의 모순을 심화시킨다. 초국적 자본은 끝없는 세계적 축적을 추구하지만, 이 축적을 각자 영토 내에서 촉진하는 자본주의 국가들은 모순된 임무를 갖고 있다. 이들은 또한 정당성을 확보하고, 자신들이 통치하는 국가의 사회 형성을 재생산하며, 국내 질서가 붕괴되지 않도록 하고, 성장을 지속하며, 사회 통제를 실행하고, 초국적 유동 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다른 국가들과 경쟁해야 한다. 글로벌 자본가들과 달리, 국가 및 정치 엘리트들은 국가와 다른 국가들 및 국제 시스템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지위를 재생산한다. 국가와 국가 엘리트들은 자신들을 재생산하기 위해 초국적 자본을 재생산해야 한다. 자본주의 국가들은 자본 축적 조건을 재생산하면서 해결해야 할 문제를 발생시키고, 이는 다른 국가들과 초국적 자본과의 갈등을 초래할 수 있다. 국가들은 자본의 축적 명령에 따라 압력을 받는 동시에, 계급 투쟁과 정치적 갈등이 심화됨에 따라 노동자 및 대중 계급으로부터의 압력도 받는다.

글로벌 자본의 구조와, 그 구조 내에서 초국적 자본과 지역, 국가, 지역 단위의 자본 간의 관계는 경험적 연구의 대상이다. 국가 관리자와 자본가들이 중첩되는 국가 자본이 상충하는 방향으로 끌려갈 가능성도 마찬가지다. 경제와 정치는 더 큰 전체성의 두 가지 측면으로, 모순된 통일체를 형성한다. 또한 초국적 자본이 영토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해서 국가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이때 국가란 지리적 공간이 아니라 권력의 중심을 의미한다. 초국적 자본의 클러스터가 그들이 발생한 국가와 특별한 관계를 유지할 가능성도 경험적 연구의 대상이다. 그러나 우리는 국경을 넘어 활동하는 국가 자본과 초국적 자본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이 글에서는 특히 복잡한 중재 수준에 대해 공간 제약으로 인해 단순화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역사적 과정도 정체되지 않으며, 모든 과정은 기존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상황으로 이어지는 역전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글로벌 자본주의 위기가 심화됨에 따라 국가들은 민족주의, 포퓰리즘, 보호주의로 나아가고 있다. 이는 미국의 보호주의나 중국 정부의 기술 재벌 억제와 관련이 있다.

초국적 자본가 계급(TCC)은 과잉 축적된 자본을 위한 새로운 시장을 열어야 한다는 압력에 직면해 있으며, 이는 초국적 자본의 클러스터를 축소된 잉여 가치 몫을 두고 극심한 경쟁으로 내몰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압박이 국가 간 경쟁과 지정학적 갈등을 유발한다는 증거는 없다. TCC는 보호주의와 국가의 축적 전략 개입에 반대해 왔다. 자본이 글로벌화된 이유는 이윤율에 대한 국가 경제적, 기술 산업적, 사회적 제약을 회피하기 위해서였으며, 다시 국가의 틀로 돌아갈 의도는 없다. 미국과 중국 정부는 초국적 자본 통합을 저해하고 TCC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는 조치를 취해 왔다. 미국 상공회의소는 오바마, 트럼프, 바이든 정부 아래 관세와 초국적 자본의 자유를 제한하는 다른 조치들에 반대해 왔다. TCC는 국가의 개입 없이 전 세계에 접근하기를 원한다. 바이든 행정부는 반도체,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인공지능 시스템과 관련된 중국 기업에 대한 투자를 제한했지만, 미국에 본사를 둔 기술 초국적 기업들은 이러한 정책을 지지하지 않는다. 세계 최대 반도체 제조업체 중 세 곳인 엔비디아, 인텔, 퀄컴은 백악관의 제한 조치에 반대해 왔다. 일론 머스크, 팀 쿡, 빌 게이츠를 비롯한 수많은 유명 기업 경영자들이 최근 몇 달 동안 중국을 방문해 그들의 사업 확장에 대해 논의했다. 

우리는 통합된 글로벌 경제 내에서 여러 중심이 존재하는 다극적 또는 다중심적 세계 체제로 이동하고 있다. 이 체제는 북미 자유 무역 블록, 유럽 연합, 중국 중심의 아시아 경제 지역과 같은 여러 초국적 축적의 중심들을 포함하며, 이들 각 중심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2023년 여름 에세이에서 주장했듯이, 이러한 신흥 글로벌 자본주의의 다원주의는 전 세계적으로 민중의 투쟁에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할 수 있지만, 정치적으로 다극적인 세계가 새롭게 부상하는 자본주의의 중심들이 기존의 중심들보다 덜 착취적이거나 억압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나는 단순히 '제국주의 간 경쟁'으로 국제적 갈등의 고조를 설명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으며, 21세기의 세 번째 10년에서 제국주의와 초국적 자본과 국가 간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에 대해 더 명확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본다. 미국 국가는 여전히 세계 민중에게 가장 큰 위협이며, 글로벌 자본주의라는 학살의 지휘 본부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이 미국의 개입주의에 반대할 때, 다른 나라들에서의 자본주의적 착취와 국가 억압을 용인하거나, 그러한 착취와 억압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지지하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 위기가 심화됨에 따라, 사회주의적 정치에는 타협 없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또는 초국가주의가 요구되며, 이는 특정 지리적 블록을 지지하는 대신 각 국가와 블록에서의 노동자와 민중 계급 투쟁을 지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출처] Imperialism, Anti-Imperialism, and Transnational Class Exploitation

[번역] 류민

덧붙이는 말

윌리엄 I. 로빈슨(William I. Robinson)은 산타바바라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사회학, 글로벌 연구 및 라틴아메리카 연구 석좌 교수다. 그는 글로벌 자본주의, 세계 정치, 사회 이론, 라틴아메리카에 관한 광범위한 저서를 집필했다. 최근 저서로는 ⟪폭풍 속으로: 새로운 글로벌 자본주의에 관한 에세이(Into the Tempest: Essays on the New Global Capitalism)⟫(2018), ⟪글로벌 경찰 국가(The Global Police Stat)⟫(2020), ⟪글로벌 내전: 팬데믹 이후의 자본주의(Global Civil War: Capitalism Post-Pandemic)⟫(2022)가 있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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